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경국 변호사는 교육 전문 변호사로 통한다. 크고 작은 학교폭력 사건을 비롯해,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가 해임된 전교조 교사에 대한 변론을 맡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하는 남편이자 아빠이기도 하다. 아내와 가사 분담을 철저히 하고, 아이들에게 입시경쟁을 위한 사교육은 시키지 않는다는 그의 철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12월1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kr)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인 아들 둘을 키우는 아빠다.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나는 내 나이 또래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사람 중 하나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일류고·일류대 모델을 따를 생각이 없다. 일류고·일류대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들 학교가 결과라면 모를까, 이를 목표 삼아 아이들을 꾸역꾸역 밀어붙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부모는 나를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당신들이 워낙 배운 게 없었기에 배움에 한이 맺혀 있었다고 할까. 그 결과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게 아이를 잘 키우는 거라 생각하셨던 듯하다. 기대에 어긋나면 말로 상처도 많이 주셨다. 그에 비하면 우리 세대는 나름 학력에 대한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난 세대라 할 수 있다. 빵이 충족되고 나면 민주주의를 찾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나 할까. 학력에 대한 갈망이 채워지면 플러스알파 내지 그 너머의 것을 희구하게 되는 것 같다. 부족한 자격이지만 이런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섰다.

ⓒ시사IN 윤무영교육 전문 변호사로 통하는 탁경국 변호사는 “아이를 잘 키우려면 부모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탁 변호사가 육아와 가사를 아내와 철저히 분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본래 우리 사회 중간층에 관심이 많다. 그간 교육운동을 지켜보면서 늘 아쉬웠던 게 어떤 제도나 사회 흐름을 선도해가는 건 상류층이요, 그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건 기존 주류적 질서에 반감을 갖고 있는 비주류층이라는 점이었다. 양극단의 대립이 심해지다 보니 중간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정책의 포커스도 맞춰지지 않고 있는 듯했다. 주류나 비주류, 보수나 진보 양극단은 공교육에 대해 다 같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얼마 전에도 한 진보 논객이 ‘학교의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칼럼을 쓴 것을 보고 착잡했다. 그런데 공교육이란 게 사회 중간층에 안정감과 신뢰를 주지 못하면 갈 데가 없다. 중간층 또한 아직까지는 공교육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필사적인 ‘경쟁’과 ‘교육’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쟁 교육이 성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격차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미국에서 출간된 〈승자독식사회〉는 20년 뒤 한국에서 벌어질 일을 미리 예측하고 쓴 것처럼 보일 정도다. 1등이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버리고, 꼴등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사회안전망도 없이 방치되는 승자독식사회. 이것이 ‘자살률 1위’ 국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경쟁을 줄이려면 격차를 줄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거대한 격차가 지속되는 한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경쟁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 전문가들은 동의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적 성취가 사회적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는 이상 경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같은 서울대 법대 출신은 살아가는 데 유리한 점이 많다. 대학에 합격한 순간 동네에 플래카드가 붙는 것은 기본이요, 사람들도 ‘서울법대 나왔으니 남들보다 잘 알겠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나를 대한다. 학벌은 내부적으로도 긍정적 효과가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모아놓으면 선의의 경쟁이 벌어진다. ‘내가 별게 아니구나’ 싶어지면서 자꾸 뭔가 배우려 한다.

반면 부정적 효과도 만만치 않다. 내 경우 법대 동기가 270명이었는데, 개중에는 영화나 철학을 하고 싶었지만 출신 고교나 집안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법대 진학을 강요받은 친구들도 있었다. 법대에 온 이상 이들 대부분은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한 해 졸업자 270명 중 합격자는 평균 100명 수준. 법대 입학 성적이 탁월했던 친구들이 사시에 빨리 합격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만 보면 법대 아닌 다른 쪽에 자질이 많은 친구들이 시험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친구들이 일반 회사에 취직하면 면접 때 흔하게 듣는 말이 “당신은 서울법대 나와서 왜 고시 안 보고 여길 왔어?” 하는 것이다. 늘 목에 힘주고 다니던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삶이 풀리지 않고 잘나가는 친구들과 비교 대상이 되면 얼마나 상처를 받는 줄 아는가. 신문에 나진 않았지만 서울대 법대생 중 매년 한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존감 상실에 따른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결국 일류대가 우리를 구원할 확률은 2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학벌을 좇을 때는 이런 양면을 보고 선택하시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인다?

학벌 경쟁에서 사교육은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흔히 “흙수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흙수저일 뿐”이라고 하는데,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사교육 효과 때문에 대학을 간 건지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많다. 반면 체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기 공부를 할 시간이 줄어드는 등 사교육의 폐해는 만만치 않다. 그런 만큼 사교육을 선택할 때 알뜰족이 되시기를 바란다. 다른 물건을 구매할 때는 이것저것 다 따지면서 사교육과 관련해서는 왜 학원이 내세우는 불안 마케팅에 이리저리 휘둘리나.

