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가장 기본 이념은 정치적 평등이다.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된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부장제에 기초한 성적 불평등과 여성 억압이 계속되고 있다. 남녀 불평등은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다양한 사회문제에서 성평등 문제가 어떻게 배제되어 왔는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더 좋은 민주사회’로 만드는 데 왜 ‘젠더 관점’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노무현재단·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한국여성노동자회·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가 공동 주최한 ‘나의 첫 젠더 민주주의 수업-레드스타킹을 신어라’의 다섯 번째 강의를 정리해 중계한다. 

 

〈강의 중계 순서〉
① 젠더 관점으로 본 한국 사회-정희진(평화학 연구자)
② EU의 성평등 정책-아나 베아트리츠 마틴스(주한 EU대표부 수석정무관)

③ 워킹우먼 실종 사건-임윤옥(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
④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나요?-변상욱(CBS 대기자)
⑤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닙니다-손희정(문화평론가)
⑥ 우리도 여자黨?-서복경(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

 

 

여성혐오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드디어 가시화되기 시작한 사건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폭력이 이뤄지고 있다. 먼저 학부형 집단강간 사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남역에는 페미니스트들이 ‘개떼같이’ 모여들더니 왜 이 사건에는 입 다물고 있느냐고 얘기한다.

정확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교사는 자기를 자학하는 방식이 아니라 증거를 수집하고 경찰에 찾아가서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명백히 페미니즘의 성과다. 성폭력 피해는 나의 잘못이 아니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가해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온 게 페미니즘이다. ‘박유천 사건’도 보자. 몇 년 전이었다면 성산업에 종사하는 피해자 여성이 손가락질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나와서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던 건 ‘토양’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가수 겸 배우 박유천이 6월30일 오후 성폭행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강남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도 마찬가지다. 남성의 여성 살해는 역사적으로 쭉 있어온 사건이다. 만약에 여성 대중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화장실 변사체녀’로 사라졌을 거다. 여성들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강남역 10번 출구에 가서 쪽지를 붙임으로서 여성혐오 사건이 되었다. 이 모든 게 페미니즘의 토양 안에서 등장했다.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5·17 페미사이드’라고 명명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여성사 안에서 다른 이름으로 쓰이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어떤 이름이 있을까. 5·17 여성봉기?(웃음). 사건을 거치며 여성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둥, 한국형 페미니스트들이 곡해하고 있다는 둥. 이런 오해를 만들어내는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왜 이렇게 말하게 됐는지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그 바탕에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녀’ 담론과 여성 대중이 싸워온 역사가 있다.

2016년 대중문화는 여성들 투쟁의 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슬러 가면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여성 커뮤니티가 나선 일 등 온라인 페미니즘 역사가 켜켜이 쌓여온 부분이 있다. 2015년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무뇌아적 페미니스트’라는 글이 여성의 공분을 사고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선언이 촉발되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가 싫어서 IS로 간 청년도 있었다. 메갈리아를 손가락질하지만 메갈리아가 ‘소라넷 폐쇄’라는, 대한민국 경찰이 16년 동안 못한 일을 했다. 이런 맥락을 거치면서 여성들이 강남역 살인사건도 여성혐오 사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혐오 발언을 마구 쏟아낸 개그맨 장동민에 대한 피켓 시위 같은 것도 벌어졌는데, 그의 소속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코엔미디어는 연예인 소속사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사랑〉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엔터테인먼트 제작도 겸한다. 장동민을 비호하는 것은 연예 자본이기도 하고, 연예 자본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성연대이기도 하다. 쉽게 끌어내리기 어렵다. 장동민에 대한 불매운동은 단순히 한 연예인 반대가 아니라 장동민으로 대변되는 연예계의 남성연대와 싸우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유상무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추문이 났는데, 한번 보자. 옹달샘을 언제까지 그들이 비호하고 지킬 수 있을지.

