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문화는 물질로는 잡히지 않는 개념이다. 문화주의 혹은 문화에 대한 강조가 물질문명에 대한 거부이다. 그리고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20세기에 들어서야 생겨난 개념이다. 문학·음악·미술 같은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것들을 묶고, 스포츠까지 묶어서 일종의 스펙터클 혹은 실체로 이해하게 된 것이 20세기이다. 정확히 말하면 1945년, 종전 이후의 일이다. 이걸 이해하는 것이 문화 이해의 첫걸음이다.

즉, 문화 현상은 자본주의 일반의 일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그것도 갈브레이드가 말한 포디즘의 ‘후기 자본주의’ 이후의 일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현대적 의미의 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1945년, 우리의 건국이념은 점령군이던 하지 준장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반공’, 그 문화 위에서 우리는 ‘친미=반공=건국’과 같은 이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는 정지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반공 위에 세우려고 한 나라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많은 예술가는 월북했고, 남은 사람들은 이승만 정권에 기계적으로 복무하거나 ‘예술’이라는 복잡성으로 숨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45년 이후의 초기 한국 미술의 극단적 추상성은 그런 것을 반영한다. 정형화해서 뭔가 말하려고 하면 ‘친북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절의 예술가들은 “우린 아무 말 안 해요”라며 추상성과 구상성에 집착했다.

따져보면, 그 시절 예술가들은 친일이거나, 월북했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건축의 1세대인 김수근이 그랬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김수근은 한국적 예술을 구사하고자 했지만, 그에게는 끝까지 ‘왜풍’이라는 시선이 지워지지 않았다.

1세대 예술, 친일·친미 아니면 친독재 꼬리표

ⓒ뉴시스‘창의’가 한국에 들어와 첫 번째 한 일이 동대문운동장을 죽인 것이다. 위는 서울시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조성을 추진 중인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발굴된 유적지.
어쨌든 그 1세대 한국 예술가들에게는 친일 아니면 친미의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그런 것과 무관한 사람중 상당수는 임화수처럼 친독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글쎄, 과연 영화인이고 정치깡패였던 임화수가 처형당해야 했을까? 하여간 그는 이정재와 함께 4·19 이후에 처형당했다. 그는 당대 영화계의 대부였다.

그리고 박정희·전두환 시절은 대학의 교수님들은 잘 먹고 잘사는 동안, 그 바깥에 있던 예술가에게는 춥고 배고픈 시기였던 것 같다. ‘말당’ 서정주라고 능멸을 당하는 동안에도 서정주의 극단적인 예술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배불렀고, 그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1980년대까지는 문학잡지 몇 개를 붙잡고, 겨우겨우 먹고살았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그 후에 지금 조선일보가 ‘좌파들의 시절’이라고 말하는 10년이 펼쳐졌다. 어느 ‘전라도 깽깽이’가 “새들도 하늘을 나는구나”라고 노래하던 그 배고픈 시절을 훌쩍 넘어, 정부가 지원하는 예술학교를 장악했고, 그야말로 민예총 전성기를 잠깐 맞았다. 이 시기에 애니메이션, IT 그리고 영상들이 20대의 꿈이던 시기, 그리하여 ‘할리우드 키드’의 시기가 열렸다. 그러나 이때 실제로 돈을 챙겨간 사람은 서태지와 그 시절에 조지 루카스를 존경한다고 했던 몇 명 정도였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류가 떴다. 1945년, 개국 이래 가장 천박하고 제국주의적 열망에 찬 사람들이 “돈이면 다 된다”라고 했던 시절이 바로 이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일산의 ‘한류 우드’가 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일산의 한류 우드를 띄우고 지켜낼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지금 한국의 문화와 예술은 밑바닥부터 죽어가고 있다는 게 지난 몇 달 동안 문화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나의 결론이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한류적 제국주의자들이다. 망해도 싸다. 

자, 이게 내가 본 한국의 문화 역사이다. 이제 최근의 서양 문화의 패러다임을 살펴보자. 신자유주의, 1980년대 이후 문화의 근본이 죽어간다고 토로하는 것은 서양 역시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 이후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풍요의 자본주의에 대해 예술이 전면적 거부를 하기는 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 것에는? 역시 답이 없기는 하다. 어쨌든 답이 없으면 안 되기에 일단 시카고, 그 세계 금융자본의 메카에서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붐이 일고, 이게 영국을 따라 일본, 급기야 프랑스로 역수입되는 양상을 띠었다. 현재까지는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식 해석이 주류인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역시 “정지하는 법이 없는 자본주의”, 그 법칙대로 ‘해체주의’의 끝자락을 타고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제3세계에서 ‘춤의 미학’ ‘몸의 미학’ 혹은 ‘밑바닥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배고프고, 대안은 마약밖에 없는 제3세계에서, ‘차라리 춤이라도 추자’라고 시작된 일련의 흐름은 “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따라 점점 위 세계로 오르고 있다.

또 다른 흐름은 ‘창의’라는 말을 따라 “무엇이 인간을 억압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범위를 넓혀가는 중이다. 창조라는 단어는 창의·창발 등으로 다르게 번역되지만, 영어로는 다 똑같은 creativity이다.

내가 보기에는 두 흐름이 하나는 위에서, 하나는 아래에서, 해체 혹은 그 중간 어디에선가 만나기는 할 것이다. 어쨌든 한국 문화예술이 가난한 사람과 함께할 것인가, 창의적인 것과 함께할 것인가, 두 가지 질문이 지금 우리에게 문화라는 이름과 함께 던져진 셈이다. ‘창의 영국’ ‘창의 미국’과 같은 표현이 유행한 것은 벌써 10년 전 일인데, 노무현 시절 ‘창의 한국’이라는 국정 지표가 이미 있었다. 아득한 기억 너머의 일이다.

제3세계 ‘몸의 미학’보다 선진국 ‘창의’ 도입

문화 역시 패러다임의 문제이다. 한국은 몸의 미학을 주장하는 제3세계의 길보다는 선진국의 길인 ‘창의’의 길을 따라왔다. 이건 경제·사회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 ‘창의 한국’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디자인 서울’로 변신했고, 그것이 내놓은 첫 번째 일이 동대문운동장을 죽인 일이다. 세계적 의미의 창의성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잃어버린 상상력을 찾자는 것인데, 왜 한국에서는 “동대문운동장부터 죽이고”가 되어야 하는가? 사례는 홍콩에서 먼저 나온다. 중국과 경쟁한 홍콩이 찾아 든 첫 번째 사례 역시 한국과 같은 토목 경제 유형이었다.

미래 문화 패러다임, 이제 민주와 참여를 지나 창의로 가는데, 이 창의가 어떻게 하면 1970년대식 제 2 ‘새마을 운동’의 버전이 되지 않을까 고민이다. 왜 한국의 창의 시정은 동대문운동장 죽이기, 경인운하, 서울 아쿠아 프로젝트 같은 토건 사업이 되어야 하는가? 문화인들, 대답해봐라. 경제학자로서 답답하다. 디자인, 건축가들, 답해봐라. 용산에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창의적 고층건물’을 지어야 하는가? 문화가 불도저의 노예인가? 토건이 아닌 창의성, 그런 건 당신들 대답 중에 없는가? 관광사업 아닌 창의는 과연 없는가?

기자명 우석훈 (경제학 박사·〈88만원 세대〉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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