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 설악산에 다녀왔다. 큰 산에 가면 몇 달 먹을 마음의 양식이 생긴다는 걸 알면서도 길 떠나기가 쉽지는 않다. 나와 식구가 목구멍으로 넘길 진짜 식량을 버느라 정신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설악산대피소 예약하기가 힘들어서다. 인터넷 예약만 받는데 ‘클릭질’이 서투른 나 같은 사람은 평일 예약도 어렵다. 그래서 1년에 딱 한 번 이맘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본격적으로 단풍철이 시작되기 직전인 이때 설악은 태풍의 눈에 든 듯 고요하다. 예약이 쉬울뿐더러 대피소가 한적해 모처럼 침상에서 귀마개 없이 잠들 수 있다.

기후변화 때문일 것이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한계령에서 출발해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에 접근해가는 길목 곳곳이 이미 단풍으로 붉었다. 예년에는 보기 힘들었던 현상이다.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만 모인 듯 같은 가지에서 자라는 이파리마저 제각기 색깔이 달라서 고왔다. 걸음을 멈추고 정신없이 빠져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아니 세상은 왜 이렇게 아름다울 필요가 있을까.’

ⓒ한성원 그림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날이 추워져 잎으로 만드는 에너지보다 잎에서 빼앗기는 에너지가 크게 되면 일제히 잎을 떨구면 그만이다. 이렇게 얼굴을 붉히며 수선을 피울 일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땅을 기는 놈, 난쟁이처럼 작은 놈, 기를 쓰고 남을 타고 오르려는 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는 놈. 숲이 이렇게 개성이 넘치는 풀과 나무로 북적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태양에너지를 될수록 듬뿍 받는 게 궁극의 목적이라면 툰드라의 침엽수처럼 일관되게 위로만 치솟아야 옳다. 생명을 진화하게 하는 힘 가운데 으뜸은 효율과 필요에 충실한 자연선택이 아니라 전 세계 70억 인류의 얼굴을 일란성 쌍둥이마저 각기 다르게 만드는 그 막무가내 다양성의 추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기후변화 문제는 다루기가 까다롭다. 복잡하고 난해하다.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에 비하면 개인으로서 우리는 맥 빠지게도 작다. 그래서 사람들이 애써 이 문제를 외면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사라졌지만 처음에 온난화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혼란을 키웠다. 사람들은 따뜻해지면 좋지 무슨 문제야 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기후변화의 캐리커처를 제대로 그리려면 온난화가 아니라 집중화를 부각했어야 한다. 폭우나 폭설과 폭염, 가뭄과 홍수가 좁은 지역을 기록적으로 두들겨 패는 현상, 그게 바로 기후변화라는 악당의 본모습이다.

또 한 가지 최근 월드워치연구소가 발표한 기후변화 세계지도를 보고 깨달은 특징은 바로 단순화·획일화이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기후와 식생을 자랑하던 지역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음을 알았다. 설악산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그 생명의 원천인 다채로움이 위협받는 것이다. 아직도 화석연료가 이런 재앙을 초래한 주범이란 걸 많은 사람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석연료에 기반한 글로벌 경제가 파괴한 것이 바로 다양성 아니던가. 자연 상태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종이 멸종했고, 그에 못지않은 수의 종이 멸종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수십만 년 혹은 수만 년을 이어온 문화와 언어가 눈이 핑핑 돌 정도의 속도로 퇴장하고 있어서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간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런 마당에 이제 기후마저 단일화를 향해 치닫는다면 이게 우연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파리 기후변화 당사국 총회에서 예의 그 목에 힘을 준 목소리로 “신기후체제를 반드시 출범시켜야 한다”라고 소리 지르는 걸 텔레비전에서 듣고 깜짝 놀랐다. 박 대통령이 한글로 적어서 팝송을 부르듯 하는 걸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들고 파다 보면 경지에 오른다는 걸 알겠다. 신기후체제라는 게 말은 거창한데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동안 다른 여러 나라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억제해야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것이 강제화하기 쉽지 않은 글로벌 문제라는 점에 기대 무임승차를 하려 들었다.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들이 뭔가 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독일만은 달랐다. 이 행성의 세입자로서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정당한 대금을 지불하려고 애썼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려고 앞장서 달려 나갔다.

이제 지구의 육지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지경에 이르러 세계 각 나라는 독일이 옳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번 파리 대회에 그동안 요리조리 빠져나갔던 미국과 중국이 모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게 그런 이유에서다. 신기후체제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세계가 독일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독일은 이처럼 혼자 잘났을까. 이유를 알려면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역사를 더듬어야 한다.

