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영국 정부는 대형 은행을 구제하는 데 약 100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성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는 런던의 금융 중심지에 있는 은행.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City)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은 최대 피해 지역이 됐다. 뉴욕의 월가와 함께 세계 금융의 허브인 시티가 금융 위기의 대표적 피해 지역이 된 것은 이곳에 550개 세계 각국 은행과 170개 세계 증권회사가 진출해 있고, 증시 상장회사만 420개, 국제 펀드의 70%, 국제 주식 볼륨의 33%,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10.1%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융 거래액이 유통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티가 풍성하던 한 시대의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찬바람 일고 불안감이 감도는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연말이면 수천, 수만 파운드에 달하는 성과급으로 풍성한 잔치를 벌이던 시티의 금융인들은 앞으로 휘몰아칠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서 불안감에 잠을 설치는 신세가 됐다. 이들이 보유하던 주식과 펀드는 이미 반 토막이 났거나, 아예 사라져버렸다.

대부분 사립학교에 보내던 자녀들의 교육 수준도 낮추어야 할 판이다. 연간 수만 파운드가 드는 사립학교 대신 비교적 학비가 싼 공립학교로 전학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영국교사협회는 지난해에 사립학교 학생 수가 25%나 급감했다고 발표했다. 거주 주택도 눈높이를 낮추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치스러운 휴가는 과거의 추억이 됐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금융인들 때문에 시티 지역의 고급 식당들도 간이 메뉴를 위주로 이들을 상대한다. 메이페어와 벨그러비아 같은 고급 주택가의 고가 빌라들은 매일 5000파운드씩 집값이 떨어진다. 엘리자베스 여왕마저도 만찬 파티에 의상을 여러 번 계속 입고 나간다. 금융인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허리띠를 조이고 있다.

앵글로섹션 모델의 자본주의 몰락을 암시하는 시티의 암울한 현실은 현 영국 경제 상황의 축소판이다. 경제비즈니스연구센터는 2009년 말까지 시티에서 근무 중인 35만명 가운데 최소한 6만2000명이 직장을 잃을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의 대표 기업인 마크스&스펜서, 캐틀스, 애덤스 칠드런웨어 등이 새해 들어 근로자를 해고하고 공장과 점포를 잇달아 폐쇄했고,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던 울워스와 도자기 회사 우터포즈 웨즈우드도 문을 닫았다.

올해에만 60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까지 실업자는 300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경제계는 2009년에 영국의 개인 파산자가 1960년 이래 최고조에 이르리라고 예상한다. 주택 값은 계속 떨어진다. 지난 12개월 동안 16%나 하락했다. 1983년 이래 가장 큰 낙폭이다. 설상가상 매일 평균 120개 영국 가정이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의 피해자로 집을 잃고 있다.

‘화장지 화폐’로 몰락한 파운드화

서방 국가 가운데 영국인만큼 개인 빚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 개인 빚의 평균이 수입의 173%를 넘어섰다. 영국 정부는 2009년도 경제성장률을 0.75%에서 1.35%로 산정한다. 영국 통계청은 최근 지난해 3분기 GDP 성장률이 0.6%라고 발표했다. 이는 18년 만의 최저치다. 영국은행원협회는 지난해 10월 중 주택담보대출이 1만7773건으로 줄어들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2007년 11월에 비해 61% 감소한 것이다. 소비 심리도 1990년도 이래 최악의 상태로 꽁꽁 얼어붙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영국 경제가 30년 이래 가장 혹독한 침체 국면에 진입했다고 경고했다. 영국의 국가 부채는 GDP의 8%에 달하는 1180억 파운드에 도달했다. 영국의 자존심이자 건전 통화의 상징이던 파운드(스털링)화는 달러화와 유로화 앞에서 맥없이 화폐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 파운드는 이제 세계 금융시장에서 ‘화장지 화폐’라는 비아냥을 받는다. 파운드화의 대달러화 환율은 종전의 1.50달러에서 거의 1달러 선 아래로 추락했다.

중앙 은행인 영란은행(BOE)은 연초에 파운드의 대유로화 환율을 1.0199라고 발표했다. 1월1일 외환시장에서 파운드는 한때 0.90유로를 기록했다. 이는 1999년도 유로화 도입 이래 기록된 최저치다. 시티에 파운드로 투자했던 중동 산유국과 아시아 신흥국가의 투자자들은 투자액을 빼내 시티로부터 썰물처럼 대탈출을 감행한다. 정부가 추구해오던 금융 방임 정책의 실패가 시티 지역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Reuters=Newsis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위)의 ‘경제 위기 극복 낙관론’에 귀를 기울이는 영국인은 많지 않다.
정부는 세금 납세자들의 돈으로 5000억 파운드(약 1000조원)를 풀어서 HBOS·로이드 TSB·스코틀랜드 로열 뱅크 등 대형 은행을 구제하는 데 퍼부었지만, 이같은 막대한 구제금융이 정부가 바라는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오는 2010년 초까지 부가가치세도 17.5%에서 15%로 낮출 계획이다. 경기부양을 위해 230억 파운드를 방출, 경기 침체 국면에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국중앙은행은 지난 1월8일 기준 금리를 1694년 은행 창설 315년 만에 최저치인 1.5%로 인하했다. 금융 위기가 터진 지난해 9월의 금리는 5% 선이었다. 곧 눈앞에 제로금리 시대가 다가올 전망이다. 대출자들은 반가울지 모르나 저축 이자로 생활하는 700여 만명에 달하는 은퇴자는 한숨짓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인 콤레스에서 성인 1000명을 상대로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든 브라운 노동당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2% 포인트가 떨어진 34%였고 야당인 보수당의 지지율은 2% 포인트 증가한 39%로 나타났다.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때 고든 브라운 총리가 발 빠르게 취한 구제금융 지원 대책 발표로 한때 보수당에 1% 포인트 뒤처진 선까지 따라잡았던 지지율은 반짝 지지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브라운 총리는 1월1일 신년사에서 영국은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기간 산업에 대한 대대적 투자로 새 일자리를 10만 개 창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낙관론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경제 위기 쓰나미 앞에 영국 정부도 맥을 못 출 것을 많은 사람이 알기 때문이다.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은 신년사에서 금융 위기로 고통을 겪는 런던 시민에게 1979년도에 제작된 베트남 전쟁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해 새해의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려 했다. 주인공인 미군 장교 빌 킬고르 중령은 그의 부하인 벤저민 윌라드 대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월라드 대위, 어느 날인가 이 전쟁은 끝이 날 것일세.” 그러니 참고 기다리라는 말이다. 기다리는 것밖에 대책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보리스 시장은 이를 “어느 날인가 이 경기 침체는 끝이 날 것일세”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다 같이 열정과 목표를 지니고 2009년도로 전진하자”라고 외쳤다. 경제는 인간이 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보리스 시장의 말처럼 열정과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투쟁한다면 지금의 암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기자명 런던·남정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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