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남에게 그림자만 드리우지 않아도(‘은엉겅퀴’/ 〈시〉, 2005, 라이너 쿤체) 행복할 내 깜냥에 6년이 넘도록 독립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고 지키는 일은 곤경 대잔치였다. 그 곤경들 중 으뜸이라면 많은 글을 쥐어짜내야 했던 일을 꼽겠다. 인터뷰를 기록하려고, 지원을 받으려고, 후원을 받으려고, 고립 영화가 되지 않으려고… 넘치도록 토해놓은 성긴 언어들이 머릿속 늪에서 어지럽게 얽히다 못해 뻣뻣이 굳어 있었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 껌벅이는 커서처럼 퍼석한 영혼이 무심히 점멸할 때, 손보자기로 냇물을 길어 올리듯 단어 하나도 살포시 보듬는 라이너 쿤체의 시만 한 ‘가성비’ 좋은 텔레포트도 없다. 흰 벚꽃이 흰머리 위에 내리는 통에 봄을 볼 수 없다(‘우리를 위한 하이쿠’)며 품격 넘치게 샐쭉거리는 여든여섯 살 독일 할아버지의 새 시집 〈나와 마주하는 시간〉(2019)을 찾은 이유다.

시도 버거운 세상에 번역시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크라이나 내전 속에서도 그의 시를 번역했던 이에게 시인이 헌사한 시 ‘번역자의 특권’을 권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다.

독일어는 전혀 몰랐지만 4D 영화관급의 시적 체험까지 가능했음을 나는 간증할 수 있다. “플릭트 데 포글 우베 미히 힌벡/ 드룩케 이히 임 디 다우믄(‘뒤처진 새’).” 나란히 인쇄된 원문을 번역 검색창에 옮겨넣고, 아무도 안 볼 때를 틈타 따라 읽기까지 해보고 나면 시가 몸에 와서 찰싹 붙는다. 좋은 시집이라면 쉼표나 행간의 너비, 종이의 질감까지 시로 느끼게 만드는 법이고, 좋은 시라면 가닿을 마음만 필요한 법이다.

라이너 쿤체는 ‘서정시(Lyrik)’라는 파일명(Deckname)으로 관리되었던 동독 시절의 블랙리스트였다. 서정시가 위험했다니 우습지만, 혐오 언어의 두께에 눌려 시 없는 우리 일상을 떠올리고 나면 그 웃음도 드라이아이스처럼 휘마른다.

시인은 박해받던 이가 가해자를 닮아가는 흔한 오류를 비껴 걸어왔다. 그리고 시인은 먼 길을 걷는 동안 삼켜왔던 울음을 소박한 단어들로 길어내 독자 앞에 보듬어놓는다. “우리가 없어도/ 지구가 있고 우주도 있지만/ 시는 없다(‘인간에게 부치는 작은 아가雅歌’).”

우리의 언어가 시가 되었고 음악이 되었던 날들을 돌이켜본다.

영화 〈1991, 봄〉 속 ‘카바티나’의 마지막 음을 퉁기던 강기훈 선배의 마음이 다시 내게 눈처럼 내려앉는다.

기자명 권경원 (독립 다큐멘터리 〈1991, 봄〉 감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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