서기 98년에 로마의 저술가이자 웅변가인 타키투스는 여행가들에게서 얻어 들은 정보와 문학작품에 나오는 얘기들을 버무려 〈게르마니아〉라는 책을 썼다. 이 한 권의 책이 세상을 어떻게 휘저어놓을지 저자는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라인 강 동쪽과 알프스에 걸쳐 사는 사람들이 도덕성이 높고 악행을 웃어넘기지 않으며 명예와 충성심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는 민족이라고 치켜세웠다. 학술적으로는 타키투스가 얘기한 게르만족과 지금의 현대 독일인이 과연 약간의 연관이라도 있는지조차 불투명하다. 그런데 이 얘기책은 독일 민족의 단합을 고취할 필요가 생겼던 1425년께부터 갑자기 부활했다. 피히테의 저 유명한 ‘독일 민족에게 고함’이란 글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 책은 낭만파 작가들의 상상력에 의해 덧칠된 뒤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에 넘어갔다. 나치는 이 책을 교과서 삼아 인종차별, 독일 민족 지상주의를 완성하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다. “매섭고 푸른 눈, 황갈색 머리카락, 건장한 체구”의 순혈 혈통을 늘리려고 유럽 전역에서 파란 눈에 금발 아이 수십만명을 납치한 ‘레벤스보른(생명의 샘)’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독일에 충격을 준 1970년대 초의 산성비

나치가 몰락한 뒤 ‘역사상 가장 위험한 책’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 이 책의 마력은 다한 듯싶었다. 그런데 독일의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깨어났다. 이 책에는 ‘어둡고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숲의 심장에서 그들은 왔다’는 게르마니아의 튜턴족 신화가 실려 있다. 이 구절 덕분에 독일 사람들의 뼈에는 숲과 자기들이 하나라는 생각이 새겨졌다. 독일이 산업화에 매진하던 1970년대 초, 산성비가 온 유럽을 휩쓸었다. 숲이 죽어가는 걸 알게 된 독일인은 큰 충격을 받고 각성했다. 독일은 그때부터 환경을 보호하고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같은 물이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젖이 된다는 게 맞다. 책이 아니라 사람이 위험한 거다.

패전국이어서 영국이나 미국처럼 남의 나라에서 석유나 가스를 약탈할 힘이 없었던 점도 독일을 반듯하게 서게 했다. 석유 메이저가 장난을 칠 때마다 속절없이 중병을 앓아야 했던 독일은 석유 의존도를 줄이려고 이를 사려물었다. 지구를 살리고 뭐고를 떠나 독일은 억울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석유를 멀리할 필요가 있었다. 정부와 국민 모두에게 퍼진 이런 공감이 태양열 집적판을 점점 늘리고 풍력 터빈을 돌아가게 만든 에너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독일이 원자력 발전을 경원시하게 됐는지, 과연 원자력 발전을 완전히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유럽에서 평화와 반핵은 동의어라고 보면 맞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2차 대전을 겪고, 국토가 분단된 채 냉전의 대리인으로서 핵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봤던 독일의 차세대가 선택한 것은 평화, 곧 반핵이다. 라인 강에서 30㎞ 남짓 떨어진 훨이라는 마을에서 처음으로 원전 유치 반대시위가 일어나 10년 만에 승리를 거둔 게 작은 출발이었다. 1983년 평화·반핵을 기치로 내건 녹색당이 의회로 진입하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져 독일 부모가 아이들을 방에 가두어야 했던 게 큰 방향을 정해주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버섯을 마음 놓고 먹지 못한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2011년 일본의 원전 사태가 터져 결정타를 날리기까지, 메르켈 정부가 2022년까지 17개 원전의 스위치를 완전히 내리기로 결심하기까지는 또 25년이란 세월이 더 필요했다. 지난하고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으나 이제 원전이 독일에서 부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독일인 사이에 악마로써 악마를 물리칠 수 없다는 공감이 단단하다.

독일은 2050년까지 1990년 대비 탄소배출량을 80%까지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시리아 난민을 1년에 80만명 받아들이겠다는 것만큼이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월한 목표이다. 순조롭지만은 않지만 방향은 그 어느 나라보다 정확하게 잡았다.

뒤돌아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속한 여당은 항상 독일 정부와는 정반대로 달려온 세력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위해 미국과 소련이 데탕트에 접어들 때 반대로 북쪽과의 긴장을 더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은밀히 핵무기까지 개발하려고 하다가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런 탓에 냉전은 지금도 현실에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한반도는 희귀하게도 냉전이 만든 거의 유일한 분단 사례로, 학계의 흥미로운 연구 과제가 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노태우 정부, 그리고 이명박 정부와 지금의 정부도 근본적으로 박정희 노선에서 이탈해본 적이 없다. 먼 나라에서 벌어진 체르노빌 사고는 물론이고 코앞에서 벌어진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도 자극제가 되지 못한다.

이걸 요즘에는 사기 캐릭터라고 하던가. 독일은 다 해냈다. 경제를 세웠고, 분단을 극복했고, 원전을 끄고 화석연료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려 한다. 비슷한 처지면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우리에게는 초슈퍼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도 ‘레벤스보른’을 수행하던 ‘하찮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어쨌든 허접한 신문들이 놀라는 만큼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건 박 대통령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다. 물론 야당 쪽에서 원전을 완전히 꺼야 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없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참고한 활자:〈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민음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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