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인의 어이없는 죽음 전두환은 사죄하라”
  • 정희상 기자
  • 호수 619
  • 승인 2019.07.3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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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도 순시 경호를 위한 ‘봉황새 작전’ 중 수송기 추락으로 군인 53명이 숨졌다. 공군은 악천후 탓에 항공기를 운항할 수 없다고 보고했으나 청와대는 출동을 명했다.
“전두환은 자기를 경호하러 가다 죽은 생때같은 젊은이 53명에 대해 지금까지 나 몰라라 한다. 죽기 전에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 이재수씨(64)는 ‘봉황새 작전’ 참사 유족이다. 37년 전 대통령이던 전두환씨가 제주도를 순시할 당시 경호작전 중 53명이 숨졌다. 이씨는 당시 특전사 대원이던 동생 이재준 준위를 잃었다.

1982년 2월6일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도 연두 순시가 있었다. 전날 청와대 경호실은 경호를 위해 특전사 요원 450명을 제주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목적지인 제주공항은 물론이고 출발지인 성남공항에도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공군에서는 항공기가 뜰 수 없다고 보고했다.

2월5일 낮 특전사를 실은 공군 수송기 C123편 3대가 성남공항에서 차례로 이륙해 제주도로 향했다. 오후 3시께 이재준 준위가 탄 수송기가 한라산 1060m 고지 개미등 계곡으로 추락했다. 악천후 탓이었다. 특전사 대원 47명과 수송을 지원하던 공군 6명이 즉사했다. 청와대는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튿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주국제공항 개막행사에 참석했다.
ⓒ시사IN 조남진수송기 추락으로 동생 이재준 준위를 잃은 누나 이재수씨가 ‘봉황새 작전’ 충혼비 앞에서 사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재수씨는 사고 직후 한라산 중턱에 올라 동생의 시신을 찾아 헤매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고가 나자 군에서는 유가족의 제주도행을 막았다. 결혼해서 제주도에 살던 이재수씨만이 유족 중 유일하게 현장에 갈 수 있었다. 사고 발생 사흘 뒤 그는 몰래 사고 현장에 접근했다. “제주대 입구에서 한라산을 타고 40분쯤 올라가니 사고 현장이 보였다. 거기서부터 군인들이 못 들어가게 막았다. 군인들이 추락한 기체 부근에서 시체 파편을 주워 담았다. 뼈와 살점, 유품이 사방에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데 대충 큰 조각들만 골라 마대자루에 담았다. 그걸 질질 끌고 내려가 관음사 공터에 쌓아두더라.”

전두환 정권, ‘봉황새 작전’ 참사 은폐·조작

이씨는 “내 동생 시신을 왜 그렇게 쓰레기 취급하느냐”라며 항의했다. 직접 불교용품점에 가서 장의물품을 구입해 부대에 건넸다. ‘망자에 대한 예우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군에서는 수거한 시신 일부를 화장한 뒤 유족을 서울 국립묘지로 불렀다. 사고 나흘 만에 53명의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한라산 참사 현장에 철조망을 치고 폐쇄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족과 국민을 상대로 진실을 철저히 은폐·조작했다.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사고 다음 날 이 작전을 ‘봉황새 작전’에서 ‘동계특별훈련’으로 훈련 명칭을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참사를 당한 유족에게는 대간첩 침투작전 도중 순직했다고 통보했다. “악천후에도 병사들을 제주도에 내려보내 죽여놓고 시신 파편과 유품도 방치해둔 채 유족에게 대간첩 작전을 하다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기가 막혀서 육지에 계신 아버지에게 한라산 사고 현장 소식을 알렸다. 아버지는 다른 유족들에게 연락하고 군부대와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제주도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이재수씨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합동 장례식을 치른 뒤에도 유족들을 감시했다. 제주도 사고 현장에 내려가지 말라고 유족들을 회유했고, 내려가겠다고 하면 항공권을 마련해준다며 유족들이 개별 행동을 못하도록 막았다. 제주도에서는 안기부 요원이 일일이 따라붙었다.

유족들은 아들·동생·남편이 숨진 이유만이라도 정확히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또 흩어진 채 방치된 희생자 53명의 유골을 끝까지 찾아 안장해달라고 했다. 유족들의 요구가 계속되자 군에서도 당황했다. 사고 100일째인 1982년 5월15일 아침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유족들을 단체로 사고 현장 근처인 관음사 입구로 데려갔다. 100일 위령제를 지내고 충혼탑을 세웠다.

자신의 경호를 위한 작전 중에 목숨을 잃었는데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단 한 번의 위로 표명조차 없었다. 영결식과 위령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100일제 당시 사고 현장 아래 세운 충혼비에는 특전부대훈으로 알려진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함께 쓰인 시는 다음과 같다.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 네가 죽음으로써 우리가 살고/ 조국은 지켜지리니/ 검은 베레는 죽어서 영원히 산다. 1982년 5월15일 박희도 지음.”

