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기자 생활을 하다가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서 교수를 하는 친구가 종종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네가 기자랍시고 세상을 좀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이 대학과 교육부라는 데서 얼마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이곳에 어떤 기이한 고대의 괴물이 우글대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친구가 과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요 며칠 교육부의 나향욱 정책기획관이라는 고위 관료가 20년 이상 공들여 쌓았을 직업 경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생쇼’를 벌이는 광경을 구경하면서 그 친구의 말이 진담이었음을 실감했다.

상상력을 발동해보면 실로 끔찍한 일이다. 만약 교육부에서 일한다면 지금 세상에 아직도 반상의 구별이 엄연하다고 믿는 그런 괴상한 인물과 같은 사무실을 쓸 수도 있다. 싫어도 가끔 함께 밥을 먹거나 술도 마셔야 한다. 운이 안 좋아 이런 사람이 직속상관이 된다면 정신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는 직장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 것이다. 진보 언론인 〈경향신문〉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가 저 정도니 동료나 부하 직원과 만났을 때는 얘기가 어느 쪽으로 튀었을지 상상력이 모자란다. 게다가 그런 얘기에 물개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직장에서 상당수를 차지한다면? 이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아이들의 장래가 걸린 교육정책을 이런 사람이 ‘기획’했다는 게 소름 돋는다.

ⓒ한성원 그림

그렇더라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성과 인종을 차별하는 온갖 막말을 지속적으로 퍼부어오지 않았던가. 양과 질에서 한국의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이 따라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장되기는커녕 갖은 비난 속에서도 사실상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9·11 테러 이후 실종되지 않았는지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언론의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한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덕분이었다. 2016년 국경없는기자회가 매긴 언론자유 성적표에 따르면 미국은 41위, 한국은 70위였다. 트럼프와 나향욱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그 차이였을까.

한국의 언론자유는 ‘김일성 만세’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고 외쳤던 김수영 시인이 옳다면 나 기획관이 파면까지 당한 것은 지나친 일이다. ‘김일성 만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신분제 만세’도 외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독재자나 전체주의 세력에게 국민의 입을 틀어막을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친’ 언론의 자유마저 보호해야 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아마 지금쯤은 나 기획관도 시인의 감수성에 공명할 수 있으려나.

테러의 빈발로 미국과 유럽에서 안보가 우선 가치가 되면서 전 세계에서 언론자유가 덩달아 후퇴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분명 우려할 만한 일이다. 러시아나 중국에서 언론자유의 수준은 냉전 이전으로 돌아가버렸다. 재스민 혁명 이후 반짝 자유를 누렸던 아프리카와 중동은 과거의 독재자들을 그리워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기자와 작가가 종교단체, 비정부기구, 테러 조직에 살해당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무엇보다도 언론자유에 대한 감각이 과거에 비해 무뎌진 게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국경없는기자회는 경보를 울리고 있다. 나 기획관이 파면된다면 미국보다 언론자유가 위축된 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일까. 이번 일이 언론자유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토론을 동반하지 못하고 마무리돼가는 것 같아 아쉽다.

훌륭한 교사는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에 최고 수준의 강의를 무료로 올리겠다는 꿈을 실천에 옮겨 유명해진 칸 아카데미 설립자 살만 칸 역시 교육계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에 따르면 학교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일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학생들에게 강요된다. 임상실험조차 거친 적 없는 신약을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 벌어진다. 왜 50분 강의하고 10분을 쉬어야 할까, 지금의 학년제는 무슨 기준으로 정한 걸까, 방학은 꼭 있어야 하나, 시험이 정말 문리를 깨치는 데 도움이 되나. 그는 모든 일이 미심쩍어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중이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온 경험에 비춰보면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을 보태고 싶어진다.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써야 하는 것으로 굳어져버린 (그림)일기, 중·고등학생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독서 후기 등이 과연 논리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이것들이 아이들이 글쓰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공범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이제 나향욱이란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친 몸통에 주목해야 한다. 나 기획관의 얘기를 자세히 뜯어보면 그는 철저히 미국식 신자유주의 교육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런 애들은 정치니 뭐니 이런 높은 데 올라가려고 하지 않으니까 위에 있는 사람들이 먹고살게나 해주면 된다, 우리도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대학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공교롭게도 이 제도는 주로 서울 강남 출신 학생을 인성 좋고 잠재력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그동안 대학 구조개혁,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누리과정 등 굵직한 기획을 주도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제도들에 그의 ‘철학’은 얼마나 반영된 걸까. 교육부 내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진을 거듭해온 그가 조직에서 드물게 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식 신자유주의 교육에 매몰됐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신자유주의 사고라는 게 이미 본산지인 미국에서조차 처참하게 찢겨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그동안 미국과 유럽에서는 교육을 둘러싸고 두 가지 생각이 대립해왔다. 좌파는 소득의 불평등과 인종차별이 학교에서도 재현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해왔다. 당연히 무상교육과 복지 확대를 통해 기회균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우파는 이런 식의 좌파식 발상이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비난해왔다.

