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일본이 술렁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앞장서 종군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정부 문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줄곧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해온 일본 정부가 궁지에 몰렸다. 일본 시민 단체들이 즉시 ‘110번 핫라인’을 개설했다. 혹시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과 함께 싸워줄 위안부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조바심치며 기다리던 어느 날. 핫라인으로 익명의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동네에 위안부 출신 조선인이 산다는 내용. 일본에 사는 위안부 가운데 대중 앞에서 자신의 고통을 낱낱이 증언해준 처음이자 마지막 생존자, 송신도 할머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송신도 할머니와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10년간의 투쟁 기록이다. 하지만 이건 여느 ‘투쟁 비디오’와 다르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독립 다큐멘터리스트 안해룡 감독은 투쟁 ‘결과’보다 투쟁 ‘과정’에 더 주목한다. 이제 와서 힘없는 늙은이를 내세워 정부와 싸워보겠다는 데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내심 의심하고 불신하던 할머니가 조금씩 믿음과 용기를 회복해가는 기적 같은 변화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세상의 방관자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

그래도 달랑 할머니만 바뀐다면 이 다큐는 재미없다. ‘억울한 시민들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평범한 사람이 힘든 싸움을 거치며 투사로 변모하는 예가 굳이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싸움에선 할머니만 변한 게 아니기에 남다르다. 어떤 사건에 머리로만 분노하던 운동가들이 비로소 어떤 사람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인간 진화의 전 과정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투쟁과 저항의 기록이 아니라 만남과 관계의 기록이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기운 센 ‘약발’이 바로 거기서 먹힌다.

순전히 할머니 한 사람만 바라보고 모인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10년 넘게 지루한 법정 공방을 이끌었다. 여느 위안부 할머니들 싸움처럼 이 싸움 역시 쉽지 않았다. 패소와 항소를 거듭하며 힘겹게 버틴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 동안 일본 정부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대법원 판결마저 맥  빠지는 패배로 마무리된 뒤, 송신도 할머니가 사람들 앞에 선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친다. “비록 재판에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주 잠깐, 할머니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내 당당하고 여유 있던 어르신 표정이 갑자기,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로 얼룩진다. 그 순간 잠시 스쳐간 1초의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준다. 할머니의 억울함과 우리들의 죄책감, 그리고 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아야 할 분명한 이유까지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싸움의 기술에 몰두하느라 싸움의 목적을 까먹어버린 모든 투사가 봐야 할 영화다. 지독한 패배가 때로 위대한 승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은 모든 방관자가 봐야 할 영화다. 조직이 상처를 입을까 봐 조직원에게 상처를 주신 민주노총 간부님들은 보고 또 보고 일백 번 고쳐 봐도 시원찮을 영화다. 승리를 지켜내지 못할지언정 신뢰와 연대를 지켜내는 싸움. 그게 왜,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하는 당신들의 마음은 애초에 패배한 게 아닌지, 가슴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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