ⓒ시사IN 조남진5월27일 김재규 부장의 여동생 김정숙씨가 파주 자택에서 가족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씨의 장남 김성신씨가 든 사진은 김씨의 남편 김양환씨가 중앙정보부장 관사에서 김재규 부장과 함께 찍은 것이다.

1980년 5월24일 새벽,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직후, 셋째 여동생 김정숙의 서울 잠실 자택에 전화벨이 울렸다. 중정 최종대 비서가 비통한 목소리로 “부장님 방금 떠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충격을 받고 전화기를 떨어뜨린 김정숙은 자지러지듯 어머니를 불렀다. 김재규 부장의 모친인 권유금 여사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하늘 아래 있고 싶어 당시 고향 경북 선산에서 올라와 잠실 딸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딸의 외마디 비명과 통곡을 듣고 권 여사가 엄숙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울지 마라. 자고로 효자에게는 불충이 없는 법이다. 네 오라비 그렇게 불충한 사람 아니다. 오라비가 한 일은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튿날 김정숙씨 부부는 큰오빠의 시신을 인수하러 다른 형제들과 합수부에 들어갔다. 함께 사형당한 4명의 부하(박선호·유성옥·김태원·이기주)와 한자리에 묻어달라고 한 생전 오빠의 유언에 따라 유가족들이 상의에 들어갔다. 합수부 수사관이 이 장면을 상부에 보고하자 발칵 뒤집혔다. 전두환 합수부는 사형시킨 김재규와 부하 4명의 시신을 강제로 경기도 광주, 의정부, 동두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서 매장시켰다.

이후 김재규 부장 유족에게 닥친 날들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부인 김영희 여사는 합수부에 끌려가 말로 표현 못할 고초를 겪고 집과 재산마저 다 빼앗겼다. 그나마 김재규 부장의 장인이 전남 순천에서 꽤 재력이 있는 유지였다. 그는 딸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물려줘 사위의 유언을 지키도록 했다. 김영희 여사는 1990년대까지 남편의 유언에 따라 사형당한 남편 부하의 자녀들에게 학자금을 지급했다.

10·26 당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김재규 부장 바로 아래 동생 김항규씨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집과 회사 등 모든 재산을 헌납한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목숨만 부지한 채 풀려났다. 이후 폐인이 되다시피 한 채 경북 봉화의 한 사찰로 출가했다. 김재규의 다른 형제자매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숨죽여 살아야 했다. 교수 부부였던 두 여동생 내외는 전두환 신군부의 등쌀에 환멸을 느껴 미국으로 떠났다. 10·26 당시 현역 육군 대위로 큰형 김재규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막냇동생 김영규씨는 군에서 요주의 인물로 취급되었다. 무기를 다루지 않는 부서로만 전전하는 ‘특별대우’를 받았던 그는 대령으로 군복을 벗었다.

10·26 이후 유족은 입이 있어도 벙긋하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아왔다. 아직도 대부분의 10·26 사건 가담 유족들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 부장 셋째 여동생 김정숙씨(82)가 오빠의 40주기를 맞아 유족을 대표해 ‘김재규 형사사건 재심 청구인’으로 나섰다. 유족 가운데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김정숙씨를 파주 자택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아들 김성신 교수와 남편 김 양환씨가 함께했다.

40년 만에 김재규 부장 재심을 청구하게 된 배경은?

이번 재심은 유족이 갑자기 의도해서 신청한 것이 아니다. 〈남산의 부장들〉 영화가 나오고, 보안사가 10·26 재판 당시 몰래 녹음한 전체 녹음파일을 언론에서 발굴하고, 이걸 민변 변호사님들이 받아 재심 사유가 된다고 나서주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결정한 일이다.

그동안 오빠의 명예회복 염원이 강했을 텐데.

10·26에 대해 그동안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적어도 ‘전두환이 말한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널리 알려지기 바랐다. 10·26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상황은 덮어둔 채 오직 오빠가 대통령이 되려고 패륜을 저질렀다는 천박한 공격에는 가슴이 아팠다.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인가?

사형당하기 전날인 5월23일에 마지막으로 면회 갔다. 바로 다음 날 사형당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합수부가 그날 우리 형제들을 오전 오후로 나눠서 면회시켰다.

10·26 사건 재판 초기에 합수부가 가족에게 ‘재판 거래’를 제안했다는데?

