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중량급’ 인사다. 비슷한 경력의 인물들이 대형 로펌 등으로 들어가 거액의 ‘전관예우’를 받거나 제도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골몰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김병준 교수는 자못 색다른 행보를 보인다. 작은 민간 연구소(사회디자인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원탁회의’라는 이름의 생활정치 운동을 하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근본적 개혁’과 심지어 ‘혁명’을 주장하며 제도 정치권 전체를 비판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시사IN 이명익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해 “생명을 다했다”라고 주장하며 근본적 개혁을 역설해왔다.
심각한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경제 문제만 봐도 그렇다. 기업의 투자 환경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 기술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예전엔 특정 기술에 기반한 생산설비(공장)를 10년 동안 만든 다음, 제품을 생산해도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공장을 짓는 동안 새로운 기술이 나와버린다. 더욱이 원자재 가격의 변동이 매우 심하다. 기업으로서는 ‘아차’ 하는 순간에 엄청난 손해를 보고 좀비 기업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 섣불리 투자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가가 나서서 투자 위험을 줄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그런 결정을 못하고 있다.

‘제조업 왕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고용 문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수출 제조업 중심인 현재의 산업구조로는 고용이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모든 나라가 제조업을 강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비싼 인건비 때문에 제조업이 약했다. 그런데 지금은 수출 상품의 가격에서 인건비 못지않게 에너지 비용의 비중이 크다. 미국은 셰일오일 등으로 인해 에너지 비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디자인 부문에서 세계 최강이라 미국의 제조업 육성이 매우 수월해질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도 지난 금융위기 이후 제조업 강국인 독일 경제만 잘나가는 것을 보면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바이 프랑스(프랑스 제품 사기)’ 운동 등을 벌이면서 제조업 강화에 골몰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서방 선진국들의 제조업 부문이 강화되면 한국 경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겠다.
더욱 충격적인 트렌드가 있다. 중국이 추진 중인 ‘차이나 인사이드’ 정책이다. ‘부품 등의 중간재를 중국에서 만들자’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부품 같은 중간재를 수출해왔던 한국으로서는 치명적이다. 최근엔 한국이 중국에서 부품을 수입하는 상황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산업 기반이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속수무책이다.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고, 후발 주자의 추격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그래서 다른 국가들이 못하는 새로운 산업을 계속 일으켜야 하는 거다. 그러려면 돈(자본)과 노동력이 신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은 겁이 나서 새로운 부문으로 투자되지 못한다. 노동력도 다른 회사로 옮겨가지 못한다. 다니던 회사에서 일단 나와버리면 다른 기업에 취업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엔 비교적 탄탄한 사회안전망이 있다. 후한 실업급여와 국가가 지원하는 재교육 시스템 등이다. 그래서 실업자들이 재교육을 통해 신산업 부문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한 다음 새로 취업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엔 그런 여유가 없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절대 ‘잘리면’ 안 되고, 그래서 ‘내가 망한다면 회사도 같이 망하자’는 식으로 가게 되는 거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조선업 위기 등의 충격이 실제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사회안전망을 갖출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실업률이 낮다고 하는데, 착시에 불과하다. 한국의 실업자들이 ‘실업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고 자영업 쪽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자영업으로 들어간 사람 중 대다수가 수년 내에 망해서 거리에 나앉는다. 사회적 위험이 계속 커지고 있는 거다. 이에 비해 서방 선진국들은 실업자들이 복지체제 덕분에 ‘실업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 사회적 위험에 대한 그나마의 ‘쿠션’이 있다는 의미다.