이제 교육 현장에서 철학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 살만 칸과 같은 이들이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 덕분이다. 지금까지 학생·학교·교사·가정 가운데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한때는 학급당 학생 수만 줄이면 학력은 덩달아 올라가리라고 믿었다. 각 가정의 소득 수준과 아이들의 학력 수준이 일치한다고 여기기도 했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간과했던 점이 최근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교육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교사였다. 한때는 그 분야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는 피신자가 택한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던 바로 그 교직이 교육의 주역이었다. 지난해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대학의 존 헤티가 전 세계 학생 2억5000만명에 관한 6만5000건 이상의 보고서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교실의 사이즈, 능력에 따른 교실 배치, 또는 근사한 교복에 이르기까지 수백 건의 교육 간섭 효과 가운데 단연 으뜸은 교사의 전문성이었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 대학 경제학자 에릭 하누셰크에 따르면 한 학기에 상위 10%의 교사는 하위 10%의 교사에 비해 학생들에게 3배나 더 많은 배움을 준다. 이 연구에 따르면 운 좋게 초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가난으로 인한 학업 결손을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의 교육학자 토머스 케인 같은 이는 만약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이 모두 상위 25% 안에 드는 교사에게서 배운다면 8년 안에 흑백 간의 학력 격차는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본다. 또한 미국 교사의 평균 질이 모두 지금의 가장 우수한 수준으로 올라선다면 미국과 아시아계의 학력 차는 4년 안에 없어지리라고 장담한다. 인종 간에 분명한 능력 차가 존재한다는 우파의 믿음은 착각이다.

2011년 교육에 관한 태도 조사에서 미국인 70%는 훌륭한 교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생각에 기초해 미국의 돈 많은 사립학교들은 끊임없이 우수한 선생을 영입하고 모자란 선생을 쫓아내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왔다. 하지만 맥 빠지게도 최근의 연구 결과는 평범한 교사라도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미국과 유럽,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교사 양성기관들은 학생을 혹독하게 조련하는 의과대학과 프로 스포츠의 코칭 시스템에서 착안한 교사 훈련 프로그램을 돌려 학교 현장에 우수한 교사를 공급하고 있다. 이들은 공허한 이론을 공부하느라 시간을 많이 뺏기는 기존 교사 양성 대학과 달리 교습생에게 현장 교육 경험을 많이 심으려 노력한다.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 길러낸 교사들은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높은 행동 기준을 밀어붙이며 시간을 현명하게 관리한다. 단골로 손을 드는 아이들에게 의존해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스스로 학생들에게 차가운 질문을 던지는 데 집중한다. 끊임없이 동료 교사로부터 피드백을 받는다. 학생들과 상호 소통하려고 노력하지만 교실의 경영자가 교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이 교사 양성기관들은 졸업생이 학교에 나가 어떤 성과를 거두는지 일일이 체크한다. 마이클 조던을 세계적 스타로 키워낸 유능한 코치처럼 평범한 교사를 바꿔놓는다는 이들의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학교에는 혁명과 같은 변화가 찾아올 수 있다. 부자 나라인 OECD 가입국의 교사 가운데 5분의 2가 다른 교사의 수업을 참관한 적이 없는 실정이다.

지금 유럽과 미국의 교육계에서 부는 바람의 진원지는 바로 교실이다. 검증되지 않은 미신들은 가차 없이 추방되고 있다. 그동안 교사를 선도 대상으로만 알아왔던 교육부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가장 적합하지 않은 세력인지 모른다. 누구보다도 나향욱 기획관이 자기 조직의 구태를 잘 대변했다고 여긴다. 그의 발언에서는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했다는 흔적을 발견할 길이 없다. 경중을 따지자면 국민을 개·돼지로 여긴 오만보다는 교육 전문가로서의 무지가 더 불량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경보다 교육부가 중요할 이유가 없다.

참고한 활자:〈나는 공짜로 공부한다〉(알에이치코리아),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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