둘째 오빠(김항규씨)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간 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나와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합수부가 ‘김재규 사선변호사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가족을 하나씩 불러 작살내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었다. 큰오빠(김재규)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큰오빠는) 가족을 지키는 문제로 고심하셨고 결국 본인 육성으로 법정에서 10·26 정신을 설파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신 듯했다. 결국 4차 공판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변호사를 안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국선변호사 체제로 바뀌었지만 안동일 변호사 같은 국선변호사가 더 열심히 변론했다. 작은오빠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일찍 돌아가셨다.

오빠는 가족 내에서 성품이 어땠나?

‘불의에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 내가 여고 시절 오빠가 군에 사표 내고 나온 일이 있다. 미군의 한국군 장교 차별 대우를 시정해달라고 요구했다가 미군 장교가 권총을 들이대자 가슴을 열고 쏠 테면 쏴보라고 항의하니 징계위에 회부했다더라. 오빠가 자발적으로 옷 벗고 나왔다. 아버지는 “불의에 머리 숙이지 않아서 잘했다. 너 농사지을 땅은 장만해뒀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셨다. 그 뒤 오빠가 대구와 김천에서 교사 생활하시다 다시 군에서 불러서 들어갔다.

전두환 합수부는 김재규 부장을 부정축재 사범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오빠와 부하들, 형제들까지 샅샅이 조사했지만 별문제 없었다. 아버지는 가훈을 ‘남에게 해를 주면 안 된다’로 정하고 우리 8남매에게 공직자가 월급 외에 다른 돈을 가져오면 도둑놈이라고 가르쳤다. 중정부장이 된 뒤 큰오빠가 공기업에 근무하는 남편을 불러서 “김 서방, 자네가 굶게 되면 내가 쌀 한 가마니 연탄 백 장은 대줄 수 있네. 절대 나쁜 생각, 나쁜 돈은 손댈 생각 말게”라고 강조할 정도였다.

평소 오빠가 여동생들을 많이 예뻐했다고 하더라. 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채홍사 문제로 오빠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박 전 대통령이 여자 불러 술 마시는 자리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셨다. 가족 모임 때 한번은 “오빠, 그런 소문이 있던데…”라고 슬며시 물었더니 “내가 그게 제일 고민이다. 여자 형제 다섯이나 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려니 나도 힘들다. 너희들은 모르는 척해라”고 하셨다.

10·26에 가담한 부하들이 끝까지 김재규 부장 지시를 따르겠다고 의리를 보였다.

오빠의 보통 생활 속에 나타나는 사람 대하는 모습의 결과다. 오빠는 우리 형제들과 식구들 대하듯 자상하고 인간적으로 존중해주는 말투를 중정 수위들한테도 그대로 썼다. 그런 진심으로 대했으니 부하들이 죽음 앞에서도 오빠와의 의리를 가슴에 담았을 것이다.

합수부에 강제 헌납당한 오빠 재산은 어떻게 됐나?

올케(김재규 부인 김영희씨)는 합수부에서 당한 고초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한동안 스스로 몸 추스르기도 힘들어져 올케 대신 가까이 있는 딸들이 친정어머니를 돌아가며 모셨다. 그러다 전두환이 물러난 뒤 소송을 내서 물려받은 집과 논 등은 다 되찾았다. 신군부가 끝까지 지급하지 않으려고 버티던 오빠의 군인연금도 노태우 정부 때 올케가 소송을 내서 받아냈다. 그 돈으로 고향에 내려가 시어머니를 모셨다.

박정희 전 대통령 지지층이 아직 두껍고 극성스러운데 부담은 없었나?

우리도 그 부분이 조심스럽다. 우리 유족이 뭘 하겠다고 적극 나서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국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이만큼이나마 10·26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10·26은 역사이고, 역사는 국민들의 것이다. 유족은 국민들이 역사에 궁금함을 갖고 재평가하려는 노력을 하면 가능한 한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내란죄 형사 무죄를 다투는 재심이다. 전망을 어떻게 보나?

그때 전두환이 합수부 통해서 한 일이 진짜 내란 아닌가. 자기가 대통령 자리 차지하려고 한 일인데, 예전부터 왕조시대도 살아남은 이가 내란죄를 뒤집어씌워야 속전속결이었다. 그게 소수의견 낸 6명 대법관들 의견에도 나온다. 그 대법관들은 (박정희 살해를) 내란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전두환은 오빠 재판 끝나고 그해 8월에 소수의견 낸 대법관 6명을 다 잘라버렸다. 사법부도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 제대로 들여다볼 것으로 기대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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