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새누리당은 어떻게 매번 선거에서 이길까


‘윤상현’ 막말 구출 작전?


여야 양당 구도에서 대구·경북, 야당에 쏠렸다


바둑보다 복잡한 정치

 

3당 합당 이후 처음 실시된 1992년 총선에서 대구·경북은 32석 중 10석이 통일국민당과 무소속에게 돌아갔다. 부산 출신 김영삼(YS)계가 민정계 인사들을 대폭 물갈이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정통 야당 계열이 아니었다. 4년 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여당인 신한국당은 대구·경북에서 32석 중 단 13석만을 얻고 참패했다. 역시 반(反)YS 정서 때문이었다. 당시 정통 야당 계열로 등장한 첫 번째 당선자가 안동갑 권오을 의원(통합민주당)이다.

15대 총선은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의 야권 분열 속에서 진행됐다. 이기택 총재의 통합민주당 공천을 받은 기호 3번 권오을 후보는 신한국당 김길홍 후보를 상대로 6.6%포인트 차이의 승리를 거두었다. 김 후보는 재선 현역이었지만 혈연을 중시하는 안동에서 본관이 의성이었던 점이 약점이었다. 안동 출신인 권 후보는 1991년에도 이기택 총재의 ‘꼬마 민주당’으로 경북도의원에 당선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통 야권이 분열하면서 정통 야당 출신 당선자가 배출된 것이다.

이후 지금의 야당에게 대구·경북은 철옹성이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김중권(봉화·울진) 후보가 19표 차로 석패한 것이 최고 성적표였다. 17대 총선 때도 여당인 열린우리당 간판을 달고 추병직 전 건설교통부 차관이 구미을에 나섰지만 40.3% 득표에 그치고 말았다. 2005년 10월 대구 동구을 재선거에는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4전5기에 나섰으나 44% 득표율로 패배하고 만다. 18대 총선 때는 출마 후보가 27개 선거구에 단 6명뿐이었고 득표율도 모두 한 자릿수였다.

ⓒ시사IN 이명익2014년 6·4 지방선거에 출마한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는 수성갑 지역에서 50.1%를 득표했다.

2012년 19대 총선 때 경기도 군포의 3선 출신 김부겸 의원이 대구 수성갑으로 옮겨 40.4%를 득표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대구·경북에서 20% 이상 득표한 야당 후보가 총 7명이나 되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성과는 과거 13~15대 당시 광주·전남에 출마한 여당 후보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됐던 일이다. 오히려 이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전국적인 야권 연대를 완성함으로써 그 반작용으로 대구·경북의 여권 지지층이 결집했다. 대구·경북 27석 전석을 새누리당이 차지한 것이다. 이렇듯 16대부터 19대까지 여야 양자 구도 속에서 선거전이 펼쳐졌을 때 대구·경북의 당선자 쏠림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17·19대는 대부분이 여당이었고 18대는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였다.

김부겸 전 의원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대구시장에 출마해 40.3%의 득표율을 올렸다. 특히 그는 자신이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던 수성갑에서 50.1%를 득표해 46.7% 득표율에 그친 권영진 당선자를 제쳤다. 이는 한 달 뒤 전남 순천·곡성의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선된 것만큼이나 값진 일이었다. 수성갑이 대구의 강남으로 일컬어질 만큼 의사·교사 등 전문직이 많이 살고 30~40대가 전체 인구의 45.3%를 차지하는 젊고 진보적인 동네인 것도 있지만, “이제는 야당을 허용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라는 게 가장 큰 변화 요인이다.

야당의 영남 지역주의 도전사는 3당 합당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1992년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 32.2%를 얻고 첫 번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김대중(DJ)의 정계 은퇴 후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 간판을 달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한다. 선거 초반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수위를 달리는 등 지역주의 구도가 와해되는 듯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러나 지역 할거주의가 부활하고 ‘야권 연대’가 가시화되자 위기를 느낀 부산시민들이 민자당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당시 DJ는 지방선거를 앞둔 1995년 봄 영국에서 돌아와 정계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당 전남지사 후보 경선에서 DJ가 지지한 김성훈 중앙대 교수가 패배하고 허경만 전 국회부의장이 승리하는 이변이 발생한다. DJ는 필승 카드로 서울시장 후보에 조순 전 경제부총리, 경기지사 후보에 이종찬 전 의원을 추천했으나 당권을 쥐고 있던 이기택 총재는 경기지사 후보에 자파인 장경우 전 의원을 고집했다. 3전4기를 통해 마지막 대선을 준비하려던 DJ는 최후 승부수를 띄웠고 그것이 바로 ‘지역등권론’이었다. ‘호남+충청 연합론’으로 불리는 지역등권론은 꺼져가던 지역주의 구도에 불을 지폈다.

호남에서 DJ가 지역등권론으로 지역주의에 불을 붙였다면 충청도에선 JP가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화답했다. 1995년 2월9일 민자당을 쫓겨나듯이 탈당한 JP는 한 달 남짓 만에 자민련을 창당하고 지방선거전에 뛰어들었다. JP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연합뉴스15대 총선과 16대 총선에서 TK 지역에 출마했던 권오을(왼쪽)·김중권 후보.

김부겸의 세 번째 도전은 어떻게 될까

‘지역등권론’과 ‘핫바지론’이 한데 어울려 자민련은 지방선거에서 충청 지역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충청권 시장·도지사 3석 전석과 기초단체장 31석 중 21석을 석권했다. 국회 의석이 20석이던 자민련은 강원지사까지 승리하면서 창당 두 달 만에 전통의 민주당(당시 의석 97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은 부분적으로 야권 연대에 합의했다. 자민련은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않았고 민주당은 강원지사 후보를 사퇴시켜 양당의 공조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34년 만에 부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야당은 압승했다. 15개 시장·도지사 중 야당이 8석을 차지했고 무소속 당선자도 둘이나 나왔다. 여당인 민자당은 5석에 그쳤다. 기초단체장 230석 중 민주당과 자민련이 107석, 민자당은 70석에 머물렀다.

문제는 역풍이었다. 야권 공조에 반발하는 역풍이 YS의 안방인 부산을 강타했다. 노무현 후보는 ‘5공 청문회 스타’로 얻은 명성에 힘입어 “이번 선거는 정당보다 인물을 뽑아야 합니다”라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선거판은 갈수록 3김 정치의 부활로 이어졌다. 노 후보는 결국 37.6% 득표에 그치며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한 신문사에 기고문을 보내 “역사의 주인인 국민 대중을 졸(卒)로 보고 수단으로 여기는 등권론, 정치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긋지긋한 지역대결 구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지역등권론이다”라며 DJ를 정면 비판했다.

1992년과 1995년 야권 통합과 연대 분위기 속에 부산을 공략한 노무현 후보는 모두 실패했다. 이에 자극받은 보수층 결집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6년 기호 3번 통합민주당으로 출마한 권오을 후보는 대구·경북에서 당선됐다.

4월13일 김부겸의 세 번째 도전은 어떻게 될까. ‘인물’ 경쟁력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선거 구도다. 전통적 보수층의 결집을 막고 ‘야권을 허용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수도권과 달리, 아마도 야권 연대의 규모가 대구·경북 공략에 분수령이 될 공산이 크다. 최근의 여론조사 지표는 참고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자명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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