사회 전반적으로 평가의 룰이 정량적 평가에서 정성적 평가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수시로 학생을 뽑는 대학이 증가하면서 수능 1, 2점을 다투는 것은 무의미해지고 있다. 사법연수원 성적으로 법관을 임용하던 관행 또한 마찬가지다. 사법연수생 실력은 거기서 거기다. 시험 당일의 컨디션 또는 내가 잘 아는 분야에서 문제가 출제됐느냐 아니냐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다. 법조 일원화에 따라 임용 관행이 바뀌고 사법고시도 로스쿨로 대체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다. 이런 변화를 상류층이 주도한다고 반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과거 방식으로 회귀한다고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면 그 방향으로 제도를 정착시키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영훈국제중이나 하나고에서 선발 의혹이 불거진 것처럼 정성적 평가에는 늘 공정성 시비가 따라붙는다. 양궁 국가대표를 뽑을 때면 아무리 간판스타라 해도 프리미엄을 주는 법이 없다고 한다. 설사 번개가 쳐서 선수가 활을 떨어뜨리는 상황이 벌어져도 아무도 ‘천재지변에 의한 사고니 다시 기회를 주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정성적 평가에도 이런 공정성이 필요하다. 대신 공정성이 확보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격차가 너무 크면 평가 잣대가 아무리 공정해도 경쟁을 줄이지 못한다.

ⓒ연합뉴스탁 변호사는 학교폭력 당사자들의 공통점으로 ‘부모와 대화가 안 되는 아이들’을 꼽았다. 위는 3월3일 한 학교 앞에서 학교폭력 예방 관련 자료를 나눠주고 있는 경찰 관계자들의 모습.

우리 부부도 아이를 키우면서 시행착오를 숱하게 겪었다. 맞벌이다 보니 서로 머리 맞대고 고민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확실한 믿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아이를 잘 키우려면 부모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폭력 등 교육문제 전문 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수많은 부모·학생을 만나고 교사들과도 많은 대화를 하게 되는데, 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인다”라는 것이다. 공동육아 어린이집 이사장을 맡게 돼 어린이집 운영에 깊숙이 간여하는 동안 내가 느낀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결국 부모가 좋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아이를 타의 귀감이 되게 기르는 지름길인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이 때문에 작은 실천에서라도 배려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평화로운 대화가 이뤄지는 가정이야말로 기초가 튼튼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기에. 부부간 협업도 중요하다. 맞벌이가 대부분인 오늘날, 왜 육아와 가사를 아내가 전담하며 일방적 희생을 치러야 하나. 우리 부부도 처음부터 협업이 잘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신혼 초 명절을 맞아 시골집에 내려갔는데, 늘 그랬듯 여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남자들은 그 음식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그사이 아내는 부엌일을 하는 한편 아직 갓난아이였던 큰애까지 돌봐야 했다. 그날 저녁 당구를 치고 집에 돌아온 남자들이 “여자들도 술 한잔 하자”라고 불렀더니 아내가 “저는 조상을 모시러 온 거지 남자들을 모시러 여기 온 것이 아니다”라며 대뜸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며느리 잘못 들였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아내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관행을 따라한 것이 누군가에겐 엄청난 상처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내와 계속 부딪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이후 육아와 가사는 철저히 분담하는 체제를 갖추려 노력했다. 이를테면 우리 집에서 아침상을 차리는 것은 무조건 내 몫이다. 대신 아내는 저녁을 책임진다. 내가 늦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다행히 내가 군대 취사병 출신이라 반찬의 기본은 그때 다 배웠다(웃음). 맛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해주는 것도 즐겁다(그가 쓴 책 제목 〈계란찜 아빠, 꼬막 남편〉은 그가 잘하는 요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기득권을 내려놓으니 아내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아내 표정이 좋아지니 내 얼굴 또한 밝아지고 아이들도 훨씬 여유로웠다. 밝은 표정으로 좋은 말이 오가면 대화도 더 자주 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서로 무슨 일이 있는지 잘 알게 되면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더 잘 알게 된다. 가정이건 사회건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힘들 때 위로해주는 공동체 또한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분위기라면 학교폭력도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 학교폭력의 가해자건 피해자건 공통점은 부모와 대화가 안 되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부모가 권위적이어서건 여유가 없어 아이를 방치해서건 부모·자녀가 터놓고 대화를 하지 못하기에 뒤늦게 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폭력이 걱정되는 부모라면 아이가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공부에 대한 동기는 ‘꿈’에서 나온다

아이를 키우면서 또 한 가지 염두에 둔 것은 아이 스스로 꿈을 찾을 수 있게끔 여유를 주고, 부모는 보조적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첫애는 수학 쪽에 약간의 천재 기질을 보인다. 아이가 커가면서 친구 부모들로부터 “학원을 함께 보내자”는 제안도 들어오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이 스스로 꿈을 찾기 전에 학원에 보내고픈 마음이 없다. 아이는 항공과학에 흥미가 많다. 끈기도 대단해서 종이상자와 노끈만으로 장장 6개월에 걸쳐 일본 무사 갑옷을 만든 일도 있다. 이런 아이가 어떻게 꿈을 찾아 나갈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다. 이렇게 자기 적성을 찾고 꿈을 갖게 되면 좁은 의미든, 넓은 의미든 공부를 하고 싶은 동기도 훨씬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 어릴 적에는 조기 경쟁교육으로 힘을 다 빼놓고,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나면 지쳐 나가떨어져 버린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오죽하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같은 단체가 학원 교습시간을 제한해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주자고 제안하고 나섰겠나. 결국 격차를 좁혀 경쟁을 줄이고 공정성을 확보하게끔 교육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것만이 우리 모두가 살길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탁경국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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