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년도 더 훨씬 전에 스페인 피레네 산맥의 한 동굴에서 어떤 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벽에 친숙한 동물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그것도 기왕이면 펄펄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그는 바위의 튀어나온 면과 갈라진 틈을 그대로 살려보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빨강, 보라, 검정의 천연염료를 칠했다. 그러자 들소 19마리와 멧돼지 3마리, 말 2마리, 이리 1마리가 금방이라도 그림 속을 박차고 나갈 기세를 뿜었다.

아마도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남긴 이는 부족의 운명을 좌우할 용감한 전사나 사냥꾼은 아니었을 것이다. 끼니를 이어가기도 힘겨웠을 수렵과 채집의 시대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더구나 3D 효과를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는 호사가였던 그는 부락에서 천덕꾸러기였는지도 모른다. 재주가 많아서 따돌림까지 당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괴짜 취급만은 면치 못하지 않았을까.

기원전 540년 그리스의 이오니아 연안에서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 아이가 태어났다. 잘나가는 제사장 집안의 장손이었으나 그 아이는 자라면서 부와 권력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들이 재밌어하고 즐기는 일에 시큰둥했다. 그는 아이들과 신전에서 주사위 놀이를 즐겼는데 누군가 신성한 곳에서 무슨 짓이냐고 꾸짖으면 어리석은 정치인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훨씬 고상한 일이라고 되받았다. 그는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보는 사람이었다. 본질은 현상을 통해 드러나지만 스스로 감추려는 속성이 있다고 말했다. 결코 낡지 않는 통찰을 남겼지만 세상 사람들과 불화하며 비참하게 죽어간 그의 이름은 헤라클레이토스였다.

ⓒ한성원 그림

1970년대에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한 뒤 미국의 대학가에는 갑자기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여드름이 났으며 옷을 잘 갈아입지 않아 냄새가 나고 창백한 얼굴의 (주로) 사내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컴퓨터와 수학, 과학을 끔찍이 좋아하지만 성적 매력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너드(nerd)’라고 불렸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이 너드가 갑자기 튀어나온 별종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은 동굴에 짐승이나 별자리를 즐겨 그리고, 그리스에서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호통 치거나, 중국에서 낮잠을 자다가 자기가 나비 꿈을 꾸는 건지 나비가 자기 꿈을 꾸는 건지 헷갈렸던 바로 그 괴짜들과 같은 부류였던 것이다. 예외도 많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분석을 즐기는 냉철한 지성을 지녔으며 신체를 적대시하고 돈이나 소유에 무심한 아웃사이더였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가 권력자가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옛날에 이미 현대 물리학에 지지 않을 깨달음을 얻었던 그가 이끄는 도시국가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명품 수집가였던 허영심 많은 상인이 자기 소장품을 자랑하면서 맘에 들지 않는 물건에 침을 뱉으라고 하자 주저하지 않고 상인의 얼굴을 타구로 삼았던 노숙자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마케도니아 왕의 심복이 됐다면 세계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행성에서 명멸했지만 오직 혼자만이 어째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지 의문을 품었던, 너드의 체취를 물씬물씬 풍기는 뉴턴이 영국의 총리가 됐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그동안 현상을 타개하기에도 벅차서 (혹은 그렇다고 생각해) 이 아웃사이더들에게 세상을 바꿀 기회를 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 자신도 앞장서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보다는 주류를 비아냥대는 데 더 큰 재미를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에릭 슈미트, 피터 시얼을 비롯한 무수한 실리콘밸리 출신의 현대 너드들을 보면 그들이 전혀 권력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야심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세상에서 실천할 만한 충분한 힘(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확실히 전통적인 부자의 모습과 다르다. 골목 상권까지 다 먹어치워도 허기를 메우지 못하는 재벌을, 보통 사람들만큼이나 그들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이용해 더 많은 특권을 누리려고 발버둥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흥미라도 있는 일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 위키리크스를 만든 줄리안 어산지처럼 돈 한 푼 없어도 너드에 한없이 우호적인 인터넷 환경과 아이디어, 그리고 “재수 없는 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떠밀려 세상을 뒤흔들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본질을 보려는 자들답게 인류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빌 게이츠 같은 이들은 막대한 자금과 시스템을 결합해 인류의 영원한 숙제였던 빈곤과 질병을 극복하고자 한다. 수명을 늘려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생명의 최고 신비, 이 행성의 가장 큰 비밀인 뇌를 해독해보려는 이들도 있다. 물론 그들은 뇌의 사촌인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에도 비상한 관심을 쏟는다. 우리는 역사상 희귀하게도 권력이나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능력자가 움직이는 세상을 목격하게 생겼다.

