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프랑스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혈기왕성한 검사 에바 졸리는 1994년 평범해 보이는 사건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 기업 페어차일드와 프랑스 자본가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었다. 그녀는 수사를 진행하던 어느 순간 끝 모를 어둠과 마주했다는 걸 알았다. 집으로 관 모형이 배달됐고, 뒤통수에 총구가 따라붙었다. 협박을 이겨낸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프랑스 석유회사 엘프 아키텐과 프랑스의 정치인·정보기관, 그리고 가봉의 독재자 오마르 봉고가 얽혀서 돌아가는 거대한 부패 시스템의 윤곽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 각국이 독립하자 과거의 주군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60년대 가봉은 전도유망한 산유국으로 떠올랐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국내 정치 기반이 없었던 ‘친프랑스파’ 오마르 봉고는 철저하게 프랑스에 엎어졌다. 프랑스는 대통령궁과 지하터널로 연결된 병영에 공수부대원 수백명을 상주시켜 봉고를 보호했다. 프랑스 위세를 빌려 쿠데타 위험을 봉쇄하고 경쟁자를 짓밟은 봉고는 2009년 죽을 때까지 세계 최장기 재임(42년) 기록을 세웠다.

ⓒ한성원 그림

졸리 검사는 가봉이 프랑스 정계 주류와 정보기관의 거대한 비자금 저수지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프랑스 기업은 가봉의 석유와 광물에 대해 배타적 접근권을 누렸다. 프랑스 정계 엘리트는 가봉 어린이의 빵과 퀴닌(말라리아 치료약)이 되었어야 마땅한 수억 달러를 멋대로 주물렀다. 정보기관의 도덕적 해이는 극에 달했다.

추문이 있은 뒤 엘프 아키텐은 민영화를 거쳐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지만 이것은 부패의 한 갈래였을 뿐이다. 졸리 검사는 전체 그림 중 자신은 극히 일부만 봤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서류상의 흔적들은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저지 섬과 다른 몇 군데를 거치다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조세회피처가 현대적 형태의 식민 지배 도구라는 점을 알아차렸다. 지금은 오마르 봉고의 아들인 알리가 프랑스 공수부대의 호위를 받는다. 산유국으로서보다는 세계 최고의 영아 사망률을 기록하고, 1년에 고작 5㎞의 도로를 건설하는 나라로 더 유명해진 가봉의 피폐한 산하는 프랑스의 삼색 깃발을 역겹게 보이도록 만든다.

엘프 사건이 역외(off shore)의 비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프랑스는 식민지의 앞문으로 떠났다가 옆문으로 슬그머니 되돌아온 제국주의의 대표라고 할 수는 없다. 프랑스는 식민 지배에서 그랬듯 탈식민지화에서도 영국에 뒤졌다. 영국에 비하면 프랑스는 역외의 깃털에 불과하다. 영국은 역외의 유저가 아니라 운영자다. 영국이 전 세계에 퍼뜨린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공간만큼이나 비현실적 존재인 ‘시티’, 그리고 영국의 전원을 상징하는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풍경의 자치령들이 겹겹이 그물을 치고 피가 묻었거나 더럽거나 가리지 않고 세상의 눈먼 돈을 낚아채고 있다.

전 세계에는 고객의 정체를 숨겨주는 금융 비밀주의 국가가 60여 개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각국이 전비 마련을 위해 무지막지하게 증세를 하면서 유럽에서 조세회피처가 인기를 끌었다. 스위스가 1934년 고객 정보 누설을 형사처분하는 비밀주의 법을 최초로 제정했다. 제네바 은행들은 이미 18세기부터 유럽 귀족의 구린 돈을 숨겨주고 있었다. 스위스 외에, 예로부터 금융사기 수법을 개발하는 데 창의력을 발휘한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북한의 외화벌이 사업 수익이 고이는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와 벨기에, 소국인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안도라,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제도 등이 조세회피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번에 유명해진 파나마와 바하마, 케이먼 제도 등 카리브 해 연안의 조세회피처들은 주로 미국 갱단의 범죄 자금을 세탁해주기 위해 독버섯처럼 생겨났다.

그런데 이 역외의 원조가 모두 함께 덤벼들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세력이 있다. 대영제국의 영화가 결코 일장춘몽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런던의 금융가 시티를 중심으로 수레바퀴 형상으로 뭉친 영국 영향권의 역외들이다. 적어도 이 금융제국에서는 아직도 해가 지지 않는다. 그 가장 안쪽에는 영국 왕실령 3곳(저지·건지·맨 섬)이 있다. 이들은 영국의 영향 아래 있는 게 분명한데도 영국이 발뺌하기에 딱 좋은 독립성을 유지한다. 모든 의사결정권은 ‘돼지처럼 이권에 머리를 처박은’ 소수의 과두 엘리트에게 있다. 이 왕실령 세 곳에 숨은 조세회피성 자금은 1조 달러가 넘으며 이로 말미암은 연간 조세 포탈 액수는 영국의 해외 원조 예산의 3배에 달한다.

