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명은 ‘희망가’. 하지만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되는 가사는 들리지 않는다. 손풍금(아코디언)으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어르신 7명이 서산생활문화센터 4번 동아리방에서 함께 연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매주 월요일 저녁에 모여 이렇게 연습한다. 일주일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다.

“다시 해, 다시! 손을 보지 마. 손가락에 눈이 달려 있어야지. 눈으로 보면 안 돼! 그리고 스타카토로 탁탁 끊어서 해야 맛이 나.” 모임의 리더는 특별히 없지만 가장 연주 실력이 좋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연주를 이끈다. 색소폰을 20년 넘게 분 덕분에 악기에 익숙한 한 어르신이 하나하나 지적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연습을 거든다.

이 손풍금 동아리의 회원인 권선주 할아버지는 올해 여든이다.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이 동아리 회원의 평균연령은 일흔다섯 정도다. 매주 빠지지 않고 연습실을 찾는다는 권 할아버지는 “문화센터나 학원에서도 이렇게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끼리 연습하니까 재미있다. 서로 들어주고 충고해주면서 연습하니 흥이 난다”라고 말했다.

ⓒ쥬스컴퍼니 제공서산 생활문화센터.

충남 서산생활문화센터에는 이 손풍금 동아리 외에도 동아리가 많다. 연주 동아리, 미술 동아리 등 다양한 취미 동아리가 있다. 연령대도 폭이 넓다. 여러 동아리가 각자 연습을 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공간이 배치되어 있어서 교류도 활발하다. 자연스레 다른 동아리 활동도 접하게 되니 취미의 영역이 넓어진다. 센터에 간이 무대가 마련되어 수시로 발표회도 열 수 있다. 어른들을 위한 ‘동아리 연합회’인 셈이다.

서산문화센터는 문화융성위원회가 지역문화진흥법을 통해 지원하는 곳이다. 정부는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전국 70여 곳에 생활문화센터를 조성했다. 박근혜 정부의 생활문화센터 육성정책은 눈여겨볼 만하다. 풀뿌리 문화생활의 거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문화센터는 동호회 활동이나 문화 자원봉사와 같은 생활문화의 형성과 확산의 거점으로 육성하는 곳이다. 이런 생활문화센터는 주민공동체 공간·주민자율 공간 같은 의무공간과 공동체 카페·레지던시 등 권장공간으로 구성된다. 농촌 지역과 도시 지역에서 각자 상황에 맞게 운영한다.

생활문화센터는 그동안의 정부 문화정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지금까지의 문화정책은 시설 투자 위주였다. 지자체마다 문화전당을 설립했지만 운영 프로그램이 부실해 ‘하드웨어만 그럴듯하고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비난을 듣곤 했다. 심지어 7000억여 원을 들여 건립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마저 프로그램 부실이 지적될 정도다.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생활문화센터 사업은 건물을 신축하지 않고 리모델링으로 시설을 마련한다. 폐교나 노후한 문화시설 같은 유휴 공간을 도서관·공연장·연습실 등으로 개조해서 사용한다. 전북 고창군은 판소리전수관을, 경북 상주시는 자전거박물관으로 이용하던 시설을 생활문화센터로 리모델링했다. 동인천역 부근에 위치한 송현시장에는 북카페형 생활문화센터 ‘솔마루사랑방’이 들어섰다. 부산의 두송생활문화센터는 3년 동안 문을 닫고 방치하던 목욕탕을 리모델링해 영화 상영이 가능한 공간으로 변신시켰고, 경기도 양주의 777레지던스는 문 닫은 모텔을 미술 기반의 생활문화센터로 만들었다.

ⓒ쥬스컴퍼니 제공정부는 전국 70여 곳에 생활문화센터를 조성했다. 지역 동호회 활동이나 문화 자원봉사가 이뤄지는 거점 역할을 한다. 위는 부산 두송생활문화센터

전국 네트워크로 센터끼리 교류 활동하기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던 폐교도 생활문화센터로 거듭나고 있다. 15년 동안 사용되지 않던 폐교를 리모델링한 경남 거창군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센터 개관식에는 이 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하성단노을합창단’이 개관 공연을 하고 주민들이 직접 쓴 시가 시화로 제작되어 전시되었다.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를 운영하는 거창군농업회의소 김훈규 사무국장은 “지역 어르신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 고심하다 이런 센터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추진했다. 다문화 가정의 이주 여성들이 공동체 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다문화 여성 난타 동아리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생활문화센터의 특징은 운영 주체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경기도 수원의 청년문화창작소는 청년들이 직접 운영한다. 청년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센터를 24시간 열어둔다. 또 다른 특징은 이용료가 저렴하다는 점이다. 지난해 5월 개관한 대구의 대덕문화전당 내 생활문화센터는 대관료가 1시간에 1000원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생활문화센터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지역의 문화회관 프로그램은 백화점 문화센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 문화 강좌 위주였다. 하지만 생활문화센터는 동아리 같은 자율적인 활동에 최적화되어 있다. 저렴하게 공간을 대여해 동아리 활동을 하기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생활문화 동아리들이 센터에 둥지를 틀었다. 음악 동아리만 해도 손풍금 외에 우쿨렐레·오카리나·만돌린과 같은 악기 연주단이 여럿 만들어지는 식이다.

ⓒ쥬스컴퍼니 제공거창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

센터에는 흥미로운 동아리들이 많이 있다. 전북 지역에는 농업기술센터 연수 중 결성된 여성 농업인 훌라춤 동호회 ‘알라하훌라’가 있다. 이 동아리는 지난해 제2회 남원 춘향춤 대회에서 2위를 하기도 했다. 대나무가 유명한 전남 담양 지역에는 대나무로 만든 타악기를 연주하는 난타 공연단이 있다. 서울 지역에는 어른을 위한 레고 동호회(브릭마스터)나 캘리그래피 동호회(붓놀이패) 등 취미 활동과 관련된 동아리가 많다.

생활문화센터는 센터에서 활동하는 동아리들이 재능기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그래서 센터 이용자들이 취미로 익힌 재능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전북 지역 동아리 ‘꽃천지’가 대표적이다. 버려지는 스타킹을 재활용해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는 동아리인데, 지역에서 청소년 교육 활동과 아동 체험 활동을 지원한다.

이런 생활문화센터 사업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을 받는 까닭에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 있다.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센터끼리의 교류 활동도 늘고 있다. 대구의 생활문화센터와 거창군 하성단노을생활문화센터는 ‘도농 교류전’을 기획 중이다. 거창의 동아리들은 대구 공연장에서 발표회를 하고 대구의 동아리들은 거창에서 연수를 하는 식이다. 매년 전국의 생활문화 동아리들을 모아 ‘전국생활문화제’라는 발표회를 연다. 지난해에는 10월24~25일 양일간 북서울꿈의숲에서 열렸는데, 많은 동아리들이 그동안 익힌 재능을 뽐냈다.

물론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센터도 많다. 아직 ‘생활문화센터가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모르겠다’는 주민도 많고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센터 운영자들끼리 모여서 생각을 공유하는 네트워크 모임이 자주 열린다. 지난해 11월에는 시도별로 ‘지역 공감캠프’를 열고 지역별 활동 경험을 나눴다. 설 연휴 직전인 2월2일에는 문화역서울 284 RTO에서 전국의 센터 운영자들이 모여 생활문화센터의 성과와 과제를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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