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멸망’인데 위로가 되네
  • 김영화 기자
  • 호수 644
  • 승인 2020.01.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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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지음, 아작 펴냄

“우리는 지금의 불행을 SF의 렌즈를 통해 보고 있다.” 지난해 말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임원진을 인터뷰했을 때 대표인 듀나 작가가 했던 말이다. 그 문장이 다시 선명해진 건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산불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5개월째 꺼지지 않는 불, 서울 면적의 100배 소실, 야생동물 10억 마리 폐사…. 폭염과 가뭄 등 이상고온 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은 더 이상 SF의 주제가 아니었다.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이 말이다.” 정세랑 작가의 SF 단편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나온 말을 곱씹었다. 까맣게 타버린 캥거루와 코알라 사진을 보며 우리는 아마 미래 세대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에는 SF 단편소설 8편이 수록돼 있다. 페미니즘과 생태주의가 녹아 있는 각각의 서사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가늠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문명 파괴 이후를 다룬 ‘리셋’과 ‘7교실’이 인상 깊었다. ‘리셋’에서는 인류 문명을 삼키기 위해 지구에 내려온 거대 지렁이로 인해, ‘7교실’에서는 인류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가 살던 세계가 파괴된다.

그런데 재앙의 결과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거대 지렁이가 지나간 곳은 토양이 비옥해지고 줄어든 인구수는 오히려 지구에 무해하다. 파괴된 것은 휘발성 유기화합물, 플라스틱 등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다. 대멸종 위기를 겪고서야 인류는 다른 종과 자원을 나눠 쓰는 법을 배운다.

동식물이 행복해야 인간도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정세랑 작가의 소설이 보여주는 특유의 따뜻함이 묻어나, ‘멸망’을 말해도 어쩐지 위로를 받는다. 작가는 “미래의 사람들이 이 시대를 경멸하지 않아도 될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창작 배경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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