100일 위령제를 마친 뒤 군의 재촉에도 몇몇 유족은 제주에 친척이 있다는 핑계로 이재수씨 집으로 모였다. 이들은 이씨의 안내로 수십 차례 한라산 중턱 사고 현장을 오르내렸다. 참사 현장은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군화를 신은 채 무릎뼈가 나온 다리가 굴러다니고, 철모를 쓴 부위만 칼로 자른 듯 남은 두개골도 보였다. 눈에 띄는 유골만 수집했는데도 큰 포대 3개 분량이었다. 당시 이재수씨는 참사 현장을 손으로 파며 유품을 찾았다. 그러다 구겨진 수송기 동체 아래서 동생 이재준 준위가 생전에 착용했던 시계와 수첩을 발견했다. 사고 현장을 마주한 유족은 망연자실했다. 희생된 장병들이 찼던 시계가 모두 3시15분에 멈춰 있었다.
ⓒ서제철 전 제민일보 부국장 제공1982년 2월5일 제주도 한라산 개미등 계곡으로 추락한 C123 공군 수송기 잔해.

유골 수습하는 유족에게 권총 꺼내든 대령

그때 대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사고 현장에 나타나 유족을 가로막았다. 대령은 맨손으로 현장 땅을 파헤치는 유족의 손을 군홧발로 밟았다. 이를 뿌리치고 계속 파내자 시신의 허벅지 아래로 통째로 잘린 다리뼈가 나왔다. 군부대에서 서둘러 묻어버린 흔적이었다. 대령은 유족들에게 권총을 꺼내들었다. 유족의 유골 회수 노력은 여기서 중단됐다.

“아버지 한 분이 ‘군화와 군번, 이름을 확인하지 말자. 내 아들이면 얼마나 가슴 아프냐. 다 가지고 올라가 국립묘지에 합장하자’고 제안했다. 유골을 갖고 올라가려던 이들을 제주공항에 상주하는 안기부 요원들이 막았다. 유족은 호텔에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의 방해로 유족들은 유골을 제주도에서 화장해 국립묘지에 뿌렸다.

사고 현장에서 정부가 감춘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은 ‘2·5 유족회’를 꾸렸다. 결국 정부는 1982년 6월2일 짤막한 공식 발표를 했다. “공군 수송기 C123편 한 대가 2월5일 육군 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제5672부대 승무원 6명 등 53명을 태우고 훈련지역 제주도 해안에 도착 착륙 시도를 하던 중 갑자기 강한 북서풍에 의한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북쪽 3.71㎞ 지점에 추락해 전원 순직했다.” 이때도 전두환 경호 업무인 ‘봉황새 작전’은 감추고 대신 제주 훈련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유족회는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까지 일곱 차례 사고 현장을 오가며 유골을 수습했다. 유족회는 정부에 장병 53명이 대통령 경호작전 중 숨졌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유골과 유품을 끝까지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군부대는 7월3일까지 제주 현장에 내려가 최종 정리 작업을 하고, 유골 발견 시 화장을 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유골과 사고기 잔해가 계속 방치됐다. 전두환 대통령 경호(봉황새 작전) 때문이 아닌 ‘동계훈련’ 도중에 사망했다는 방침도 바꾸지 않았다.

유족들은 해마다 사고 현장을 찾아 위령제를 지냈다. 전두환씨가 퇴임한 뒤에도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사고 원인이라도 밝혀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989년 유족들은 전두환씨,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 등을 살인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유족들은 고소장에 “이륙하기에는 너무나 악조건의 기후였다. 두 차례에 걸쳐 이륙 불가능을 청와대에 건의했으나 강력한 명령으로, 특전사령관은 위험을 알면서도 탑승시켰다”라고 적었다. 1992년 서울지검은 유족의 고소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이후 정부 차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아직까지 아무런 공식 입장이 없다.

그래도 변화가 있다면 이 사건을 대하는 특전사 장병들의 태도다. 사고 100일 뒤 박희도 특전사령관이 세운 ‘가짜’ 충혼비 뒤편에는 2007년 1월1일자로 ‘특전사 장병 일동’ 명의로 된 유류품 보관 장소가 만들어졌다. 특전사 장병들은 2001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라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고 수송기 잔해와 유류품을 수거해 이곳에 보관하며 표식을 남겼다. 또 2013년 6월6일에는 특전사 13여단과 11여단 산하 대대 병사들이 여전히 흩어져 있던 군 수송기 잔해를 추가 수거해 충혼비 뒤에 보관하며 별도 표지판을 남겼다. “창공의 꽃으로 산화한 53명의 숭고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제작했다.”

‘대한민국 특전사 전 장병 일동’ 명의로 된 표지판에는 전두환 정권이 감추고자 했던 진실의 일단이 담겨 있다. 바로 “대통령 경호작전 중 산화했다”라는 표현이다. 이재수씨 등 유족들이 바라는 것은 보상이 아닌, 진실 규명과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다. 이재수씨는 “전두환씨가 이 사건에 대해 반드시 진실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도 전두환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를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과나 위로를 한 적이 없다. 끝내 사과를 외면한다면 유족은 죽는 날까지 그를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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