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사법농단은 판사로서든 시민으로서든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사법농단에서 내가 가장 분노한 지점은 판사들이 재판 당사자들을 무시하고 재판을 사법권력 유지 수단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강제동원 재판을 연기시킬 궁리를 하면서 그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KTX 판결은 청와대에 대한 립서비스용으로, 세월호 재판은 법원 홍보용으로 생각했다. 결론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떠나 재판에 대한 판사들의 시각 자체에 경악했다. 솔직히 이런 판사에게 재판받는 시민이 너무 불쌍했다.

사법농단 재발 방지를 위해 제도 개혁을 공부했다. 하면 할수록 결국 제도 개혁과 판사 개개인의 성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느꼈다. 제도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운용하는 사람들이 부정한 마음을 먹으면 그 제도는 악용된다. 책에 나온 재판들은 우리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른바 ‘큰 재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판사는 그 재판 하나하나의 서사에 주목하며 의미를 제대로 인식한다. 사회적 관심에 따라 재판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재판에 숨겨진 문제들을 캐치한다. 이 책에 나오는 판사에게서 전형적인 엘리트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냉정한 이성과 번뜩이는 천재성으로 무장되어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 ‘판사의 무오류성’에 대한 암시가 없다. 내게 가장 큰 감동으로 다가온 부분이다. 판사가 된 후 법원 내부에서 가장 많이 감지한 것 중 하나가 ‘이성적일 것’에 대한 강박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체가 과연 이성으로만 파악될 수 있을까.

판결들을 보다 보면 자동차의 부품을 하나하나 해체하여 살펴본 후 개별 부품의 특징들을 나열하며 이것은 자동차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다. 실체에서 멀어지는 딱 그만큼 재판도 현실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어떤 사건을 보더라도 침착하게 거리를 두겠다는 다짐이 지나쳐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아니 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게 아닌가 싶어서 섬뜩할 때가 있다.

이 책의 판사는 눈물이 많다. 분노도 많고, 안타까움도 많다. 재판을 하면서 가정의 의미,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 노동자의 삶이 경제적 효용성으로 대체된다는 것의 의미, 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의미를 되짚어보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한다. 소년범들에게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실망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사법의 역할을 궁리하고 정의를 정의해보고자 하며 이상적인 재판에 미칠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안타까워한다. 이런 감정선과 생각들을 따라가면서 개인적으로는 안도했다. 섬뜩함이 잠시 잊히는 시간이었다.

기자명 류영재 (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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