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여성은 평생 자기 머리칼과 싸운다고 했는데 그건 남성도 마찬가지다. 나도 머리 가마가 두 개여서 항상 어느 쪽으로 가르마를 타야 할지 망설이곤 했다. 친한 사람들조차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고심하며 지금도 오락가락한다. 그러니 인기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가에서는 머리는 없어도 머리카락은 있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미국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대선 예비후보는 예전에 ‘백악관에 들어와서 헤어스타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비로소 알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녀는 정치 소신만큼이나 미용사를 자주 바꾼다는 비난에 시달린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예비후보도 그의 정책만큼이나 독특한 머리 모양으로 명성을 날리는 중이다. 토크쇼나 유세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머리카락을 직접 잡아당겨보고 자연산이라고 인증했지만 신통하게도 그의 머리칼은 가발처럼 두피와 불화한다.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의 진정성 없음을 보증하는 듯한 그 ‘깻잎 머리’에 치를 떤다.

정치인 못지않게 머리 모양새에 공을 들이는 이가 애플의 보스인 팀 쿡이다. 그는 박정희의 ‘상고머리’를 흉내 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이인제 의원처럼, 일부러 그의 유명한 전임자인 스티브 잡스를 기억나게 만들려고 애쓰는 듯하다.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깎고 앞머리는 자로 잰 듯 단정하게 잘랐다. 본래 게이인 데다 말수도 적어 은둔형에 가까웠던 그는 요즘 머리 스타일뿐만 아니라 언행에서도 힐러리나 트럼프에 지지 않을 만큼 정치적이 되어간다.

ⓒ한성원 그림

2월16일 테러리스트가 사용했던 아이폰을 잠금 해제해달라고 요구해온 정부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그는 사내의 조언자들과 숙의를 거듭했다. 성명에서 그는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정부에 맞서 힘을 다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방지법 통과를 저지하려고 필리버스터를 한 한국 야당 정치인의 발언이나 진배없다. 그는 그 전에 이미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비슷한 의견을 펼친 바 있다. 성명을 발표한 뒤 ‘언론 플레이’도 잊지 않았다. 〈타임〉과는 직접 인터뷰를 하고 표지를 장식했다. 정치인이 부러워할 만한 행보다.

미국 정부는 애플이 물건을 더 많이 팔려는 얄팍한 상술을 펴고 있다고 불쾌해했지만 이는 팀 쿡이 대표하는 현상을 제대로 짚은 게 아니다. 애플은 단기적인 기업 이익이나 글로벌 토대 강화만을 노려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들은 공공정책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비즈니스의 선을 넘어 권력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순수한 기업 이익 못지않게 빈부격차나 기후변화·동성애·전염병 문제에까지 관심사와 영향력의 범위를 넓혀가는 기업의 보스들을 최근에는 ‘기업 정치인(CEO Statesman)’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의 빈자를 무료로 인터넷 세계에 초대하려는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나 기후변화와 공공무역에 관심을 쏟는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그리고 프라이버시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한 팀 쿡 같은 이들이다. 이 기업 정치인의 선두 대열에는 재력이나 영향력에서 단연 앞서는 실리콘밸리의 거인들이 포진해 있다.

미국의 이 기업 정치인의 계보는 세계평화와 공공교육을 기치로 내걸었던 포드나 카네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드와 카네기가 자기 선택에 따라 공공성의 길로 간 데 비해 현대의 기업 정치인은 시대와 기업의 필요에 떠밀려가는 경향이 더 짙다. 기술만 알았지 세상을 몰랐던 실리콘밸리의 IT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쓴맛을 본 곳이 마이크로소프트다. 개인 컴퓨터 운영체제를 독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응용체제까지 잠식하다 미국 법무부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2001년 마이크로소프트가 긴 소송의 터널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뒤 실리콘밸리는 정책과 로비를 경시했다가는 큰코다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중앙정보국(CIA)의 무차별 정보 수집을 폭로한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정부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몇 달간이나 ‘협조’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타깃으로 삼았거나 혹은 나중에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 보안 기술을 쥐어짰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전력이 켕겨서인지 실리콘밸리 출신 중에서는 드물게 빌 게이츠가 정부와 애플의 싸움에서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의 기술 기업과 정부 간 안보와 보안을 둘러싼 갈등은 뿌리가 깊고 오래되었다.

최근의 기업 정치인은 외부(정부나 언론 혹은 소셜 미디어)를 상대하는 데 도가 튼 보좌관 진용을 거느린다. 그들은 미디어를 다루는 데 능란하다. 친한 기자에게 정보를 흘리고 소원한 필자는 일부러 물 먹인다.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를 애용한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쌍방 소통은 대개 사양하는 편이다. 대단하게 보였던 주류 언론을 길들이는 일도 그리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 기업 정치인은 공공 여론을 주도하는 쪽으로 서서히 진화해간다.