ⓒ연합뉴스2015년 4월28일 개그맨 장동민, 유세윤, 유상무가 '막말 논란'에 대한 입장 표명 기자회견 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월간지 〈맥심〉에 대한 불매운동도 있었다. 표지가 던져준 이미지가 ‘나쁜 남자’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여성을 묶어 트렁크에 넣는 장면이었다. 성폭력을 상품화하고 미화하는 기사를 넘어, 표지를 통해 페미사이드를 재현했다. 〈맥심〉에서는 일부 ‘꼴페미’가 법석을 떤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한국 여성들은 매우 현명하게 움직인다. ‘맥심 코리아’와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하자 바로 미국 본사에 연락했다. 결국 그 호 잡지가 전량 회수되고 판매수익은 여성단체에 기부하겠다고 했는데, 기부를 계속 거절당했다고 한다(웃음). 이런 끊임없는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이 ‘5·17 페미사이드’라는 명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여성혐오는 전 지구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의 보편성 안에서 등장하지만 한국 사회는 아주 특수한 여성혐오가 있다.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 유럽에서는 무슬림,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과 혐오가 진행되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여성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왜 그럴까. 소설이나 영화에서 식민지 조선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메타포 중 하나가 뭔가. 겁탈당한 여성의 신체로 은유하는 방식이다. 이때 식민지라고 하는 건 거세당한 남성성의 상징이 된다. 근본적으로 탈식민의 역사는 여성을 혐오하는 방식으로 굴러갔다. 김영삼 정부 때의 ‘세계화’를 외국 논문에서는 golobalization이라 하지 않고 segehwa라고 쓴다. 한국적 특수성을 상징하는 단어가 된 건데, 한국의 여성혐오도 그런 식인 듯싶다.

여성혐오는 성에 기초한 폭력, 차별적 언행, 공공연한 차별 등을 자연화하는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남성을 보편 인간으로 설정하고 여성을 결핍 혹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타자화한다. 이런 여성혐오를 가부장제의 이미지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에 근거해 차별하고 타자화하는 방식이라는 의미다. 이때 여성혐오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가부장제, 신자유주의, 백래시(backlash·반발). 이렇게 얘기하고 다녔더니,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여성혐오의 가장 중요한 이유인 줄 알더라. 틀렸다. 근본은 가부장제다. 가부장제 안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반복되고 지속되는 여성혐오의 특수한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가 신자유주의라고 이해하는 게 옳다.

 

가부장제의 이미지 정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온라인 여성혐오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99년 군 가산점제 폐지 때였다. 지금까지도 마르지 않는 샘이다(웃음). 예컨대 장동민이 얘기했던 것처럼 ‘떠들고, 말하고, 설치는’ 여성들에 대한 혐오가 이때 등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대에서 영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끌었던 학생들이 만든 ‘월장’ 커뮤니티에 대한 사이버 성폭력도 있었다. 이들은 예비역, 즉 복학생이 어떻게 대학문화에 해악을 끼치는지에 관한 기사를 썼을 뿐이다. 커뮤니티가 폭파되고 월장 멤버들의 신상이 털려 성구매 사이트에 올려졌다. 사이버 성폭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진보 정당 안에서도 여성위원회 활동을 하는 분이 많이 당한다. 진보 남성들은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 줍는 걸 참을 수 없는 거다(웃음).

온라인 여성혐오가 사회 일반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중반이다. 이때 ‘◯◯녀’들이 등장한다. 특히 개똥녀 사건은 온라인 여성혐오의 원형을 제공한 사건이다. 그 뒤로 나온 게 된장녀, 루저녀까지 그야말로 ‘◯◯녀’의 시대가 된다. 그리고 드디어 2010년대에 와서 김치녀가 등장한다. 이제 대한민국 여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개념 없음이 ‘종특’인 시대가 됐다. 종특이 뭔가. 인종화한 거다. 한국에 김치녀가 있고, 일본에 스시녀가 있다. 누군가를 우상화하면서 혐오하는 방식이다. 김치, 스시 같은 이미지를 경유해서 남녀 관계가 생기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된다. 실제 여성혐오는 이미지의 문제이지 실체가 아니다.

개똥을 안 치운 사람이 실제로 있는데 왜 실체가 없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다. 그 사건을 조금만 비틀어보자. 이 사건에서 젊은 여성이 아닌 나이 든 남성이 개를 데리고 탔는데 개가 똥을 싼 후 안 치우고 내렸다. 이걸 젊은 여성이 치웠을 때 이 사건은 무슨 사건이 됐을까. 당연히 치우는 거지, 하고 넘어갔을 수 있다. ‘개념녀’ 사건이 됐을 수도 있겠다. 적어도 ‘개똥남’ 사건은 되지 않았을 거다. 여성도 실수하거나 개념 없을 수 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건을 저지른 사람의 성별을 여성으로 집어내서 ‘◯◯녀’라고 이름 붙이고 이를 여성의 특질인 것처럼 유포하는 것, 이게 바로 가부장제 이미지 정치다.

