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불출마 발표 시각이 ‘절묘’했다. 신문 초판 마감을 앞둔 오후 3시30분, 기습 발표에 다음 날 짜둔 지면 계획을 다 엎었다. 기자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말했던 그의 ‘소심한’ 보복이라고 나는 읽었다.
마감 때 대형 사건이 터지지 않기를 모든 기자들이 바라고 바란다. 매번 그런 바람은 깨진다. 지난 설 합병호 마감 때 〈시사IN〉 편집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마감 날인 1월20일 하필 ‘법마(法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영장실질심사가 열렸다. 영장실질심사가 끝나고 10시간이 지난 새벽 3시가 넘어도 결정이 나지 않았다. 구속 여부를 희뿌옇게 처리하고 퇴근했다. 새벽 3시50분 영장이 발부되었다. 퇴근하던 차를 돌려 다시 사무실로 복귀해 기사를 고쳤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영장실질심사 때는 마감 날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에서 깨어 ‘18시간 고심 끝에 내린 법원의 결정’이라는 뉴스를 읽을 땐 구역질이 났다. 기각 때문만은 아니다. 법원의 18시간 장고라는 대목에서 나는 최성필(가명)이 떠올랐다.
경찰은 살인 현장의 신고자였던 열다섯 살 최성필을 용의자로 붙잡았다. 소년도 물론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구속이 결정되기까지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살인죄로 처벌했다. 징역 10년 가까이를 살고 나왔다. 그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만들어낸 ‘가짜 살인범’, 바로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의 피해자다. 영화 〈재심〉으로도 만들어진,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의 프로젝트로 16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30대 가장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헌법 제11조다. 이재용과 최성필 사례에서 보듯, 디케 여신상의 저울은 수평이 아니다. 저울의 한쪽엔 돈다발이 올려진 지 오래다. 영화 〈더킹〉에도 나오듯 검찰이나 특검이 수사에 나서면 전관 변호사들은 표정 관리를 한다. ‘타임차지’로 일컬어지는 소송비용은 영장전담 판사가 보는 두툼한 서류와 정확히 비례한다. 판사의 18시간 장고는 돈의 힘이다. 최성필의 국선 변호사는 그에게 범행을 인정해야 형량이 준다며 검경과 똑같이 자백을 강요했다.
이재용·김기춘과 최성필은 법 앞에 평등할 수도 없고, 평등하지 않다. 물론 ‘힘없고 빽없는’ 피고인에 대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판사가 있을 것이다. 법관 개인의 양심에 맡길 게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이 잇달아 내려지자 대법원은 최근 ‘구속사건 논스톱 국선변호’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벌써부터 실효성이 크지 않은 언론 홍보용 대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촛불 민심으로 드러난 건 개혁이다. 모든 걸 한순간에 다 바꿀 순 없다. 차근차근 따져보고 개조하고 개혁해야 한다. 사법 시스템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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