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에 울려 퍼진 ‘화이트 크리스마스’
  •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 호수 598
  • 승인 2019.03.0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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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29일 10시, 사이공(현재의 베트남 호찌민 시)의 ‘아메리칸 라디오 서비스’ 채널에서 다음과 같은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이공의 온도는 현재 화씨 105°(섭씨 40°)이며, 점차 상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알쏭달쏭한 안내 멘트 뒤로, 빙 크로스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이어졌다. 자못 초현실적으로도 들리는, 뜬금없는 이 방송은 최후까지 베트남에 남아 있던 미국인들과 그 조력자들을 위한 암호였다. 이 노래를 듣는 즉시, 사전에 약속된 지점으로 모여 헬리콥터를 타고 사이공을 탈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천명 인파가 헬기 착륙장으로 모였다.

이튿날 오전 5시,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를 태운 기체가 날아올랐고 뒤이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군인들을 태운 헬리콥터가 아침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시내 한복판의 대통령궁에는 세 시간가량 정적이 이어졌다. 이 고요를 깬 이들은 탱크로 대문을 밀어버리고 진격해온 북베트남군이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동남아시아의 해안선을 장악한 이래, 88년이나 이어진 서구 열강의 베트남 식민 지배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AP Photo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보응우옌잡 장군.

이 모든 것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내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연합군은 인도에서 복무 중이던 그레이시 육군 소장 휘하의 영국군을 파견한다.

일본군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면, 그들 이전에 이 지역의 주인 노릇을 하던 프랑스가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에 분노한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이 ‘베트남 독립 연맹’(베트민=월맹)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에 돌입하자, 그레이시 소장은 어이없는 결정을 내린다. 이 지역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다시 총을 주고 영국군과 함께 베트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다. 1946년이 되자 베트남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안정되는 듯이 보였고 영국군은 인도로 돌아갔다. 프랑스가 과거 그들의 식민지를 되찾았다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1953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의 디엔비엔푸 계곡에 낙하산을 이용해 3개 대대 병력을 투입한다.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월맹군의 주력을 섬멸해 베트남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굳히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월맹 측에는 집요함과 기발함으로 전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 보응우옌잡 장군이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독려해 인력으로 대포와 대공포를 주변의 산꼭대기까지 이동시킨다. 디엔비엔푸가 움푹 들어간 분지 지형이었기에, 주변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승패를 가르리라 판단한 것이다. 식량은 자전거를 동원해 운송했고, 지나치게 무거운 무기들은 부품별로 분해해 꼭대기에서 다시 조립했다.

서양 군대가 아시아의 무장 독립군에게 패배


1954년 3월13일, 월맹군의 기습적인 집중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진지를 내려다보며 퍼붓는 집중 포화에 54일 동안 시달린 끝에, 프랑스군은 항복을 결정한다.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미국 측에 원자폭탄으로 월맹군을 공격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당시 정식으로 월맹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던 미국이 들어주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따르는 부탁이었다.

1954년 5월7일 금요일 오후 5시30분, 프랑스군은 ‘백기만은 올리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월맹군에 투항했다. 서양의 군대가 아시아의 무장 독립군에 의해 패배를 맛본 최초의 전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의 서쪽을 자신들의 바다로 여기고 있었던 백인들에게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임을 알리는 구슬픈 노래의 서장이기도 했다. 1975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이미 20년 전부터 연주되기 시작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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