그 ‘쿠션’, 즉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려면 세금을 제대로 걷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징세도 어렵다.
그렇다. 한국의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조세부담률이 서방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부가 나서서 어떻게든 증세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여야 불문하고 정치인 중 누구도 ‘세금을 더 걷자’고 말하지 못한다. 정말 ‘비겁한 정치’다.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에게 ‘뭔가 해드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돈으로 해드리겠다’는 부분은 숨긴다. 지금도 여야가 치열하게 싸우고, 심지어 같은 진영 내에서도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누가 이기든 한국의 비겁한 정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 선생이 〈성호사설〉에 썼다. “백성들은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보다 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고 하여 못 본 체한다. 또 한다고 해봐야 지엽적인 일일 뿐 근본은 건드리지 않는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쇳덩이를 집어넣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야 할 판에 불에다 쇠를 집어넣어 결만 두들기는 대장장이 일이나 하고 있다.” 요즘 정치권과 뭐가 다른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증세 없는 복지’를 내걸었다. 위는 2012년 12월4일 텔레비전 토론.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면서 기존 예산 중 불필요한 곳에 쓰이는 돈을 줄여서 복지에 쓰겠다고 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경험에 비춰볼 때 현실성 있는 이야기였나?
인기 발언이었을 뿐이다. 모든 정부 지출에는 그만한 사연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물론 예산 장부만 보면 ‘이것저것 줄이자’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행하려면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과단성이 필요하다. 오히려 증세보다 더 힘들다. 내가 정부에 있을 때 ‘양여금’ 개혁을 시도했다. 주세 등으로 걷은 세금을 지방정부에 배분하는 제도다. 당시 규모가 연간 3조5000억원 정도였다. 지자체들은 이 돈을 주로 도로 사업에 썼다. 당시 청와대는 ‘이미 지방도로들이 잘 깔려 있으니 양여금을 도로에만 쓸 이유가 없다. 그러니 돈은 그대로 지방정부에 배분하되, 도로에 사용되는 양여금 형태가 아니라 지역균형개발기금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자체장이 자기 지역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라는 취지였다. 물론 도로에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방 토건업자와 행정자치부 관료들을 중심으로 엄청난 반발이 터져나왔다. 양여금으로 지정해서 주던 돈을 단지 지자체장이 알아서 쓰라고 한 것에 불과한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인데, 기존 재정에서 몇십조원을 줄여서 복지에 쓴다고?

비겁한 정치에서는 야권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컨대 제주 해군기지는 당초 노무현 정부가 기획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사회적 반발이 나타나자, ‘노무현 정신 계승’을 주장하던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이 반대에 나섰다. 제주 해군기지 자체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정당이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은가?
제주 해군기지의 최종 결정자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섣불리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중국과 일본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언제나 한반도가 희생자로 전락해왔다. 방어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방 예산이 최근 10년 사이 5~6배 늘었고, 센카쿠나 이어도를 둘러싼 분쟁의 기운이 역력했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당시를 검토해보니 제주도 및 한반도 남동해안에 분쟁의 포커스가 맞춰졌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제주도에 군사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구상’이었다. 동북아의 모든 나라가 민족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한국만 분단되어 남북이 다투고 있다. 그러므로 서해안에 평화지대를 설치해 남북 간 마찰을 줄이는 한편 제주도의 군사기지로 방어력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열린우리당도 어찌되었건 받아들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해군기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문제들을 검토하지 않았을까. 다 알면서도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갖고 표 얻으러 다니는 정당이라면 적어도 그의 이런 고민 정도는 소화하고 있어야 했다. 반대하려면, 노무현의 구상을 뛰어넘는 동북아 구상을 내놓아야 했다. 별 생각 없이 지내다가 다시 아무 대안 없이 반대하는 비겁한 정치를 해온 것이다. 시민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속이고 있다.

진보 진영에서는 군부독재 (계승) 세력과 재벌 등 특권 집단을 타도하면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특권 집단은 도처에 있고 이해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혀, 한국 사회의 개혁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는 듯하다.
특권 집단은 곳곳에 다 있다. 예컨대 한국의 거대 노조들은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폐해를 ‘자본’ 측에만 돌려버린다. ‘자본가, 너희들이 돈을 안 줘서 그렇다’는 것인데, 사실 기업 처지에서는 노동비용으로 얼마 이상 쓸 수 없다는 나름의 제한선이 있다. 그 돈을 대기업 노동자들이 다 가져가버리니, 하청기업으로 내려갈수록 노동자들의 소득이 빈약해지는 측면이 있다. 노동운동 차원에서 이런 점을 감안해서 서로 소통하고 임금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중 노동시장이다. 교수인 내 입장에서 볼 때 대학도 말이 안 된다. 시간강사들이 정교수들보다 훨씬 많이 강의하고 학생들의 평가도 좋은데, 왜 보수는 정교수의 5분의 1 내지 10분의 1에 불과한가. 이런 부조리에 대해 우리 사회의 누가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정의’롭지 않다. 그러나 비겁한 정치는 손쉬운 것에만 덤벼든다. 한쪽은 재벌 이야기만 하고, 다른 쪽은 노조만 잡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양측에 모두 문제가 있다.

