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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대륙에 버려진 한국의 핏줄

한국인의 아프리카 진출이 늘어나면서 한국계 혼혈 사생아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만 ‘아프리카판 라이따이한’이 10여 명 있다.아프리카 전체에 얼마나 많은 한국계 사생아&

라이베리아·강은나래 (자유 기고가) 2008년 10월 22일 수요일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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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나래
쌀쌀해진 날씨에 그녀는 긴소매 옷을 입고도 바들바들 떨었다.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온 크리스티나 씨(26)는 생애 첫 가을을 혹독히 경험하는 중이다. 그녀는 지난 9월7일 한국에 왔다. 딸 숙윤(2)이를 위해서다.

승무원 교육을 받던 크리스티나가 한국인 사업가 허 아무개씨(57)를 만난 것은 2004년, 세네갈에서 라이베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허씨는 “한국인 아내와는 이혼소송 중이다”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구애했고, 곧 둘은 결혼을 전제로 한 연인 사이가 되었다.

   
 
당시 허씨는 라이베리아 인근 국가인 기니 등지에서 고철사업을 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크리스티나는 자연스레 허씨의 비서 구실을 도맡아 했고, 허씨는 으레 그녀를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함으로써 피부색이 다른 현지인 사업가의 환심을 샀다. 허씨가 사업에 실패해 1800여 만원의 빚을 지고 감옥에 갈 처지가 되었을 때 아내 신분으로 보증을 서준 사람도 크리스티나였다. 이쯤 되니, 주변 한국인 사이에서는 허씨가 그녀를 사업상 이용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허씨가 갑자기 한국으로 떠난 때는 2005년 8월. 그는 “한국인 아내와 이혼 문제를 마무리짓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 오겠다”라고 했다. 그때 크리스티나는 임신 3개월이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세 번에 걸쳐 돈을 300만 원가량 부쳐주었지만, 이는 허씨가 벌여놓은 사업을 뒷정리해달라는 명목이었다.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미안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의 전화도 아예 끊어졌다. 그의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이메일은 되돌아왔다.

사연을 이야기하던 크리스티나는 회한을 억누르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내 삶은 다 파괴됐지만, 아이에게는 여전히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에게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한국에 왔다.”

1984년 대우건설이 수주한 고속도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총길이 79km. 4년여 공사 기간을 거쳐 1988년 4월 완공된 이 고속도로는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와 접경국인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을 연결한다. 14년간 내전을 겪으면서도 끄떡없었던 튼튼한 길은 지역주민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강은나래
미아타 키아졸라 씨(왼쪽)는 열여섯 살 때 한국인 심 아무개씨에게 성폭행을 당해 제프(오른쪽)를 낳았다.
그러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세계 173위에 실업률이 87%에 이르는 세계 빈국 중 하나인 라이베리아에서 이 도로는 박제된 근대화의 상징으로 남았다. 도로는 1990년대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다이아몬드 밀거래 수송로로 유용하게 쓰였고, 1997년까지 이어진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에는 무기 조달 통로로 사용됐다. 지금은 한 시간에 택시 한두 대 지나갈까 말까 한 길. 그 위로 한국계 사생아가 버려졌다. 

도로를 따라 북서쪽에 있는 마노 강을 향해 가다보면 중간쯤에서 ‘마디나’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도로 건설 당시 대우건설의 현지 본부가 있던 곳이다. 마을 주민은 한국 남자들을 기억했다.

   
 
“10대 소녀들, 1달러 받고 한국인과 잤다”


마을 이장 모리스 도실 씨(64)는 지붕까지 수풀에 뒤덮인 콘크리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한국 사람들이 쓰던 사무실이었다. 젊은 한국 남자가 몇 백명 됐는데,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친절했다. 마을 남자들은 운전이나 막노동을 하며 그들 밑에서 일했고, 애들은 심부름을 해주고 푼돈을 받았다.”
이어 그는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은 늘 저녁 6시에 일을 마쳤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리면 그 중 일부는 술을 마시거나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젊은 남자들에게 ‘치키치키(chick-chick)’ 비슷한 소리로 신호를 주었다. 그러면 남자들은 10대 후반 어린 여자들을 구해다 줬다. 여자들은 당시 돈으로 미화 1달러를 받고 한국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 한국 남자는 인심이 후했다.”
 
이 마을에서 한국 남자가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는 일은 꽤 공공연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벌타 설먼 씨(38)는 당시 17세 고등학생이었다. “대우건설에서 일하던 40대 정도의 남자가 퇴근 후 가끔씩 우리 집 근처로 놀러오곤 했다. 그의 성이 ‘김’이었던 것만 기억한다. 나에게 돈을 준 적은 없었다. 대신 늘 먹을 것을 사줬고, 나를 퍽 귀여워해주었다. 몇 달 뒤, 나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어찌할 줄 몰라 울기만 했다. 내가 임신 4개월 정도 됐을 때 그는 한국으로 떠났다.” 그녀의 아들 벤(21)은 마디나에서 태어난 두 번째 한국계 아이였다.

1989년에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마을에만 한국계 사생아가 4명 있었다. 한국인 밑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압둘라 케이 씨(37)가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한국인과 신기하게도 꼭 닮은 여자아이가 산다”라고 넌지시 말해주었다.

현지인이 임신하자 한국으로 줄행랑


시에라리온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체닌’이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나피(19)를 만났다. 그녀는 영락없는 동양인 얼굴이었다. 작은 눈에 낮은 코, 아담한 체격에 피부가 밝았다. 생모가 1995년 전쟁 통에 사망한 후, 생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1988년에 생모가 임신하자 도망가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 생부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어릴 때 나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4명 있었는데, 집에서는 나만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가족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참다못해 가출했다.” 먼지가 일어나는 도로 옆에서 껌과 사탕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나피는 현재 아이 3명을 둔 미혼모 가장이다.

