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격투기와 법 그리고 비극은 고대 그리스인의 삶을 이루는 3대 ‘경기적’ 요소였다. 격투기가 그 자체로 인간의 신체 능력을 겨루는 경기라면, 비극은 자신의 죽음과 공동체의 운명을 맞바꾸기 위해 신과 거래했던 영웅의 행위 속에서 만들어졌다. 사적인 결투와 자기 방어적 폭력 행위에 대한 국가적 안전장치로서의 소송도 법이라는 규칙을 통해 진행되는 일종의 경기였다.

그리스 시대의 법이 경기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소송이 재판관에 의한 판결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고나 피고는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가장 화려하고 생생한 언어로 최선을 다해 연설해야만 했고, 그것에 의해 더 우월한 정의가 성립했다. 판결은 재판관 몫이 아니라 민중 집회의 권리였으며, 정의는 법 조항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사람들의 실감 속에 있었다. 법 혹은 공권력과 정의가 동일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분히 근대적인 감각인 셈이다.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당할 수는 있지만 그 정당성의 까닭과 정의는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다. 

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변환함으로써 명령과 복종의 권력 관계를 매끄럽게 포장하는 말이 이른바 ‘법치주의’이다. 법은, 애초에 저 먼 그리스 시대의 법이 그러했듯이 사적인 복수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지만, 시민(혹은 국민)을 복종하도록 훈육함으로써 권력을 유지·보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법이 ‘권력의 명령어’인 한, 그것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행사되는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따라서 법과 폭력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법질서 확립을 통해 구현되고, 불법 행위는 곧 범죄이며 폭력이라고 권력은 말한다. 하지만 법이 지닌 유일한 미덕(?)인 사적인 복수나 범죄에 대한 안전장치 구실을 제외하면, 좀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법은 결코 약자의 편이 아니다.

법이 곧 폭력이 되는 나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촛불을 들었던 사람 중 몇몇이 ‘불법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수감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사법부의 권력자가 입김을 행사하는 ‘스캔들’이 벌어졌다. 한 누리꾼의 구속을 불러온 ‘전기통신법’에 대한 위헌 심판 제청이 기각된 데에도 모종의 작업이 개입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국민의 생명권이나 살림살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정권이고 보면 사법부에서 벌어진 스캔들은 크게 놀랍지도 않다.

무리한 공권력 행사로 제 나라 국민의 목숨을 순식간에 빼앗고도 접대용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던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경찰과 시민의 충돌을 보고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하는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라며 분노했다. 정당한 시위에 행사되는 공권력의 부당한 폭력이 앞으로 얼마나 더 악랄해질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법이 폭력’이라는 말이 오히려 사치처럼 느껴진다. 제발 있는 법이라도 좀 제대로 지켜라. ‘법대로’라도 좀 해라. 삽질만 하면 ‘신일류 국가’가 만들어지고 모든 허물이 덮인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돈이, ‘경제’가 좋아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만큼 국민은 비루하지 않다.

기자명 권용선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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