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총선 막판 열기에 한창 휩싸였던 4월3일에 말 그대로 세계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앞으로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특종만큼이나 질리도록 자주 거론될 만한 큰 건이었다. 세계화 시대에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공조 취재가 절실하다는 공감을 바탕으로 1997년 설립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3년 전 이 국제 언론인 모임은 신뢰할 만한 자료를 근거로 조세회피처, 즉 역외(offshore)의 비밀을 밝히는 일련의 보고서를 내놓아 업계를 긴장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파나마의 역외 전문 로펌인 모색 폰세카의 한 고객이 회사에 조심스럽게 문의를 했다고 한다. 비밀이 새나갈 염려는 없겠느냐고. 회사는 자기네 데이터 센터가 최첨단이고 암호 알고리즘이 월드 클래스이니 조바심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바로 그 신경줄 얇은 고객의 악몽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ICIJ가 이 회사의 데이터를 탈탈 털었기 때문이다.

ⓒ한성원 그림

일명 ‘파나마 페이퍼스’라 불리는 ICIJ의 폭로 문건은 그 분량부터 압도적이다. 2.6테라바이트에 이르는 500만 개 파일 더미에는 이메일 480만 개, 이미지 100만 개, PDF 파일 200만 개, 문서 32만 장, 300만 명의 이름이 들어 있다. 모색 폰세카가 거의 40년 동안 거래한 내역이 망라돼 있다. 위키리크스가 2000년에 폭로한 미국 외교문서 분량이 ‘고작’ 1.7기가바이트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 양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짐작할 수 있다. 질적으로도 역대 최강급이다. 1차 폭로 자료에서 전·현직 대통령, 총리, 왕족 12명이 포함된 정치인·저명인사 140명이 직간접으로 관여한 해외 불량 기업의 정체가 드러났다. 벌써 아이슬란드 총리가 사임했고, 권력 기반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다.

폭로물의 양과 질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 말고도 이 파나마 페이퍼스가 세계 언론사에 기록돼야만 하는 이유는 또 있다. ICIJ에 따르면 파나마 페이퍼스는 보통의 언론 관행과는 매우 다른 과정을 거쳐 공개되었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익명의 제보자가 1년쯤 전에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 기자에게 모색 폰세카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복사한 것이 분명한 여러 꾸러미의 자료를 보내왔다. 그런데 이 언론사는 자료를 독식하지 않고 ICIJ와 공유했다. 이 단체는 각국에서 권력이나 기업과 비교적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매체와 기자를 선별해 자료를 체질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맞춤형 검색엔진을 이용해 자료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조합해내는 작업에 참여한 기자가 무려 4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이하게도 미국에서는 〈워싱턴 포스트〉도 〈뉴욕 타임스〉도 아닌 신세대 뉴스 사이트 〈샬럿 옵서버 앤드 퓨전〉이 부름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방송 해직자들이 만든 〈뉴스타파〉가 초대를 받았다. 결과는 어느 한 매체가 아니라 영국의 BBC와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등 전 세계 100여 개 언론사에 의해 일제히 공개되었다.

ICIJ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먼저 자료를 입수한 언론사가 특종 욕심을 자제하고 수많은 언론사와 공조 작업을 벌인 셈인데, 이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한 사건을 취재하는 데 전 세계 기자 400명이 참여했다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물론 한 언론사가 소화하기에는 자료의 양이 너무 많고 커버해야 하는 지역이 넓기는 했다. 상대가 막강한 재력과 유능한 변호사 부대를 거느린 국제 법률회사여서 신문사 혼자 상대하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세계화와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다면 벌어지기 힘든 일이었다.

400명이 넘는 기자들이 1년간 비밀을 지키며 공동 작업을 해온 이면에는 축적된 공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2008년 경제위기를 겪은 뒤 많은 이들이 세계경제에 뭔가 큰 문제가 생겼다고 느꼈으며, 그 문제의 복판에 역외가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 한 언론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국제 공조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나누었다.

ICIJ가 언론사와 기자를 선별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전 세계 유력 매체를 장악한 자본 자체가 조세회피처의 주요 고객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역외에 숱한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폭스뉴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매체를 거느린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이 부리는 금융 마술은 예술 수준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달러로 신고된 뉴스코퍼레이션의 이익은 1987년에 3억6436만4000달러, 1988년에 4억6446만4000달러, 1990년 2억8228만2000달러였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 정도면 정부에게든 세무 당국에게든 ‘엿 먹어라’ 하고 외치는 수준이다. 세금 액수를 정하는 권한이 국가가 아니라 납세자인 머독 자신에게 있다고 대놓고 으르렁대는 듯하다. 숫자 자체만으로도 분노를 자아내는 걸 보면 역시 머독은 보통 수완이 아니다. 뉴스코퍼레이션을 비롯해 초국적 자본에 넘어간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과 그 언론에 포섭된 논객들은 지치지도 않고 역외가 세계무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입을 놀려댄다. 약간의 양심이라도 남은 자들은 역외가 악이 분명하지만 제거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대안 불가론’을 유포하면서 얼굴을 세우려고 한다.

