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멈춘 후의 전쟁
  •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저자)
  • 호수 589
  • 승인 2019.01.1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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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가 헤쳐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잭 런던이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디킨스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다. 독학으로 당대 최고의 작가이자 지식인의 위치에 섰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된 이후에도 글 쓰는 걸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1909년에 태어난 마쓰모토 세이초는 잭 런던이 숨을 거둔 나이 무렵인 마흔한 살에 데뷔해 1992년 죽을 때까지 40여 년간 장편 100여 편과 중단편 350여 편을 발표했다(이 기록이 깨지느냐 마느냐는 스티븐 킹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물론 두 사람의 작풍은 다르지만 예술의 뼈대는 닮았다. 즉, 대중적인 이야기 틀 안에서 자신이 속한 시대의 모순과 한계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둘은 ‘그 어려운 일을’ 설교하거나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으며 해낸다. 그 덕분에 책을 덮는 순간부터 독자 스스로의 물음과 고민이 시작된다. <현란한 유리>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1964년에 발표한 연작 추리소설집이다. 딸의 결혼 선물로 산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 소설은 이 반지가 도장 격파라도 하듯 자신을 소유했거나 탐했던 사람들의 인생을 하나하나 박살내는 모습을 쫓아간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긴 세월을 인물과 장소를 바꿔가며 펼쳐지는 사건들 속에서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인물 대부분이 이 시기에 벌어진 전쟁(만주사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1960년대 학생운동)에서 직간접으로 이득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중의 어떤 경우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닮아서 섬뜩하다. ‘티켓’에는 종전 직후 철이 부족해지자 히로시마에서 원폭을 맞은 철사를 빼내 팔려 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우리에게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의 업자들이 방사능에 오염된 고철을 헐값으로 대량 수입해오고 있다는 보도 때문이다. 재난의 형태가 비슷하면 인간이 비열해지는 모습도 비슷해지는 모양이다.

<현란한 유리>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펴냄


전쟁 또는 비슷하게 파괴적인 재앙이 남기는 고통은 그를 통해 부를 쌓으려는 이들 탓에 끊임없이 연장된다. 그런 면에서 유일하게 전쟁의 여파를 찾아볼 수 없는 마지막 작품의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무대는 부유층의 휴양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작은 어촌이다. 생선 비린내밖에 없던 시골 마을에 고급 별장들이 들어선다. 사건은 학비가 없어 호텔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고등학생이 별장으로 휴가를 온 젊은 도시 여성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총성이 멈춘 후 우리가 마주하게 될 전쟁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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