사실 라이베리아에서 외국계 사생아 관련 문제는 ‘가난’과 더불어 도저히 손댈 수 없는 문제 중 하나이다. 라이베리아는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1847년 아프리카에 돌아와 세운 나라다.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이끄는 라이베리아 국민애국전선(NPEL)이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내전은 14년간 계속됐고, 이 전쟁으로 20만명이 사망하고 난민 75만여 명이 발생했다. 현지 언론인 필립 브라운 씨(52)는 “전쟁 뒤 라이베리아 전체 가정의 95% 이상이 미혼모 가정이 됐다. 도시를 떠도는 고아와 몸을 파는 미혼모들은 아직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다”라고 전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외국계 사생아에 관한 사회의 관심이나 지원은 사치스럽다는 말이 나온다.

   
ⓒ강은나래
한국계 사생아 낙기(왼쪽)와 킹(오른쪽). 킹에게는 레바논계 혼혈인 형(가운데)이 있다.
게다가 혼혈 인구가 많은 라이베리아에서는 혼혈아로서 가진 외모적 특성이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지인 사이에서는 피부가 밝을수록 인기다. 이들에게 사회 진출의 문은 열려 있는 셈이다.
한국계 사생아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1960년대 초반 독일이 시작한 광산산업을 비롯해 고무·커피·목재·건설·요식 산업 등을 노린 외국 기업이 쏟아져 들어왔다. 300만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혼혈 인구 대부분은 나이지리아·레바논·독일·미국·중국·한국계이고, 국가별 혼혈인 수는 현지에 동원된 노동 인력량과 체류 기간에 비례한다.

현지 한국인에 따르면 수도 몬로비아에 한국계 사생아가 10여 명 있고, 나라 전체를 통틀어도 20명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까닭은 한국인의 무책임한 처신 때문이다. 가족 상담가로 활동하는 베네딕트 리브스 씨(30)의 말이다. “30년간 광산산업을 했던 독일인들은 사생아 수백 명을 양산했지만, 철수할 때 대부분 본국으로 데려갔다. 미국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은 정말 무책임하다. 자식을 두고 도망간 후에는, 교육비는커녕 생활비조차 부치지 않는다.”

실제로 혼혈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레바논계 혼혈아의 경우 안정적인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다. 레바논인은 라이베리아의 섬유·요식 산업을 지탱하는 커다란 축이다. 이들은 원활한 산업 활동을 위해 혹은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정략적으로 현지인과 결혼하고, 그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거나 경제 원조를 한다. 한국계 사생아에게 닥친 문제는 라이베리아 거리의 ‘평범한 가난’일지 몰라도, 다른 계열 혼혈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난’이라는 말이다.

   
ⓒ강은나래
19세인 나피는 세 자녀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노점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간다.
거리로 내몰리는 한국계 사생아

라이베리아 정부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줄리앙 세넷 씨(37)는 한국인과 정식 결혼한 유일한 인물이다. 대우건설에서 일하던 최 아무개씨를 만나 1990년에 현지 전통 방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1997년에 최씨가 사망하자 둘 사이에 낳은 아들 규(17)를 찾는 전화가 한국에서 걸려왔다. 이혼했다던 최씨의 아내와 두 딸이었다. 줄리앙은 아들을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생모가 경제력이 없으면 사생아 처지인 아이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 어디를 가든 밤톨 같은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장사하는 열 살 안팎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낙기(20)도 아홉 살 때부터 거리에서 도넛을 팔았다.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에는 하루 종일 코코넛을 팔러 다녔다. 텃밭 채소를 팔며 생계를 꾸리던 생모가 낙기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부는 대우건설의 기술자였는데, 낙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으로 떠났다. 다행히 현지 한국인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라이베리아 커팅턴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다.

낙기와 절친한 친구인 킹(18)은 학업을 포기한 경우다. 킹은 열여덟 살이지만 학비가 없어 중학교 7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의 형은 레바논계 혼혈아이다. 동생은 중국계 혼혈아인데, 몇 해 전에 죽었다. 킹은 형이 운영하는 휴대전화 충전가게에서 일한다. “형은 레바논인 아버지가 학교도 보내주고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반면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킹은 공부에 아예 흥미를 잃어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한국계의 소개로 배도 타보고, 가정부 일도 해보았지만 힘들어서 그만두었다.

지나가던 동네 꼬마들이 킹을 보고 “차이니즈 맨! 차이니즈 맨!”이라고 부르며 킥킥거렸다. 킹은 별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라이베리아에서는 열여덟 살이 되면 국적을 선택한다. 하지만 난 무얼 선택해야 할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이름조차 몰라 찾을 길 없어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계 사생아 몇몇은 생부의 행방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에 오는 것도 어렵고, 신상에 대한 정보는 물론 정확한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딸 숙윤이를 위해 한국에 온 크리스티나는 아이의 생부 허씨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해보기도 하고, 그의 마지막 주소지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를 직접 찾아가보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은 주인이 이미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를 만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인 인지청구(친자확인) 소송을 준비 중이던 크리스티나는 예상하지 못한 소식을 접했다. 8개월 전 허씨가 사기 혐의로 구속돼 현재 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새로운 아내도 맞이했다고 한다.

 “아이를 호적에 입적시키고, 딸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이라도 부쳐주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 상처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한국이주노동재단의 도움을 받아 예정대로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쉽지는 않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소송이지만, 숙윤이가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한국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정한 일이다. 크리스티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한국에 온 이유는 죄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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