2012년 4월30일의 ‘압구정 가슴녀’ 기억하시는 분 있는지 모르겠다. 검색어 1위였다. 아무리 검색해도 압구정 가슴녀의 실체가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실제로 없는 일이었다. 당시 번역된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서평 기사를 실은 프레시안이 여성혐오를 설명하기 위해서 ‘꾸민’ 일이다. 서평의 제목이 ‘분당선 대변녀와 압구정 가슴녀의 차이는?’이었다.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 압구정 가슴녀를 미친 듯이 검색한 거다. ‘◯◯녀’ 담론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이렇다.

여성혐오와 ‘◯◯녀’를 이야기할 때 허구성에 주목한 건 매우 중요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확인하셨겠지만 일베와 오유가 대동단결했다(웃음). 여성혐오 담론의 양산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이것이 쾌락의 언어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는 이런 거다 등등 백날 계몽의 언어를 써봤자 온라인에서는 못 싸운다. 계몽의 언어는 지루하고 쾌락의 언어는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설명충, 진지충, 선비충이 되는 거다(웃음). 실제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건 즐겁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와 싸워야 한다.

가부장제는 왜 이런 이미지 정치를 할까. 중요한 건 실체는 없지만 강력한 실효를 가진다는 점이다. 실체가 없다고 말해봐야 해결이 안 된다. 여성숭배와 여성혐오는 다르지 않다. 여성혐오 시대에 어쩜 이토록 딸바보 인증이 넘쳐나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여성의 이미지에 부합하면 사랑하고 숭배하고, 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순간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시사IN 윤무영6월14일 손희정씨가 미디어카페 후에서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닙니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에 따라 여성을 숭배하고 사랑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여성을 지배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구분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치를 두루 갖춘 여성은 성녀, 그 가치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여성은 창녀로 이분화함으로써 여성을 지배한다. 여성들은 성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여성혐오를 내면화한다. 어머니가 나한테 ‘너는 남자 사주다’라고 했을 때, 그게 나에게 상당히 오랜 기간 자부심이었다(웃음). 나는 너희 여성과 다르지, 나는 큰 인물이 될 거지, 라고 생각했다. 그게 여성이 여성혐오를 내면화하는 방식이다. ‘여성의 적은 여자’라는 음모론이 쌓이는 방식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창녀의 기표에 누가 들어가 있나. 김치녀다. 그리고 나 같은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IS에 간 김군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도대체 페미니스트가 뭘 했길래 그런 거냐고. 나도 모른다(웃음). 그리고 강남역 살인사건 때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기층 여성을 안 돌봐서 생긴 페미니즘의 실패래. 어쩌라고?(웃음) 정확하게 페미니즘 혐오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텅 빈 기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다 욱여넣는 빈 그릇인 거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언어를 만들 때 ‘-충’을 붙인다. 메갈리아가 미러링을 통해서 남성을 표현할 때 ‘한남충’이라고 한다. 근데 ‘충’자가 붙지 않아도 그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게 여성이다. ‘◯◯녀’라고만 붙여도 혐오의 대상이 되잖나. 여성을 폄하하고 비하해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녀’에 붙는 게 뭔가. 된장과 김치다. 특정한 냄새와 문화를 환기하는 방식이다. 이런 모멸이 반복되다 보면 수치로 변하게 된다. 모멸에는 분노가 있지만, 수치에는 분노가 없다.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거세하는 방식이다.

‘◯◯녀’ 담론이 등장하기 전에 여성을 비하하고 폄하하는 호칭은 뭐였을까. 아줌마였다. 1990년대에 아줌마는 왜 멸시당했나? 자기 자식 문제 등 사적 영역에 매몰돼 있다고 비판받았다. 당시에는 한국 경제가 최정점이었다. 민주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이 때문에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집에서 살림하고 빨래하는 아줌마가 아니라 공적 영역으로 나와 활동하는 여성이 되기를 요청하는 시기였다. 이영애씨가 ‘산소 같은 여자’ 다음에 했던 광고를 기억하시는지. ‘세상이 나를 원한다’ 였다. 이때 아줌마라고 하는 존재는 사회가 원하는 새로운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았기에 혐오 대상이 되었다.

