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는 1991년 7월 아프리카인에 대한 보상과 그들의 본국 귀환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회합이 열렸다. 아프리카 지식인들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성토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이 회의는 노예무역으로 뿌리가 뽑힌 숱한 생명과 금과 다이아몬드 같은 약탈 자원에 대한 적절한 배상액이 777조 달러에 달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영국의 역사학자 닐 퍼거슨은 자신의 저서 〈제국〉(민음사)에서 이 계산을 바탕으로 1850년 이전에 노예가 돼 대서양을 건너갔던 아프리카인 1000만명 가운데 300만명 이상이 영국 선박을 탄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렇다면 영국이 배상해야 할 액수는 260조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영국이 앞으로 100년 동안의 GDP를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한때 세계 인구의 25%를 지배했고, 동일한 비율의 육지와 대양에 유니언잭(영국 국기)을 휘날렸던 영국연합은 그 영토의 넓이에 비례한 악명을 날렸다. 자신들보다 나약하고 무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해 끊임없이 몸집을 불렸다. 삽시간에 다수의 인명을 살상해 토착민의 저항 의지를 꺾어버리려고 영국 군대가 고안해냈고 나중에 다른 제국이 다투어 도입한 것이 바로 기관총 운용 전술이었다. 이 제국의 신민들은 스스로는 자유에 목숨을 걸면서도 전 세계 곳곳에 거리낌 없이 노예 세계를 건설한 모순 덩어리다.

ⓒ한성원 그림

영국의 정치인이나 지식인 가운데는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지는 못하더라도 사과는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영국 정부 차원에서 흑역사를 반성한 일은 없다. 그럴 만한 계제도 아닌 것이 전 세계 약자에 대한 영국의 약탈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주로 과거의 식민지나 독재자가 지배하는 제3세계로부터 왕실령 세 곳의 조세회피 지역을 통해 끌어들인 수상쩍은 돈만 1조 달러에 달한다. 이로 인해 개발도상국은 1년에 300억 달러 이상의 세금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영국의 연간 해외 원조 총액의 3배에 달한다. 물론 영국 영향력 아래 있는 전체 역외가 운용하는 자금은 이보다 훨씬 많다. 영국이 계속 유럽연합(EU)에 완전히 발을 담그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었던 것은 조세회피에 대한 EU의 통제를 받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악당들의 돈을 지켜주고 이득을 누리느라 실패 국가의 빈민을 노예 상태로 몰아넣는 데 기여하면서도 자동차나 바이크를 탈 때 안전벨트나 안전모는 한사코 거부하는 것. 그것이 위선에 찬 영국식 자유주의의 얼굴이다.

그렇더라도 영국은 마냥 미워만 하기는 힘든 존재이다. 이 나라에는 전 세계를 떨게 만들었던 대포나 기관총보다도 훨씬 강력한  펜이 있다. 이 펜이 부리는 마법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문학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작고한 독일의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동서양에서 수많은 작가가 명멸했지만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셰익스피어를 꼽겠다고 했다. 이유는 ‘어떤 작품에나 작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그 종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셰익스피어는 완벽한 전지적 시점으로 작중인물과 거리를 두었던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이 나라는 장르의 원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작품을 내놓은 작가를 유난히 많이 배출했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태두인 〈1984〉를 쓴 조지 오웰, 그리고 이 장르의 끝을 보여줬다는 평을 듣는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가 동시대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의 묘지에 〈해리 포터〉를 써서 거부가 된 조앤 롤링을 비롯한, 판타지 소설을 써서 먹고사는 전 세계의 수많은 작가들이 매년 경배를 올려야 마땅하다. 그녀의 상상력이 없었다면 할리우드 영화 종사자의 10분의 1쯤은 아마도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쯤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영국의 현존하는 최고 작가란 평을 듣는 제프 다이어를 슬쩍 끼워놓고 싶어진다.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스승으로 모신다는 이 작가는 허구와 사실을 마구 뒤섞어놓는 재주가 있는데 절묘하게 리얼하다. 그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 위험한 시대와 어울리는 탁월한 작가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작가들이 쓰는 언어, 영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의 초강대국인 영국과 미국의 영향 덕분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영어의 약진은 눈부시다. 미국이나 영국을 싫어하는 나라는 많지만 (어쩌면 늘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영어를 쓰는 지역은 넓어져만 간다. 영어에는 현대에 어울리는 개방성과 유연성이 있음에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인구보다 많은 3억5000만명의 중국인이 영어를 배우느라 땀을 흘린다. 2020년께에는 영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사람 가운데 원어민이 소수가 될 전망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국은 영어 말고도 전 세계 공통의 언어를 한 가지 더 만들었다. 이 언어는 냉전 시대에 소련과 그 영향권에 있는 동유럽, 그리고 중국에서까지 거부감 없이 통했다. 애호가들로부터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댄스 스포츠(사교춤)의 도형과 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과 남미에서 대중이 즐기던 왈츠, 룸바, 탱고 등 10개 춤을 정리해낸 곳이 영국 왕실무도협회이다. 중국 베이징의 공원에서 댄스 스포츠를 즐기는 수많은 군중은 영어는 한마디도 못해도 이 국제적인 몸의 언어에는 능통하다. 영국 왕실무도협회 덕분에 전 세계 어디서나 말도 통하지 않는, 처음 만난 남녀가 스스럼없이 춤을 즐길 수 있다.

