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안철수 소동을 보자니 현장에 나가서 취재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예전에 정치부 기자를 꽤 오래 했는데 그때는 엉뚱하게 밥값 생각을 많이 했다. 연말에 예결위를 앞두면 국회 의원회관은 불야성이 됐다. 상임위별로 의원과 비서들이 수백조원에 달하는 정부 예산을 결산하고 심의하느라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어떤 의원은 자기 손끝에서 국민의 세금 수조원이 왔다 갔다 한다는 생각을 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고도 했다. 의원회관으로 밥과 야식을 나르는 배달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낮에는 회관 복도가 북새통이었다. 각 부처 유관 부서 공무원들이 자료를 한 보따리씩 들고 와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자기 차례가 오기만 기다렸다. 이렇게 바깥 밥을 먹으며 한 달 넘게 난리를 피우다 결말은 여당의 날치기로 허망하게 맺어지기 일쑤였다. 그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국정에 눈곱만큼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때 네 밥값 내 밥값 할 것 없이 참 아까웠다. 그럴 거면 차라리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시간이나 가질 일이지.

일상의 취재도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민정계, 상도동계, 동교동계, JP계, 허주(김윤환 전 의원의 아호)계, 당권파, 비당권파, 주류, 비주류, 중도파, 관망파, TK, PK 등등. 정치인 각자가 어떤 의정 활동을 하는지보다는 그들이 속한 대규모나 중간 규모의 그룹이 어느 집단과 이합집산을 벌이는지가 정치부 기자가 파악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자면 그들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누구 덕에 정치에 입문했는지, 지금은 누구와 밥이나 술을 자주 먹는지 알아야 했다. 오랫동안 피를 말려가며, 선배들이 ‘정치공학’이라고 부르는 그런 이상한 기사를 참 많이도 썼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단 한 꼭지도 없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 정치에서는 언제나 내용보다는 틀이 강력하고 중요했다.

ⓒ한성원 그림

안철수 탈당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그와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야 하는 수많은 기자들의 밥값, 기름값, 무엇보다도 젊은 그들의 시간이 아깝다. 미안하지만 내가 전에 썼던 수많은 정치 기사들이 그랬듯이 이번 일과 관련한 기사들이 갈 곳 역시 쓰레기통밖에 없다. 친노, 비노, 친안, 호남, 비호남, 수도권, 개혁, 혁신 따위 어휘로 범벅이 된 그 기사들에 생명력이란 없다. 나는 기사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문재인과 안철수가 왜 헤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관심도 없다. 시사에 민감해야 하는 내가 이럴진대 다른 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야권의 갈등을 부추기고 분열에 환호작약하는 종편과 그들의 모기업과 같은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보려는 게 아니다. 저쪽에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자기가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르는 것 같은 분도 있지 않은가.

따져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본래가 유명한 분들이었고 최근까지도 기사가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나는 문재인 대표나 안철수 의원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선 역사의식부터 잘 모르겠다. 시차가 있기는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이승만과 박정희 묘소에 참배했다. 두 전직 대통령이 공도 있고 과도 있으니 이제는 모두 잊고 화합하자는 뜻이라고 얼추 두 분이 더듬더듬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두 전직 대통령 모두 헌정을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했으며, 권력형 살인을 저질렀고,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게 방해했으며, 국토의 분단에서 집권 연장의 동력을 얻었으므로 지금 헌법 아래서는 적어도 국립묘지에 누워 있을 자격이 없다는 내 생각과는 크게 다른 것은 알겠다. 그렇더라도 두 전직 대통령의 공과에 매기는 점수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대하는 태도로 구분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걸 서로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에겐 언제나 너무나 중요한 문제인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부터, 교황도 지대한 관심을 갖는 빈부격차 문제, 기후변화, 그리고 반핵, 반원전, 급속한 노령화와 출산 장려 및 이민 대책, 동성결혼 합법화 등에 관한 소신 또한 알 수가 없다. 물론 미국·중국·러시아 등과의 대외관계에 어떤 자세를 취할지도 알 길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확인한다면 굳이 세 싸움을 벌이지 않더라도 서로 같이 갈 수 있는지 아닌지 금세 알 수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두 사람은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와 독일 기독민주당의 메르켈 총리만큼 서로 다를 수 있다.