물론 너드라고 해서 모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 출신의 억만장자 중 페이팔의 공동창업자이며 페이스북의 최초 외부 투자자이기도 한 피터 시얼은 논란이 되는 일을 많이 벌이기로 유명하다. 그가 어떤 정부의 힘도 미치지 않는 섬나라를 세우거나 새로운 화폐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은 애교에 속한다. 예전에 그가 게이라는 걸 까발렸던 인터넷 매체 〈가우커〉에 복수하려고 같은 매체에 거액의 손해배상을 걸 수 있도록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에게 돈을 대준 것으로 드러나 그는 최근 물의를 빚었다. 억만장자에 의한 언론 압살이니 제3자 소송이니 해서 사람들은 말이 많지만 그는 아주 보람찬 자선이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는 최근호 심층 보도에서 우리에게는 기억해야만 하는 너드가 또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거 같은 억만장자가 아니라 줄리안 어산지나 미국의 도감청 사실을 전 세계에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과 같은 ‘정의파’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부자 나라의 위선, 그중에서도 스위스의 일그러진 민낯을 세상에 보여준다.

기술력으로 마법을 부린 ‘시스템 가이’

2008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인 HSBC 제네바 사무실에서 고객과 미팅을 하던 이 회사 직원 에르베 팔치아니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최근 고객의 정보를 팔아넘기려고 했던 일명 알 치닥이란 인물과 동일인이 아니냐며 다그쳤다. 확신이 없었던 경찰은 다음 날 경찰에 출두하라며 그를 풀어줬는데 그는 경찰서를 나가자마자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을 데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아내와 딸은 이탈리아의 친정으로 가고 그는 부모의 고향인 프랑스 국경 도시에 웅크리고 있었다.

스위스 정부의 의뢰로 프랑스 수사대가 그를 체포해 맥북과 아이폰을 확보했다. 그때 체포에 동행한 스위스 수사관의 이목을 피해 팔치아니는 수사대에 자기가 프랑스 정부에 이로운 정보를 갖고 있다는 걸 알렸다. 그의 노트북 하드디스크에는 세금을 회피한 프랑스 국민 수천명의 이름, 계좌번호, 상담 기록이 있었다. 스위스 정부가 그의 랩톱과 아이폰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프랑스 측 담당 검사 에리크 드 몽골피에는 일축해버렸다.

2009년 2월 프랑스 니스의 한 호텔에 전문가 20명이 모여 팔치아니의 지도 아래 암호를 풀고 정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이 가기 전 세무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프랑스 국민의 계좌 3000개를 찾아냈다. 프랑스 예산장관은 ‘이름, 계좌번호, 액수까지 정확하다. 이런 정보를 얻기는 처음이다’라며 놀라워했다.

그의 컴퓨터에는 물론 프랑스인 이름만 있지 않았다. HSBC와 거래하는 전 세계 수만명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영국·이탈리아·아르헨티나·러시아·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스웨덴·벨기에·스페인·독일·인도가 프랑스에 의뢰해 자국인 거래자 명단을 받아갔다. 명단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뒤 각 나라에서는 언론에 계속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법정에서 팔치아니 리스트가 장물이란 이유로 정식 증거로 채택되기 어려워 각 나라 세무 당국은 해당자들을 압박해 조용히 세금을 걷어들이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은 팔치아니 리스트 덕분에 80억 달러의 세금을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도 팔치아니가 어떤 방법을 써서 그처럼 민감한 정보를 훔쳐냈는지 모른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에드워드 스노든처럼 팔치아니 역시 ‘시스템 가이’였다. 그는 기술력으로 마법을 부렸다. 은행 보안 시스템의 결함을 찾아내 고객 명단, 계좌번호, 액수, 그리고 은밀한 면담 기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는 전 세계 조세 회피를 박살내려는 십자군, 즉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신빙성이 부족하다. 네트워크란 상황을 과장하고 극화하기를 즐기는 그의 너드 기질이 만들어낸 가공의 단체일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프랑스 전문가가 보기에 그는 데이터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보기 드문 ‘독학파’이다.

팔치아니는 너드답게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많이 한다. 그의 변호사도 인정했듯이 유부남이면서도 줄리안 어산지만큼이나 이성관계가 복잡하고 결코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한 적도 있다. 스위스 정부는 이런 점을 활용해 그를 돈을 노린 파렴치한 산업 스파이 혹은 단순한 도둑, 그리고 정신 나간 여자 사냥꾼쯤으로 몰았다. 스위스 법원은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5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프랑스 측 담당 검사 몽골피에의 말대로 누구도 그가 세상에 내놓은 데이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순 없다. 프랑스의 모든 전문가가 인정했듯이 그가 제공한 정보는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팔치아니 본인은 사람들은 그동안 스위스 하면 초콜릿과 시계,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을 떠올렸지만 이제는 부패도 연상하지 않겠느냐며 흡족해한다. 스위스 정부와 국민은 그동안 똘똘 뭉쳐 자국의 부를 쌓자고 남의 나라의 조세 체계를 흔드는 잘못을 범해왔다. 팔치아니의 내부 고발을 통해 스위스의 뱅커들이 느슨한 국제 기준에 비춰보더라도 감옥행을 면치 못할 짓을 예사로 저지른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평범한 악에 가담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게 너드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모범이다.

참고한 자료:〈너드〉(작은씨앗), 보물섬(부키), 〈뉴요커〉, 〈이코노미스트〉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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