왕실령의 바깥쪽에는 영국의 해외 영토 14곳이 있다. 독립할 능력도, 의사도 없던 지역이다. 케이먼 제도, 버뮤다, 버진아일랜드, 터크스케이커스 제도, 지브롤터 등이다. 아마도 전 세계 부자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파나마 페이퍼스에 등장한 수상한 기업 20만 개 중 절반이 바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똬리를 틀고 있다. 케이먼 제도는 뉴욕 시 소재 은행 전체 수신고의 4배가 넘는 1조9000억 달러를 보유했지만 영화관은 달랑 하나뿐인 괴이한 섬이다. 이곳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소속돼 있는 영국 정보기관 Mi6이 바쁘다. 본드가 숱한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공작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준다. 그 맨 바깥쪽에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홍콩, 싱가포르, 바하마, 두바이, 아일랜드가 있다. 이 중에는 돈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 숫자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그리고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증가하고 있는 중국 옆 홍콩이 가장 많은 땀을 흘린다.

영국 영향권의 역외는 16세기 후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로부터 남의 나라 배를 약탈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던 해적과 같은 존재다. 나중에 작위까지 받은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처럼 영국 국민에게는 영웅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악랄한 무법자임에 틀림없다. 역외에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귀족 취향, 인종차별, 극우 일변도의 악취가 진동한다. 그래서일까. 역외는 전 세계 개발도상국의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악령과도 같은 존재다.

역외는 빈부 격차의 치어리더

개발도상국이 자국의 독재자와 과거의 식민 지배자, 그리고 조세회피처가 결탁한 부패 시스템에 의해 도둑맞은 액수는 얼마나 될까. 글로벌건전성(GFI) 프로그램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2006년 한 해 동안 개발도상국이 불법 금융거래로 입은 손실액은 최고 1조 달러에 달한다. 선진국의 해외 원조 총액이 연간 1000억 달러이니 부자 나라는 온갖 생색을 내면서 탁자 위로 1달러를 던져주고 탁자 밑으로 10달러를 강탈해가는 셈이다. 선진국이 빌려준 차관의 상당 액수가 역외에 고여 있는 실정인데 이는 고스란히 개발도상국 납세자가 물어야 할 빚으로 남는다.

역외의 수혜자는 독재자나 부패한 관료만이 아니다. 마약 밀매자, 테러리스트에게도 날개를 달아준다. 큰 가방 하나에 100만 달러를 숨겨 나르기에도 벅찼던 이들은 역외로 난 고속도로로 달려 나가 당당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역외를 흐르는 범죄 관련 자금은 최고 5500억 달러에 이른다. 역외는 불량 국가나 테러리스트 조직을 제재하려는 국제공조 노력을 맥 빠지게 만든다.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미국 정보기관이 블랙리스트에 올린 ‘요주의’ 인물과 단체 31곳이 모색 폰세카와 거래한 것으로 드러났다. 파리의 무고한 시민을 공격한 테러 자금 역시 역외에서 흘러나왔다. IS도, 북한의 김정은 정권도 역외가 없었다면 행동반경이 크게 위축됐을 것이다.

파나마 페이퍼스에 등장한 자들이 가장 많이 입에 담은 단어는 ‘합법’이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아마도 거짓이 아니리라는 데 있다. 세계 무역량의 절반 이상이 서류상으로나마 역외를 거친다. 물론 합법이다. 은행업과 관련한 총자산의 절반 이상과 다국적기업의 외국인 직접투자액의 3분의 1이 역외를 통과한다. 2010년 IMF의 추산에 따르면 작은 섬나라에 집중된 금융센터의 대차대조표상 자산 계정을 합치면 18조 달러, 세계 총 GDP의 3분의 1 규모다.

역외가 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각국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 액수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교육과 복지 그리고 사회간접자본에 들어갈 공공투자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소식이나 다름없다. 가난한 이들이 더욱 고통을 받으리라는 역복음이다. 대기업과 부자들이 공공연하게 역외를 드나드는 게 쉬워진다는 것은 나 같은 월급쟁이가 화낼 일이 늘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1950년대 미국 기업은 전체 소득세의 5분의 2를 부담했으나 현재 이 수치는 5분의 1로 떨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우리도 기업의 세금 부담은 크게 줄었다. 역외는 빈부 격차의 치어리더다. 역외의 번성은 세계가 점점 우울한 행성이 돼가는 가장 큰 사유다.

성 안 우물에 몰래 던져진, 페스트에 감염된 시체처럼 역외는 역내의 물을 흐린다. 역외에 가장 질기게 저항해온 미국마저 무릎을 꿇었다. 미국 연방세법은 점점 물렁해지고, 델라웨어나 네바다 주처럼 약삭빠른 주들이 역외를 능가하는 조세 회피 천국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는 노인이 조폭의 자금을 들고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비행기를 불법으로 착륙시키려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관제탑: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공군에 연락해 추락시키겠다.

노인:내 이름은 달러요. 10만 달러.

관제탑: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노인:내 이름은 20만이요.

관제탑: 발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웃자고 한 얘기겠지만 이 소설을 쓴 스웨덴의 기자 출신 요나스 요나손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점이 있다. 달러가 정체도 밝히지 않고 출입국할 수 있는 곳은 부패가 만연한 개발도상국뿐만이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관제탑의 재량권은 놀랄 만큼 커졌다. 영국 왕립국제연구소 연구원이며 역외 연구의 기념비적 존재인 니컬러스 색슨에 따르면 역외와 제대로 한판 붙으려면 그 정체를 아는 게 순서다. 파나마 페이퍼스가 자신을 겨냥한 CIA의 작품이라고 우기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파일을 폭로한 이들의 생각도 같을 것이다.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잔챙이인 파나마를 넘어 대영제국이 있다.

참고한 활자: 〈보물섬〉(부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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