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들의 ‘인스타그램 인증샷’
  • 고재열 기자
  • 호수 625
  • 승인 2019.09.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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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실경산수화를 두루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홍도, 김응환, 강세황 등 조선시대 화가들이 자신만의 기법으로 조선 8도의 풍광을 담은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시사IN 신선영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이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전을 둘러보고 있다.

“도화서 화원 김응환과 김홍도는 관동지방과 금강산을 돌아보고 이를 그려 오라.” 1788년 9월 정조가 도화서에 내린 명이다. 두 화원은 어명을 받들어 관동지방과 금강산 일대를 50여 일 동안 돌아보고 화첩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조선 후기 선비들 사이에서 금강산 여행은 모두가 꿈꾸는 일종의 ‘인생 여행’이었다. 유행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금강전도’를 그린 겸재 정선이다. 그의 진경산수화가 조명을 받으면서 금강산 여행도 덩달아 화제가 되었다. 정조 역시 여기서 비켜 있지 않았다. 금강산에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임금이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어 도화서 화원들을 대신 보냈다.

남북 교류가 기약 없는 요즘,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정조의 안타까운 심정에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 <우리 강산을 그리다: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전은 조선시대 실경산수화를 두루 보여준다(9월22일까지).

산수화 연구 권위자인 안휘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산수화를 즐기는 것은 한국화의 정수를 즐기는 것”이라며 산수화의 일곱 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동양인의 자연관과 사상을 담고 있다. 회화는 미술의 대종이며 산수화는 회화의 대종이다. 감상화로 가장 적합하다. 화풍의 시대적 변화를 가장 빠르고 분명하게 반영한다. 우리나라 회화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가장 적당하다. 중국과 일본과의 미술 교섭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법적 측면에서 다른 어느 분야보다 어렵고 복잡하다.’

산수화는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왕립 화가인 도화서 화원을 선발할 때도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비롯한 인물화보다 산수화를 더 높이 평가했다(가장 위는 대나무 그림이었지만 문인화 전통에 따른 상징적인 것이었을 뿐 산수화가 가장 중요했다). 제한된 크기에 대자연을 담아야 하는 산수화가 어떤 그림보다도 고도의 기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유가나 도가적 이상향을 담은 이전의 관념산수화는 ‘산수화는 이래야 한다’는 당위가 강했다. 가본 적도 없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리면서 이전의 산수화를 참고했기 때문에 기법상의 개성을 발휘할 여지가 적었다. 실경산수화가 주류가 되면서 화가들은 실재하는 자연을 재현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다. 중국 화산의 풍경을 그려 <화산도첩>을 남긴 원·명 교체기 화가 왕리는 “나는 마음에서 배우고 마음은 눈에서 배우며 눈은 화산에서 배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실경산수화에 대한 화가들의 자세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박은화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설명했다.

겸재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이른 나이에 그렸다고 알려진 <신묘년풍악도첩>에 수록된 ‘단발령망금강산’.

침엽수, 활엽수, 바다색까지 세세하게 표시

우리의 실경산수화 중에서는 금강산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그림들을 비교해보면 산수화 기법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진경산수화를 제창한 정선이 금강산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데 주목했다면, 실경산수화의 획을 그은 강세황은 산천초목에 대한 사물의 고유색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재현에 집중했다.

어명에 따라 금강산을 찾은 김응환과 김홍도 역시 금강산을 실제 모습과 가깝게 그리기 위해 고심했다. 김홍도는 꼼꼼하게 초본(밑그림)을 그렸다. 나무가 침엽수인지 활엽수인지 바다는 어떤 색으로 칠할지 세세한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표시했다. 관동지방을 먼저 보고 해금강, 외금강, 내금강을 순서대로 돌아본 뒤 단발령을 거쳐 돌아왔는데 이 여정에 따라 초본을 그렸다. 김홍도의 초본 60면을 묶은 것이 <해동명산도첩>으로 이 중 32면만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김홍도가 그린 완성본 화첩은 소실되었다. 다만 후대의 화원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릴 때 그의 화첩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대의 작품들로 그의 그림을 가늠하는데, 음영법이나 원근법 등 서양식 화법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응환도 실경을 그리기 위해 자신만의 기법을 연구했다. 금강산에 다녀온 이듬해 죽어서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지만 김홍도 못지않게 실력을 인정받는 화원이었다. 그가 관동지방과 금강산에 다녀와서 그렸던 화첩은 원형이 전한다. 바로 60면짜리 <해악전도첩>이다.