얄궂게도 이 춤의 언어에는 식민시대의 비애가 짙게 서려 있다. 10가지 춤 가운데 8개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려간 노예와 식민지 하층 노동자의 고달픈 몸짓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맘보와 차차차의 원형인 룸바에서 어깨를 들썩이지 않고 발끝을 끄는 동작은 영락없이 무거운 짐을 나르는 모습이다. 파트너 주위를 도는 스폿 턴은 마차 바퀴 자국을 따라 힘겹게 걷는 형상이라던가. 영국인은 스스로 연출한 비극을 바라보면서도 무엇이나 정리하고 체계화하기를 즐기는 장기를 발휘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영국이란 나라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단조롭지 않았을까.

그들의 혈관에는 잔혹한 약탈자의 피가 흐른다

이번 영국 국민의 브렉시트 결정 투표에도 뛰어난 통찰과 위선이 마구 뒤엉킨 듯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브렉시트를 ‘역사의 종언의 종언’이라고 표현했던데 의미심장하다. 소련이 해체된 뒤 자본주의 체제가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승리했다는 의미에서 미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했던 유명한 말을 비튼 것이다. 냉전이 끝난 뒤 의심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세계는 오랫동안 애써 낙관을 유지해왔다. 관세 장벽은 낮아지고, 돈은 가장 필요한 곳을 찾아 흐를 것이며, 노동자들도 적절하게 국경을 넘나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시민이나 애국자가 아니라 소비자나 세계인이 되고 항상 전쟁을 부를 위험을 내포한 민족주의는 수그러들 것이었다. 후쿠야마의 예언대로 지금의 체제가 ‘인간이 만든 마지막 정부’가 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이 자본 유일체제에서 균열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융자본은 오작동을 하기 일쑤였다. 돈은 마우스 클릭 속도로 국가를 넘나들고 지나간 자리에는 인플레와 거품이 낭자했다. 멕시코·아르헨티나·타이·한국·홍콩·인도네시아를 거쳐 결국 미국과 남부 유럽까지 경제를 부풀려 터뜨리는 자본의 흐름에 휘둘렸다.

냉전 이후 체제에서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이들은 누구일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중국과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글로벌 경제체제로 들어오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들은 부자 나라의 노동자들이다. 맹렬한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명 소리는 컸지만 실제로 개발도상국 국민의 실질소득은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실질소득이 평행선을 그리거나 오히려 하락한 이들은 주로 부자 나라의 블루칼라들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각 나라 통계자료를 활용해 전 세계 노동자들을 소득순으로 1등부터 100등까지 일렬로 세워 보았다. 그랬더니 부자 나라의 부자는 1등, 부자 나라의 노동자는 10~15등, 중국 같은 중진국의 중산층은 50등쯤에 위치했다. 놀랍게도 가장 소득이 적게 늘어난 계층이 부자 나라의 노동자층이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부터 이 계층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민자와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미국과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믿기 힘든 득표 행진을 했다. 미국에서는 뷰캐넌을 거쳐 트럼프,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의 르펜 부녀, 독일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번에는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터졌다.

소득이 줄어들고 고용이 불안한 유럽의 부자 나라 노동자들에게, 식민지에서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생각한다면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소득이 줄어든 데 대해 화내는 게 옳으냐고 묻는다면 무리일까. 개발도상국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갔다면 냉전 후 체제에도 무시하지 못할 강점이 있다는 얘기다. 유럽 보통 사람의 분노는 외부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금융위기를 부르고 양극화를 극대화하는 내부 모순을 향하는 게 옳다.

브렉시트는 〈워싱턴 포스트〉의 표현대로 냉전 후 질서의 재편이 필요하다는, 역사의 종언의 종언을 알리는 요란한 선언이었다. 상황을 정리해내는 데 탁월한 영국인 특유의 감각이 반영됐고 시의도 적절했다. 하지만 칼끝을 이민자에게 겨눈 것은 자유를 향한 열정을 부패한 귀족체제가 아니라 식민지 개척으로 돌렸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후예이며 제프 다이어와 동시대인이면서도 그들의 혈관에는 잔혹한 약탈자의 피가 흐른다는 걸 새삼 일깨우는 짓이다. 생각해보라. 그에 비하면 유로 2016 축구에서 아이슬란드에 진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참고한 활자:〈제국〉(민음사),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허니와이즈),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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