분배를 강조해온 진보 진영 역시 그런 ‘부정의한  분배’에 책임이 크다는 얘기 같다.
분배에는 1차 분배(임금과 이윤)가 있고 2차 분배(복지제도를 통한 분배)가 있다. 1차 분배가 정의롭지 못하게 왜곡되어 있는데, 이에 따른 격차를 2차 분배로 어떻게 메운단 말인가. 예컨대 ‘시간강사 월급을 정부가 메워줘라. 그러나 세금은 못 내겠다’고 하면, 도대체 정부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재벌과 부유층이 책임지면 되지 않는가(웃음).
결국 우리 시민들 사이에서 오가는 소통의 수준, 담론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국민이 변해야 하고, 이게 제일 기본이다. 시민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한국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스스로 절감해야 한다. 특히 ‘고장난 차’와 같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분들이 나서야 한다.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퇴직자들, 아예 편입되지도 못하는 청년들, 영세 자영업자들, 노동자의 50%에 해당하는, 1년에 2100시간이나 일하고도 월 200만원도 받지 못하는 분들…. 이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혼자서 비판하고 혼자서 욕하고 술 마실 일이 아니라 어디가 잘못됐는지 분석하고 찾아나가야 한다.

경기가 좋아지면, 그분들의 형편도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경기가 좋아지면, 기업들은 그 돈으로 자동화·기계화·전산화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나부터 A4 용지를 문방구에서 안 산 지가 10년 넘었다. 동네 문방구에 가서 한 상자에 2만5000원 주고 들고 와야 하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1만8000~1만9000원에 배달해준다. 경기가 좋아져도 청년들 취직 안 된다. 경기가 좋아져도 재래시장이나 소자영업자들이 돈을 많이 벌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경기가 좋아지길 막연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의 산업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심하는 것이 낫다.

ⓒ연합뉴스제주 해군기지(위)는 노무현 정부의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몸담았던 당은 후에 이를 반대했다.

결국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진행 중인 원탁회의 운동에 그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가?
밑으로부터의 담론 수준을 높여가자는 취지다. 한국에 지방의회가 있지만, 아직 시민들의 뜻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모순된 구조를 바꾸려면 단지 지방의회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라리 뜻있는 시민들이 모여서 동등한 자격으로 토론하는 원탁회의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지자체에 전달하는 방식은 어떨까? 예를 들어, 보육 문제면 엄마들 200~300명이 모여서 토론하고, 구청의 보육예산에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 투표로 결정해서 구의회와 구청장에게 제안하는 거다. 실제로 해보니 사람들 생각이 바뀌더라. 엄마들이 모이면 처음엔 언론에 많이 보도되거나 구청에서 중시하는 사안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한두 시간 이야기하고 나면 기조가 바뀐다. 이 같은 일종의 시민의회가 전국적 차원에서 사이버 공간에 구현되고, 이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이 공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되면 사회적 의제를 바꿀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혁명이다. 안철수 의원이 말하는 새정치는 인물 교체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왠지 제도권 정치와는 점점 더 거리를 두는 듯하다.
그래도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참여정부에 들어가면서부터 낙담하기 시작했고 이후 지금까지 십수 년을 고민해왔는데….

낙담?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도 낙담했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 “권력은 시장으로 갔다”, 퇴임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정치하지 말라” 등의 발언들…. 모두 낙담의 표현이다. 싸우고 또 싸우면서 정치를 해왔지만 남은 것은 실패의 흔적뿐이고, 그 때문에 괴롭다는 심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치 지도자로서의 노무현은 그때 이미 죽었다. 생물학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수사 때문에 죽은 것이겠지만,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는 한국의 거버넌스(국가운영 및 의사결정 구조)에 이미 낙담하고 죽었던 거다. 지금 노무현의 간판을 들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의 수준을 알아야 한다. 시민들에게 ‘내가 권력을 가지면 뭐든지 해드리겠다’고 약속하지 마라. 그 권력은 양날의 칼이다. 손잡이도 없는 칼이다. 휘두르는 순간 자신의 몸이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그 칼은 자신의 뱃속까지 파고든다. 이 권력이 노무현을 비롯한 모든 대통령들의 숙명이다. 모두가 그 권력을 쥐겠다고, 권력을 쥐면 국민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시민에게 인내와 양보를 요구해야 할 정치인이 ‘해주겠다’고만 한다. 리더는 사라지고, 표를 따라다니는 팔로어(follower)만 남았다. 이게 답답하다. 오히려 뭔가 변화시키려면 그 과정에서 국민에게 피해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 이에 대한 인내도 감히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고통과 인내를 넘으면 비로소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꿈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노무현의 좌절과 죽음의 의미부터 제대로 읽어내기 바란다. 그 의미로부터 새로운 거버넌스 구조와 국가경영 체제와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고장난 차는 수리해야 하는 거다. 수리도 하지 않은 채 잘 몰아보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노무현 이전’으로 퇴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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