김응환의 금강산 그림에서는 대담한 실험성을 엿볼 수 있는데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파격적인 필법과 참신한 채색으로 재현된 금강산 각각의 장면은 압도적인 자연경관 앞에 선 화가의 시각적 충격과 환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당대에는 기이한 화법이라는 평가를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김홍도와 김응환 외에도 다양한 조선시대 화가들이 자신만의 기법으로 그린 금강산 그림을 만날 수 있다. 1부와 2부는 내금강을, 3부는 외금강을, 4부는 해금강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화가들의 치열한 고민이 엿보인다.

김응환의 화첩 <해악전도첩>에 실린 구룡연(맨위)과 김하종의 화첩 <해산도첩>에 실린 구룡연(위). 김응환이 김하종의 작은할아버지다.

이번 전시회에는 금강산 외에도 조선 8도의 풍광을 담은 산수화가 두루 전시된다.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 ‘실재하는 산수를 그리다’에서는 겸재 정선 이전의 실경산수화 전통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중기의 실경산수화인데,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작품으로 절도 있고 위엄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이 밖에 전충효의 <석정처사유거도>,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첩> 등을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작품 중 가장 이른 나이에 그렸다고 알려진 금강산 그림 <신묘년풍악도첩>도 전시되어 있다.

옛 화가들의 ‘인스타그램 인증샷’

2부 ‘화가, 그곳에서 스케치하다’에서는 여행지에서 화가들이 어떤 식으로 자연을 묘사했는지 알 수 있는 초본들이 전시되었다. 친구와 함께 남한강 일대를 유람한 정수영은 버드나무 숯으로 스케치해서 16m에 이르는 <한임강유람도권>을 완성했다.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도 만날 수 있다.

3부 ‘실경을 재단하다’에서는 광대한 풍경을 조선시대 화가들이 어떻게 한 폭의 그림에 넣는지 알 수 있도록 특징적인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 속 화가의 위치를 상상하며 그들의 시점과 구도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도록 했는데 정선의 <연강임술첩>,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 그리고 김응환의 <해악전도첩>이 전시되었다.

표암 강세황이 변산 이곳저곳을 그린 <부안유람도권>. 왼쪽부터 극락암, 용추폭포, 실상사, 문현.

4부 ‘실경을 뛰어넘다’에서는 화가들이 다르게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엿볼 수 있다. 실경을 뛰어넘어 형태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과감하게 채색한 그림이다. 문동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화가 중에서 실험을 대표하는 화가로 강세황을, 파격을 대표하는 화가로 윤제홍을 꼽았다.

성호 이익과 교류하며 실학사상을 받아들인 강세황은 남종문인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투시도법과 원근법 등 서양화법을 받아들였다. 윤제홍은 손가락을 쓰는 지두화법을 활용했다. <구담봉>은 손가락에 먹을 찍어 그리고 담묵이 번지는 느낌을 살렸고, <옥순봉도>에서는 손톱으로 그리고 손가락과 손바닥에 먹을 찍어 쓸어 다듬듯이 칠해 장엄함을 표현했다. 문동수 학예연구사는 “부드럽고 유려한 맛이 덜하고 날카롭고 둔중하지만 붓의 필선보다 훨씬 강한 표현력을 띤다”라고 설명했다.

실경산수화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옛 화가들의 ‘인스타그램 인증샷’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두루마리 화첩으로 된 기유도에는 각 지역에 대한 박물지적 지식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강세황이 변산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그린 <부안유람도권>, 금강산 유람과 관련된 글과 그림을 묶은 <풍악장유첩>이 대표적이다. 전시회에서 실경산수화를 보며 ‘눈으로 떠나는 조선 8도 여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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