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작년에 준공된 아시아 문화전당, 개관까지 1년 걸린 사연

문화전당이 개관하기까지

 

11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건설비용만 총 7000억원이 넘게 투입되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복합문화시설(연면적 16만1237㎡ 규모로 연면적 13만7255㎡인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12만8000㎡인 예술의전당을 압도한다)로 등극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문화전당) 개관식에 오지 않은 것이다. 행사에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개막식에 참석했으나 정쟁만 남기고 갔다. 문 대표는 문화전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철학이 담긴 사업이라고 강조했지만 같이 온 천정배·주승용 등 이 지역 정치인들은 그를 성토하기에 바빴다.

이는 문화전당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옛 전남도청 건물과 그 일대를 재개발해 건축한 문화전당은 2006년 기본 설계가 이뤄지고 2008년 착공해서 2014년 10월 말 준공되었다. 사업비 5조3000억원(국비 2조8000억원, 민간 자본 1조7000억원, 시비 800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문화 사업이다. 그런데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준공되고도 개관까지 1년이나 걸렸다. 도대체 문화전당 개관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연합뉴스11월25일 황교안 국무총리 등이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개관식에 참석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설 사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지난 2004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이 구성된 후 문화전당 사업은 2010년 개관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그랬던 것이 2012년으로 연기되었고 다시 연기에 연기가 거듭됐다. 좌초할 뻔한 이 사업은 문재인 대표를 비롯해 야당 의원들의 끈질긴 요구로 명맥을 유지했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직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법인화 계획을 발표했다. 광주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문화전당 지원을 줄이려는 꼼수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광주가 지역구인 새정치민주연합 박혜자 의원 등이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5년 한시적으로 국립기관으로 운영하고 연 800억원의 운영비를 지원받는 내용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특별법’이 지난 3월 통과되었다. 특별법을 받아준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우파 성향 누리꾼들의 집중 공격을 받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문화전당 사업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이 사업 관련 법안을 대표적인 당리당략의 산물로 꼽았다. “매년 800억 이상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아시아문화전당같이 자신들이 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빅딜해서 통과시키면서, 민생과 일자리 창출 법안은 몇 회기에 걸쳐서도 통과시켜주지 않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역행하는 것이다.”

ⓒ아시아문화전당 제공위는 문화전당 전경.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문화전당은 개관식부터 우왕좌왕했다. 11월25일이 공식 개관이었지만 실질적인 개관은 9월4일이었다. 예술극장이 개관 레퍼토리를 시작했고 다른 3개 원(문화정보원·문화창조원·어린이문화원)도 각기 개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시설물이 완공되지 않은 민주평화교류원만 빠졌다(11월15일 완공). 5개 원 중에서 4개 원이 개관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도 문화전당은 ‘부분 개관’을 강조했다. 반면 공식 개관인 11월25일에는 문화창조원 전시가 새로 시작하는 것 말고는 주목할 만한 행사가 없었다.

문화전당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창작·제작 위주의 복합문화시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좀 애매하다.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공연장도 아니고,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처럼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아니다. 살펴본 시민들의 반응도 ‘무엇을 하려는 곳인지 모르겠다’는 쪽이 대부분이었다. 광주에 대형 문화시설이 들어선 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은 시민들도 있었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평이 더 많았다.

언론의 평가도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평가가 많았고 개관 공연은 맥락이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혹평을 모아보면 이렇다. “예술극장의 개관 레퍼토리는 유럽에서 최근 화제가 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주류였고, 어린이문화원은 방한 공연을 주로 하던 외국 공연단을 끌어모았다. 또 정보 아카이빙(저장·관리) 사업을 주로 하는 문화정보원은 수집이 용이한 1945년 이후 자료만 모으고 있었고, 예술감독이 바뀌며 내홍을 겪은 문화창조원은 전시의 맥락이 없다.”

ⓒ시사IN 조남진 문화전당의 실질적인 개관일은 9월4일이었다. 문화창조원(위)도 이때 개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모든 문제가 집합된 곳

문화전당 개관은 당초 예정보다 5년이나 늦춰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졸속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을까. 문화전당 사업이 진행된 과정을 아는 사람들은 ‘예고된 문화 참사’라고 규정한다. 졸속 문화행정의 문제, 문화 리더의 부재, 문화예술계 파벌 싸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소외 등 한국 문화예술계의 모든 문제가 집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화전당 개관을 앞두고 일어난 일은 ‘피의 숙청’이었다. 9월4일 부분 개관은 전체 지휘자인 예술총감독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다. 콘텐츠를 총괄하는 위치인 아시아문화개발원(현재 아시아문화원으로 개편) 최종만 원장은 뇌물수수 혐의로 사퇴한 상황이었다. 문화창조원 예술감독을 맡았던 이영철 계원예술대 교수와 전시감독을 맡았던 미술평론가 성완경씨는 부분 개관을 앞두고 해임되었다. 방선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 직무대리는 부분 개관 한 달 전에야 임명되었다. 파벌 싸움도 치열해서 계원예대 라인이라느니, 한예종 라인이라느니, 홍익대 라인이라느니 말이 무성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자주 바뀐다. 문화전당 초기 기획에 관여한 공무원과 문화예술인 중 지금까지 계속 일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손발이 되어야 할 직원들이 대부분 ‘해고 예정’ 상태에서 개관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문화전당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 구성한 아시아문화전당이 하드웨어를 운영하고 아시아문화원(옛 아시아문화개발원)이 소프트웨어를 기획하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아시아문화원의 규모가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축소되어 아시아문화개발원에서 일하던 직원들 대부분이 고용 승계가 되지 않았다.