팀 쿡이 미국 정부와 날선 대립을 하는 사이 구글의 보스 선다 피차이는 유럽연합의 관리들에게 데이터 보안과 프라이버시, 그리고 경쟁에 관한 그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방문 중이었다. 기업인이 정치적이 되어가는 까닭은 자명하다. 재력에서나 정보 수집과 전파 능력에서 한 국가의 능력을 뛰어넘은 그들은 불가피하게 실물 권력이나 혹은 그를 대행하는 기관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규제의 장벽을 헤쳐 나가려면 정치적 힘이 필요하다.

그들은 1980년대나 1990년대를 주름잡았던 제너럴일렉트릭(GE)의 CEO 잭 웰치 같은 직업적인 경영인과는 아주 다른 유형이다.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만 족적을 남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야망이 있다. 그들의 지역구는 실로 광대하다. 페이스북 가입자는 16억명에 달한다. 중국인이나 인도인보다 많다. 아이폰에 넋을 뺏긴 이들이 10억명이 넘는다. 전 세계에서 그들보다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국가가 그리 많지 않을 지경이다. 그들은 이런 글로벌 기반을 밑천으로 대중에게 직접 다가선다. 많은 여론조사에서 사람들은 이들 기업을 정부보다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대중의 지지가 정부의 견제(혹은 탄압)를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점을 잘 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과 정보기관의 대결은 FBI가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면서 소를 취하함으로써 싱겁게 끝이 났다. 아마도 이 싸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술적으로는, 한쪽에서 막으면 한쪽에서 뚫으면서 군비 경쟁만큼이나 치열하고 끈질기게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양쪽의 공방은 어느 쪽이 승자가 될 것인가와는 상관없는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대규모 감시의 유혹에서 벗어난 권력은 없다

우선 도대체 지금 정보기관의 사생활 침해 수준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스노든의 폭로를 도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글렌 그린월드 기자가 쓴 책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에 따르면 사생활 침해가 걱정된다면 구글이나 페이스북조차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지금 지구상에서 대규모 감시의 유혹에서 벗어난 권력은 없다고 봐야 한다. 시민 봉기로 무너진 이집트·시리아·리비아에서는 서양의 IT 회사에서 구입한 대규모 국민 감시 장치가 예외 없이 발견되었다. 문제는 미국이나 유럽이라고 해서 상황이 별로 낫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번에 FBI는 특별히 저항하기 힘든 사례를 골라 치밀하게 애플을 공략한 혐의가 짙다. 보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정보기관에게 마지막 남은 장애물이 애플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FBI는 애플에 원격으로 휴대전화를 검색할 수 있는 열쇠도 요구했는데 그렇다면 삼성 갤럭시폰을 비롯한 기타 등등은 모두 뚫었다는 뜻일까.

미국의 여론은 의회나 법원이 중간에서 합리적인 조정을 해주리라 기대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아마도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진행될 기술 발전 속도를 법원이나 의회가 따라잡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곧 기업과 정보기관은 법원이나 의회의 통제 밖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런 기술 우위의 시대에 국가는 과연 권위를 지킬 수 있을까. 얼마 뒤 뽑힐 지역구 국회의원보다도 다국적기업의 기업 정치인이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모른다. 그들은 선출된 권력보다 더 공공선에 관심이 많고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들이 가진 기술이 정부를 압도한다면 그들은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가 될까.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정보를 통제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눈길을 우리 사회로 돌려보면 기업이 국가를 넘어설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걸 알게 된다. IT업계에서 기업 정치인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후보는 카카오톡을 만든 이석우씨 정도였다. 그는 지금 자기 회사를 떠나 중앙일보미디어그룹 조인스 공동대표로 ‘피신’해 있다. 2014년 정부의 감청 기도에 맞서 애플보다는 훨씬 미약한 저항을 시도했던 카카오톡(지금의 다음카카오)은 그 뒤 군사독재 시절 눈 밖에 난 재벌 기업만큼이나 모진 수모를 당했다. 이석우 대표는 신상을 탈탈 털렸으며 그해 겨울 아동청소년법 위반 혐의로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세무조사를 받은 다음카카오는 지난해 10월 검찰의 수사협조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통신사 설비에 감청 장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준비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이 법을 무력화할지 모른다고 우려할 필요는 없다. 이제 대한민국에는 빈부격차나 기후변화 같은 공공의 이익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할 간 큰 기업인은 없다.

그러고 보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차라리 정치권으로 옮기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IT업계의 개척기에 창의력을 발휘했으며 지금 가장 큰 논란의 중심이 된 보안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 그가 업계에 있었다면 어차피 기업 정치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보다도 더한 정치의 쓴맛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2대8 가르마에 공천 갈등 속에서 맥없이 바닥에 밀려 넘어지는 안철수 대표의 모습이 결국 우리의 자화상 아니던가.

참고 자료:〈타임〉 〈이코노미스트〉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 〈인디펜던트〉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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