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28일자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 기자회견문’(이하 합의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합의문이었다. 합의문 1142자 중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읽으면서 가장 굵게 박히는 단어가 ‘침묵’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합의문 발표 직후 “우리의 아이나 손자, 그리고 그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해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당연하다. 그는 합의문을 쉽게 풀어서 설명했을 뿐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합의문이 무효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합의문은 범죄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중의 범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조직적인 전시 강간 범죄이고, 다른 하나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 죄를 망각했다는 범죄다. 많은 이가 일본 정부에 첫 번째 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이번 합의문에 대해서도 일본군에 의한 전시 강간 범죄를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전부일까? 합의문은 망각이라는 두 번째 범죄를 노골적으로 다시 실행하려 하고 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국내 거주자 최초로 본인이 위안부였음을 증언했을 때, 세상은 위안부라는 조직적 강간 시스템 자체의 잔혹함에도 놀랐지만, 그 피해자들이 전쟁이 끝나고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해왔다는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전(前) 위안부 여성들은 피해의 경험을 ‘내 자신의 치욕’으로 받아들이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살아왔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경우도 빈번했다(이 망각의 범죄에서 한국 사회 역시 공범이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1991년 망각의 범죄에 균열이 갔던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위안부가 아니다”라는 피해자의 절규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사회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1990년 11월 결성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청취하고 기록하는 노력 속에서 등장했다. 이 조사와 호소를 바탕으로 비로소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자와 듣는 자의 공동 작업이다.

망각하지 않고 소녀상 옆에서 다시 말하고, 다시 들어야 할 때

합의문은 이 공동 작업의 중지를 요구한다. 할머니들의 의사 한번 물어보지 않고 핵무기를 해체하듯 불가역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한다. 사과의 진정성, 배상 방식의 적절성을 논하기 이전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회를 닫아버리는 합의문의 내용은 망각의 범죄 그 자체다.

무엇보다 합의문 중 ‘소녀상’ 이전이 언급된 것은 처참하다. 소녀상은 2011년 12월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1000차까지 이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매주 수요일 할머니들은 일본 대사관 앞에 모였고, 초라한 마이크 하나에 의지해 일본과 세상에 이야기를 전했다. 그 수요일이 1000번이 되던 날 세워진 소녀상.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를 고발하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할머니들이 이야기해온 시간과 공간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치우란다.

비참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결국 다시 말하고, 다시 들어야 할 것이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으로 끝났다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듣는 ‘관계’를 이어가는 것. 망각의 범죄에 공범이 되지 않는 길이다(이 글은 우에노 지즈코의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에서 도움받았음을 밝힙니다).

기자명 임재성 (평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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