정부는 아시아문화원 정원을 96명으로 확정했다. 추진단은 200명 정도를 요구했는데 그 절반 수준이다. 애초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연구용역을 주어 산출한 필요 인력은 400명이 넘는 규모였다. 96명 중에서도 56명만 먼저 채용이 확정되었는데 이 중 개관을 준비해온 아시아문화개발원 출신은 17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직 구조도 문제다. 문화전당이 중앙정부 직속기관이 되면서 전체적으로 조직 간 유기성과 기획의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영철 예술총감독이 사퇴한 이후 총감독 제도가 사실상 사라지면서 5개 원은 개별화되었다. 애초에 문화전당이 설계될 때에는 민주평화교류원이 외부와 교류하고, 여기서 찾아낸 주제를 문화정보원이 연구하고, 이를 문화창조원이 작품화해서, 예술극장이 무대에 올린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본 문화전당 5개 원은 완벽한 ‘따로국밥’이었다. 협업은 없었고 모든 원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각개약진 중이었다. 부분 개관의 수많은 프로젝트 가운데 이런 협업 모형을 구현한 것은 문화창조원과 문화정보원이 작업한 〈이곳, 저곳, 모든 곳:유라시아의 도시〉전 정도였다.

ⓒ시사IN 조남진개관 기념전인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위) 기획은 독일의 안젤름 프랑케 큐레이터가 맡았다.

문화전당은 김선정(문화정보원)·김성희(예술극장)·목진요(문화창조원)·김혁진(어린이문화원) 등 예술감독 4명을 두고 있다. 이들은 함께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자신들이 잘하는 것을 문화전당에 구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제 다원예술 축제 ‘페스티벌 봄’의 예술감독 출신인 김성희 예술감독은 유럽의 퍼포먼스를 주로 들여왔고, 2010년 미디어시티서울 예술감독과 2011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을 맡았던 김선정 예술감독은 미디어 자료 위주 수집물을 전시했다. 역시 미디어아트 전문가인 목진요 예술감독은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전시로 문화창조원 개관전을 준비했다. 모든학교체험학습연구소 연구위원 출신인 김혁진 예술감독은 어린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예술감독들이 자기 전문 분야의 프로그램을 준비했기 때문에 각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높았다. 어떤 공연이나 퍼포먼스도 시도해볼 수 있는 넓은 공연장이 있고 아티스트들을 1등석에 태우고 올 만큼 자본도 충분했다. 세계적 비엔날레에서 조명받았던 작가나 차이밍량,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등 아시아 출신의 감독들 작품도 공연되었다. 그러나 전체를 꿰뚫는 맥락은 없었다. 예술감독들은 그럴듯한 전시와 공연의 판을 깔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이것저것 막 끌어다 차린 문화 뷔페로 여겨졌다.

깊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그램을 구성하다 보니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우리 또는 아시아의 눈이 아닌 서구의 눈으로 아시아를 재해석한다는 점이다. 예술극장에서는 ‘세계 공연예술의 대모’로 꼽히는 벨기에 출신 예술기획자 프리 라이젠에게 개관 첫 시즌의 주력 코너 ‘아워마스터’를 맡겼다. 프리 라이젠은 애초 예술극장 예술감독으로 선임될 예정이었던 인물이다. 아시아 출신 기획자 5인이 기획한 ‘아시아 윈도’도 진행하지만 라이젠의 명성에 묻혔다.

문화창조원도 마찬가지다. 문화창조원은 독일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 시각영상부문 수석 큐레이터인 안젤름 프랑케에게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라는 개관 기념전 기획을 맡겼다.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전은 전통적인 가치와 근대적 환경이 충돌한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을 재해석했다. 문화정보원도 지난 4월 ‘2015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비전포럼’에서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 대학 명예교수를 초빙해 기조 발제를 부탁했다.

이런 구조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개관까지 10년을 허송세월한 문화부가 예술감독에게 개관 프로그램을 일임하고 그 예술감독은 다시 서구 기획자들에게 핵심 프로그램을 내맡겨버린 양상이다. 이를 두고 광주의 한 문화기획자는 “왜 예술감독들이 아시아를 알기 위해 유럽으로만 출장을 가는지 모르겠다. 왜 아시아에 대해 유럽의 문화예술인들하고만 토론하는가”라고 비꼬았다.

