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창밖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월간 일정표에는 표시된 일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보고를 하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법원 판결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위원장으로 복귀했지만 직원들은 아무도 그를 위원장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어딘가로 보고되고 있었다. 2010년 김정헌 당시 위원장을 찾아갔을 때의 풍경이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여정부 시절 임명된 문체부 산하단체 기관장들을 대거 ‘숙청’할 때 민중미술협의회 출신인 그는 첫 번째 대상이었다. 해임된 후 법원에 해임처분효력정지 신청을 한 그는 복직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지위는 있되 업무 권한은 없는 위원장’으로 별관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는 예술위의 잘못된 행정을 대신 사과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을 ‘행정 미술’이라고 불렀다.

1980년 오윤·임옥상 등과 함께 현실 참여 작가들의 동인인 ‘현실과 발언’을 만든 김 전 위원장은 한국 민중미술의 1세대 작가다. 작품에 여백과 위트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민중미술 작가들과 결이 좀 다르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3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그림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가 12년 만에 여는 개인전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4월10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1970~80년대 대표작들과 최신작 30여 점이 이번에 전시된다.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인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12년 만에 개인전을 연다.

세월호부터 ‘여혐’까지…그림으로 그린 사회사

김 전 위원장은 흔히 홍성담 작가와 비교된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철거되어 이슈가 된 ‘세월오월’을 그렸던 홍 작가가 좀 더 직접적으로 현실을 고발하고 발언한다면, 그는 현실에 대해 발언하되 한 발짝 떨어져서 보고 한 템포 늦춰서 발언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그런 관조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무책임한 위정자를 빗댄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이나 세월호 참사를 검은 바다 위에 밝은 창이 잠겨 있는 모습으로 그린 ‘희망도 슬프다’를 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 내세우지 않고 천천히 유추하도록 하는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이번 전시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림으로 그린 사회사’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세월호 참사부터 한인 징용자들에 대한 고려 없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일본 하시마 섬(군함도) 문제, 그리고 최근 횡행하는 ‘꼰대’ 남성들의 ‘여혐 현상’까지 우리 사회의 굵직한 사건과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화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작품과 관련해 김 전 위원장은 “화가에게 그림이란 세상을 향한 끝없는 지껄임이다. 신경림 시인이 그림을 보고서는 내 그림에 구시렁거림이 많다고 했다. 그림은 단순한데 하는 말은 많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결정적인 한 장면으로 표현해내려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림이 단순하다고 해서 담긴 생각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림이 그려지기까지 복잡한 형상화 과정이 있다. 관객들이 그림을 볼 때 그런 과정을 유추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읽어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림의 완성은 관객들의 몫”이라는 곁들임과 함께.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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