ICIJ는 자료 분석에 참여한 기자들의 의견을 폭넓게 구한 뒤 프로젝트 이름을 ‘파나마 페이퍼스’라고 정했다. 당사국인 파나마로서는 억울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파나마의 관료들은 “파나마는 얘기의 일부이지 주역이 아니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는 모색 폰세카 페이퍼스라고 말해야 옳다”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ICIJ가 외우기 쉽고 부르기 쉬워서만 이런 이름을 붙인 게 아니다. 역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저격 표적이 어디여야 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흔히 착각하듯 역외는 어떤 나라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망망대해의 어떤 무인도가 아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 그런 데다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돈을 맡기려고 하겠는가. 무법천지인 소말리아나 라이베리아, 혹은 내란 중인 시리아는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지경이라도 역외가 되기는 어렵다. 역외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내부 정치가 안정돼 있거나, 막강한 외부 힘에 의해 원격조종이 되는 비교적 ‘조용한’ 공간이어야 한다. 이는 역외가 결코 통제하기 불가능한 곳이 아니라는 걸 뜻한다.

‘문제는 모색 폰세카가 아니라 파나마야’

파나마는 예로부터 역외가 되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미국에는 세금을 내지 않고 돈을 감추고 싶어 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풍부하다. 운하를 끼고 있어 세금을 안 내려는 선주에게 선적을 빌려주는 사업을 하면서 역외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다. 1919년 미국의 여러 조세 규제를 회피하려는 스탠더드 오일을 돕기 위해 외국 선박들을 등록해주면서 서서히 손을 더럽히기 시작했다. 1927년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누구든 무기명으로 회사를 설립하게 하는 느슨한 법을 도입했다. 1980년대 마누엘 노리에가 시절의 군부독재하에서 콜롬비아의 마약 자금을 숨겨주면서 범죄에 무감각해졌다. 지금 파나마에는 부정직한 변호사와 은행가, 회사 설립 대리인, 회사들로 북적댄다. 항공사 기내지나 인터넷에 실린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어 수수료 1000달러만 내면 누구라도 파나마에 버젓한 회사 하나를 차릴 수 있다. 파나마 운하는 돈세탁 하수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ICIJ는 ‘문제는 모색 폰세카가 아니라 파나마야’라고 외친 셈이다. 이 회사를 설립한 모색 폰세카로 말하자면 몇 년째 인터폴 수배를 피해 다니는 범죄자가 아니다. 젊어서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성직자가 되는 대신 역외의 복음 전파자가 된 노신사이다. 그는 화요일마다 내각 회의에 참석해 대통령과 함께 파나마의 국정을 논한다. 파나마 페이퍼스에 따르면 모색 폰세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절친하며 그의 딸의 대부이기도 한 세르게이 롤더긴이 2억 달러나 되는 돈을 움직이는 걸 도왔다. 그에게는 평생 음악을 해온 예술가에게 어떻게 해서 2억 달러나 생겼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만한 일을 벌였지만, 이 장물아비나 다름없는 인물은 자국에서 존경받는 경제인이다. ICIJ는 미끼 상품으로 저명인사들을 대거 선보였지만 궁극의 저격 목표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였다.

제보자가 미국도 영국도 아닌 독일 신문에 자료를 보낸 것도 역외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역외는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잔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식민지배의 변형, 혹은 뉴버전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그러니 아무래도 식민 지배에서 뒤졌던 독일의 언론에 자료를 보내는 것이 더 안전해 보였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대개 아프리카 가봉의 오마르 봉고 대통령을 기억할 것이다. 1975년 비동맹체제가 강화되면서 아프리카 나라 다수가 북한과 가까워지자 박정희 정권은 친서방 성향의 봉고 대통령을 국빈 초청해 온 국민이 그 이름을 기억할 만큼 요란하게 환영했다. 기아차는 그의 방문을 기념해 그의 이름을 딴 차를 출시했다. 봉고 대통령은 하늘이 무심하다는 걸 잘 알려주는 인물이다. 당당한 산유국이면서도 대다수 국민이 가난을 면치 못했지만 그와 측근들은 잘 먹고 잘살았다. 2009년까지 천수를 누렸고 아들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했다.

가봉 혹은 봉고는 지금의 세계경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그 과정에서 역외가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잘 설명해주는 이름이다. 석유와 자원이 풍부하면서도 수많은 이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아프리카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식민 지배라는 음습한 토양에서 자라난 이 역외라는 ‘악의 꽃’이 세계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재벌이 한국 경제에 드리운 그림자와 신통하게 닮았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이 검찰·금융감독기관·사법부·국회·언론을 매수해 타락시키듯이, 역외는 파나마 페이퍼스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처럼 전 세계의 엘리트들에게서 도덕의식을 해제한다. 한국 세법의 변천이 ‘삼성과의 싸움’의 흔적이듯이, 전 세계 조세법의 변화는 역외와 벌이는 긴 투쟁의 증거다(다음 주에 계속).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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