‘광주’라는 장소의 상징성을 망각하다

또 한 가지, ‘광주’라는 장소의 상징성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광주를 너무 내세우는 것도 굴레가 될 수 있지만 부분 개관 프로그램부터 광주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문화전당이 들어선 자리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 주변이라는 사실도 환기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문화전당 조성 사업에 관계했던 한 인사는 “문화전당의 힘은 ‘광주’ 혹은 ‘구 전남도청’이라는 장소성에서 나온다. 민주화 과정의 성장통을 경험한 아시아 나라들에 광주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문화전당이 운영되리라는 점이다. 애초 문화전당은 창작·제작 센터를 표방했다. 그런데 이번 부분 개관·정식 개관 프로그램 중에 순수 창작 작품은 거의 없다. 앞으로도 창작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력 구성이 대관 위주로 운영되는 예술의전당에 맞춰 소규모로 짜였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이렇게 큰 문화예술 잔치판이 펼쳐졌는데 정작 지자체나 이 지역 문화예술 단체들은 겉도는 모습이다. 내부 프로그램은 모두 문화전당 측에서 주도한 가운데 문화전당 광장이나 야외무대에서 하는 시민무대 정도를 광주의 문화예술 단체들이 맡았다. 광주광역시는 개관에 즈음해서야 문화전당 주변에서 거리문화축제를 여는 등 개관 효과를 확산시키기 위한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문화부는 아시아문화전당추진단과 전남도 그리고 광주광역시가 정례협의회를 구성해 월 1회 회의를 한다고 밝혔지만 협력의 밀도는 낮아 보인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이 기획될 때의 방점은 광주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래서 광주를 5개의 권역으로 나누고 각각의 발전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다른 사업들은 유명무실화하고 문화전당 위주로만 사업이 추진되었다. 문화전당은 열린 공간을 표방하고 있지만 관람객이 가장 많을 일요일에는 개관하지 않는다. 이런 난센스는 문화전당이 지자체가 아닌 중앙정부 아래 편제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문화전당에서 일할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출신 중에는 단 1명만이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다. 광주 지역의 한 젊은 기획자는 “모두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문제를 얘기한다. 심지어 그곳에서 일하거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연수를 하는 등 혜택을 입었던 사람들도 욕을 한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들이고 수많은 문화예술 전문가들이 모여서 이 정도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의 문화적 수준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문화전당의 핵심 취지는 문화예술을 통해 아시아와 소통하겠다는 것이다. 확인된 것은 소통의 부재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행정가와 예술가가, 정치와 예술이 대립하고 있는 양상이다. 심지어 문화전당 안의 각 원도 서로 불통이다. 문화전당이 진정한 아시아의 문화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문화전당이 개관하기까지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 후보 ‘광주문화수도 육성’ 공약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 “광주를 아시아문화예술의 메카로 만들겠다” 발표
2004년 3월 문화중심도시 조성추진기획단 발족. 9월 문화전당 건립 부지를 전남도청 일원으로 확정
2005년 12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설계 당선작으로 재미 건축가 우규승의 ‘빛의 숲’ 발표 및 착공 선포식 개최
 

ⓒ광주전남사진기자단2005년 12월7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착공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축사를 하고 있다.

2006년 8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아특법)’ 국회 통과
2007년 10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종합계획이 대통령 승인을 받아 문화전당 건설 종합계획으로 확정
2008년 6월 문화전당 건립 기공식.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에서 옛 전남도청 별관 보존 요구. 관련 단체가 공동 대책위를 구성하고 천막농성 돌입. 12월부터 공사 일시 중지
2009년 2월 일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천막농성 해제 후 공사 재개. 6월에 광주시장 및 광주 지역 국회의원 등이 10인대책위원회 결성. 9월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10인대책위가 도청 별관을 부분 보전하기로 합의
2010년 12월 전남도청 별관 보전 방식 최종안 확정(원래 문화전당 개관은 2010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음)
2011년 12월 문화전당 콘텐츠를 개발할 아시아문화개발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개원(이영철 계원대 교수, 초대 원장에 임명)
2012년 5월 문화전당 공사 현장을 시민에게 처음으로 공개(문화전당 개관이 2012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공사 지체로 재연기)
2013년 4월 정부가 문화전당을 법인화하겠다고 발표하자 광주의 시민사회단체와 정치인들이 강력 반발. 6월에 계원대 이영철 교수를 전시감독으로, 계원대 김성희 교수를 공연감독으로 임명. 10월에 문화전당 5개 원의 세부 운영 계획 공개
2014년 1월 박혜자 의원이 문화전당의 운영 주체를 국가 소속 기관으로 하는 ‘아특법 개정안’ 발의. 예술감독 3명 추가 위촉(황지우·김선정·김혁진). 11월에 문화전당 4개 원 완공
2015년 3월 ‘아특법 개정안’ 국회 통과. 9월4일 부분 개관
2015년 11월 전체 개관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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