하물며 르펜이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도 ‘무슨 짓’을 할지 아는데…

나는 프랑스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르펜이 대통령이 된다면 인류 역사가 또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르펜을 보면 감탄스러운 점이 있다. 그녀는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어떤 정책을 펼칠지 명확하게 밝히고 그걸로 승부하는 인물이다. 정권 교체가 아니라 자기의 소신을 관철하려는 게 목표다. 오히려 그녀를 상대하는 기성 정당들이 후보 단일화니 뭐니 하며 정치공학에 몰두한다. 그녀가 대통령이 되면 프랑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수천㎞ 떨어진 곳에 있는 나 같은 사람도 안다. 단순하다. 프랑스는 유럽 통합 이전으로 돌아간다. 파리지앵은 다시 프랑화를 쓰게 된다. 경제 운용권과 이민자에 대한 통제권 등을 유럽연합에서 찾아오게 된다. 마린 르펜은 그걸 주권 회복이라고 부른다. 두 번 이혼한 경력이 있어서 그녀의 아버지인 국민전선의 창시자 장마리 르펜과 달리 전통 기독교 사상과 거리를 두며 낙태에도 관대하다.

종교와 인종차별에 민감한 프랑스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자기 견해를 쏟아낸다. 언론과 지식인의 공격에 위축되지 않는다. 자기와 생각은 같으면서도 입으로는 인권 옹호의 화신인 양 떠드는 기성 정당을 비웃는다. 그런 점에서는 미국의 공화당 예비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도 비슷하다. 그 역시 언론이 미국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게 맞느냐며, 언론의 십자포화에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공영방송에서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명랑하게 외쳐대는 우리와는 달리 ‘해피 홀리데이스’ 정도로 만족하는, 겉보기보다 다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이 큰 미국 사회에서 그는 무슬림을 입국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대충 알게 됐을 것이다.

나는 문재인 대표나 안철수 의원이 마린 르펜이나 도널드 트럼프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아직 공권력에 의한 검열에서조차 놓여나지 못한 언론 자유 부족 국가다. 당연히 자기 검열이라는 더 질긴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내란 음모는 무죄인데 내란 선동은 유죄일 수 있는 나라다. 결국 입을 잘못 놀렸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고 정당이 해산되는 걸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걸 용인한 정당의 지도자들이 언론의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공중파 방송의 낙하산 사장들은 일 잘하던 기자와 PD를 쫓아내거나 안 보이는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이게 국가에 의한 검열이 아니고 뭔가. 나는 이승만 정권 이래 내내 권력과 극우 언론이 뿌려놓은 반공 광신이 언론 자유의 목을 조여왔으며 그로 인해 정치판이 일그러지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펴는 정치인은 반드시 용공·친북이라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치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틀을 놓고 치고받는 게 정치의 전부가 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알맹이가 빈약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종편의 히스테리 정도에도 맞설 만한 내용 있는 정치인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며칠 전 내가 강의하는 대학에 나붙은 대자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 김수영 시인이 50년도 더 전에 쓴 시 ‘김일성 만세’를 필사해놓은 것이었다. 이 시를 학교 직원이 철거해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고려대를 비롯한 서울 시내 대학 곳곳에 이 시가 나붙게 되었다. 거의 두 세대가 지난 지금에도 이 시가 젊은 가슴을 울린다는 점이 놀랍다. 우리 문단이, 아니 사회가 이처럼 위대한 시인을 가졌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다만 가난과 고독, 거기에 수모까지 곁들이는 걸 지식인의 숙명으로 알고 살았던 시인의 깊은 고뇌가 지금에 와서도 무지한 손에 의해 훼손된다는 게 부끄럽다.

“‘김일성 만세’/ 한국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 시인은 이 시를 1960년 10월6일에 탈고했다. 4·19 혁명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는 이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목을 조르던 악몽 같은 괴물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 같다. 그것은 반공이고, 멸공이었다. 시인은 이 괴물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자기에게 제1회 시인협회상이란 영광을 안겨준 조지훈 시인(심사위원이었다)을 끌어들여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서열과 인맥을 중시하는 한국 문단에서 그는 분명 자유인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67년 이어령씨와의 저 유명한 순수문학 논쟁에서 더욱 다듬어졌다. 그는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문학의 위기는, 문화를 정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데서 생기는 게 아니고 문화를 파시즘과 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데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수영 평전〉을 쓴 최하림 시인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쉽게 해독되지 않는 가장 어렵고 테제로서의 품격과 강도를 갖는’ 그의 독특한 시론을 완성했다.

그는 말했다. 시작은 머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학생들이 내용이 없는 이 세계에서 이 시에 온몸으로 감응했으며 그것은 시인만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제 야권은 어쩌면 좋으냐고 묻는데 이제라도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고 밖에다 외치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들이 르펜이나 트럼프보다 못나지 않았다는 걸 믿으라고.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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