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차라리 모르고 살면 좋았을 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군대 시절이었다. 유격 훈련을 면제해준다는 말에 혹해서 포경수술을 받으러 갔다가 사달이 났다. “이 환자의 경우엔 성기 크기가 평균보다 작은 편이라….” 평균은 무엇이고 작다는 건 얼마나 작다는 말인가. 의무대장의 청천벽력 같은 이 한마디는 ‘이 부장’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지배한다. 이 부장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적어넣는 순서표의 제1순위는 언제나 그때 그 순간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설 〈자기 개발의 정석〉은 마흔여섯 살, 대기업 부장, 기러기 아빠라는 따분한 정체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형적인 남자 ‘이 부장’이 전립선염에 걸리면서 생긴 일을 다룬다. 이 부장은 치료 과정을 통해 기쁨을 아는 몸으로 거듭나는데, 작가 말마따나 ‘1인 포르노그래피’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소설이다.

〈자기 개발의 정석〉은 2010년 세계문학상으로 데뷔한 임성순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데뷔작 〈컨설턴트〉를 시작으로 〈문근영은 위험해〉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까지 ‘회사 3부작’을 썼다. 포경선 위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다룬 ‘블록버스터급 소설’ 〈극해〉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영화 〈챔피언〉과 〈우리 형〉의 연출부 생활을 거친 임씨는 지금도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한다.

ⓒ민음사 제공5월31일 성인용품 숍 플레져랩에서 임성순 작가(위)의 소설 <자기 개발의 정석> 북 토크쇼가 열렸다.

5월31일 소규모 북 토크쇼가 열린 공간은 성인용품 숍 ‘플레져랩’이었다. 성인용품 숍이라고 해서 음습한 공간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플레져랩에는 콘돔과 바이브레이터와 딜도가 따뜻한 조명 아래 예쁘게 놓여 있었다. 〈자기 개발의 정석〉을 놓고 이야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설 속에서 이 부장의 마흔여섯 인생에 첫 오르가슴을 선물한 자위 기구 ‘아네로스’를 실물로 볼 수도 있었다. 소설에서 “마치 작은 외계의 생명체나 기생충처럼” 보인다고 묘사된 아네로스는 사실 기구 이름이라기보다 회사명이라는, 플레져랩 사장의 친절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자기 개발의 정석〉은 미시적이고 집요하게 이 부장의 삶을 들여다본다. 임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부장은 ‘개저씨’다. 한국 사회에서 정석대로만 살아온 남자, 그래서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억압하는 사람의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이다. “외로운 날은 야근을 했고, 말할 수 없이 허한 감정이 갑자기 몰려오는 날이면 회식을 했다. 아랫것들은 도끼눈을 했지만, 상사들에게는 회사에 헌신하는 직원으로 사랑받는” 이 부장을 통해 임씨가 보여주려 했던 건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몸’이었다.

“한국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쓸 때 어떤 캐릭터가 가장 좋을까 고민했고, 억압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어떨까 싶었다. 아주 전형적인 ‘정석남’의 자기계발서 같은 삶을 해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해부도 속에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터부시하는 성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흔히 소설의 구성 단계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고 한다.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전립선염의 발병이라는 발단과 전개를 거쳐 ‘절정’에 이르고 위기 국면에서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두고 비극이냐, 희극이냐 의견이 엇갈릴 법하다. 임씨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단다. 해석은 이 책을 읽을 독자 몫이다. 참고로 기자도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