 

여성이 방송인 에릭남을 좋아하는 이유

 

2000년대 들어 혐오의 대상이 된 여성들을 보자. 된장녀와 김치녀, 혹은 ‘오너 드라이버’인 김여사(웃음). 자신의 지갑을 가지고 소비하는 여성들이다. 경제적 주체인 여성이 혐오 대상으로 소환되기 시작한 거다. 여성혐오라는 현상은 변하지 않았는데 여성혐오의 성격이 변했다. 왜? 외환위기(IMF)를 거치면서다. IMF 때 가장 먼저 없어진 게 뭘까. 직장 내 탁아시설이다. 구조조정의 첫 대상은 기혼 여성이고 그다음이 미혼 여성, 그다음이 나이 많은 남성 순서였다. 이걸 보면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라고 하는 건 오직 하나의 가치만 있다. 남성이 주도했다고 상상되는 경제 발전.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는 남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공과 식모 등 여성 노동자의 노동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IMF는 근대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고, 국민의 실패가 아닌 남성의 실패가 되었다. 실패한 남성을 북돋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중매체가 동원됐나. IMF 이후 영화를 보면 주인공 남성이 아프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가 그렇고, 〈편지〉의 박신양이 그렇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그에게 헌신하는 현명한 여성들이 있다. 요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에 각종 트라우마와 심리적 장애에 시달리는 아픈 남자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근데 또 다 실장님, 본부장님이다(웃음). 또 돈도, 보살펴줄 사람도 많은데 꼭 옆에 캔디가 있어. 이게 한국 대중문화의 현주소다.

IMF 이후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된 결과가 어떤가. 남성과 동일 노동을 하고도 여성 임금은 65% 수준인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여성이 어떤 일자리로 몰릴까? 공무원이다. 군 가산점제는 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데 왜 모든 남자가 씩씩대는 걸까. 남녀 싸움으로 붙여버리면서 국가는 손 안 대고 코 푼 셈이다. 군 가산점제가 왜 폐지됐는지 기억하는가. 여성이 공무원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도 공무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져서다. 헌법소원을 냈고, 합리적인 판결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군 가산점제는 아직도 개싸움의 ‘떡밥’이다. 애초 온라인 여성혐오의 등장 자체가 이처럼 경제적·정치적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된 부분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논란이 됐던 ‘중식이밴드’를 보자. 잉여가 된 남성 주체가 여성혐오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치자. 더 큰 문제가 뭔가. 한 나라의 공당이 청년 문제를 상상하는 방식이다. 그 공당이 생각하는 청년의 얼굴이 정확하게 남성이다. 이때 여성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나.

지금까지 여성들이 관대한 마음으로 여성혐오 콘텐츠를 소비했다면, 2015년을 지나면서 달라졌다. 점점 더 여성혐오 콘텐츠가 팔리지 않게 될 거다. 장동민에 대한 거부, 김숙과 에릭남의 인기를 보자. 남자들은 쉽게 얘기한다. 에릭남이랑 와인 마시는 게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여성들은 에릭남이 매너가 좋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가 ‘문명남’이기 때문에 좋아한다(웃음).

사람들이 종종 ‘워마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물어본다. ‘언니들이 허락한 페미니즘 필요 없다’고 했지만(웃음), 어쨌든 지금의 워마드 활동을 지지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워마드와 일베는 같지 않다는 게 중요하다. 일베는 완전히 공개되어 있다. 워마드에서 하는 ‘재기하라’ 같은 말, 고통스럽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찾기 위해 검색해보면 나는 워마드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이게 뭐냐면, 워마드에서 만든 혐오는 확대 재생산되지 않는다. 일베처럼 광범위하게 작동하지 않는 거다. 일베와 워마드를 같은 층위로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지금 페미니즘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문제적인’ 워마드에 집중해서 페미니즘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 없다.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다성이고, 부딪쳐가면서 맥락을 만들면 된다. 페미니즘이 조각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 시작된 이 변화를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이전 세대 페미니즘 운동이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그 운동들은 우리 기억 속에 잠재하고 있다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많은 씨앗을 뿌려서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것이다.

 

정리·장일호 기자 

기자명 손희정 (페미니스트 비평가·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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