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 어린이의 동시집 〈솔로강아지〉(가문비, 2015)에 대해 쓰면서 다 하지 못했던 얘기가 있다. 나는 ‘학원 가기 싫은 날’이 잔혹 교육 현장에 짓눌릴 대로 짓눌렸던 열 살 난 어린아이의 동심에서 나온 시라고 생각하지만,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문제의 시가 “사탄의 영(靈)”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강만원의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창해, 2015)나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추문을 보면, 사탄은 한국 교회를 돌보는 데 바빠서 어린 시인의 동심에까지 파고들 여유가 없어 보인다.

지난해 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조사는 여러 항목에서 사탄의 영에 정복당한 한국 교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우선 종교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한국의 3대 종교를 놓고 신뢰도를 조사해보니 개신교는 가톨릭(29.2%), 불교(28.0%)에 이어 가장 낮은 21.3%를 얻었다. 또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개신교는 가톨릭(32.7%), 불교(26.6%)의 턱에도 미치지 못하는 8.6%만 겨우 획득했다.

개신교가 불신받는 원인은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24%), 불투명한 재정 사용(22.8%), 교회 지도자들의 부정(21%), 교회 성장주의(19.5%)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워낙 총체적이라 전적으로 목사의 책임이 아닌 듯 보이지만, 강만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개(별)교회주의’를 표방하는 한국 교회에서 ‘담임 목사’는 ‘개교회’의 당회장으로서 교회의 전권을 장악한 ‘오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처럼 목사가 교회 운영의 전권을 장악하는 한, 세상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외면하는 주된 원인, 이를테면 ‘재정 비리’나 ‘교회 성장주의’ ‘교회 지도자의 부정’은 목사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이지영 그림

대형 교회 실력자를 닮고 싶은 한국 목회자들

한국목회자협의회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에서 가장 닮고 싶은 목사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김삼환(명성교회)·김홍도(금란교회)·오정현(사랑의 교회) 목사가 차례대로 1~4위를 차지했다. 목회자들이 닮고 싶은 목사가 하나같이 대형 교회의 창립자이거나 실력자라는 것은 한국 교회를 인도하는 실질적 성령이 ‘재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강만원은 금으로 도색한 대형 교회 담임 목사들의 종합 비리 세트를 하나씩 파헤치면서 “간음에 표절, 횡령, 망언, 사기까지 서슴지 않는 목사들의 설교에서 과연 누가 ‘주의 거룩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한다. 지은이는 부정과 불의로 얼룩진 일부가 한국 목사들의 우상이라는 사실에서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타락을 본다.

순위에는 없지만 최소 10건이 넘는 성추행으로 삼일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한 전병욱은 지금도 ‘스타 목사’다. 자신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온 여신도와 교회 직분자의 딸을 가리지 않고 성추행했던 그는, 예배 도중에 영상설교를 틀어놓은 채 커튼 뒤에서 솟구치는 충동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속 교단의 비호 아래 13억원이 넘는 전별금으로 삼일교회 인근에 홍대새교회를 개업했다. 온라인 카페 ‘전병욱 목사 진실을 공개합니다’가 엮은 〈숨바꼭질-스타 목사 전병욱 목사의 불편한 진실〉(대장간, 2014)을 보면, 한국 교회 여신도의 구원은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가 아니라, 성추행을 저지르는 담임 목사로부터 내 몸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강만원 지음창해 펴냄

상습적인 성추행을 비롯한 여타의 죄를 짓고도 목회자들이 끄떡없는 것은 이들이 회개에 관한 성서 해석상의 편의성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전병욱의 경우 범죄가 발각되자 삼일교회 홈페이지에 “삼일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질렀다”라는 사과문을 자기 이름으로 올렸다. 이후 1년6개월 만에 홍대새교회를 개점하면서 그는 앞과는 사뭇 다르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한답니까?”라는 설교로 자신의 현역 복귀를 변호했다. 앞의 사과와 뒤의 변호는 매우 다른 것 같지만, 회개의 편의성에 기반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전병욱은 두 번 다 “하나님 앞”에 회개(사과)를 했지 피해자에게 한 것도 아니요, 피해자에게 할 생각도 없었다. 애초부터 회개가 이처럼 글러먹었기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노라고 뻗대는 것도 가능하다. 피해자는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제임스 뉴턴 폴링의 〈교회 안의 남성 폭력〉 (도서출판 한울, 2014)을 보면 기독교 안에서 통용되는 회개의 편의성이 딱히 한국 교회의 전유물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기성 교회가 회개의 기본 개념을 수행적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면서부터,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라거나 ‘나는 새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신앙고백에 범죄자의 죄와 악을 값싸게 면죄해주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용서의 의미는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싸구려가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치유와 화해에서 용서는 거의 쓸모가 없어졌다. 회개와 피해 보상의 과정 없이도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용서가 내려졌기 때문에 용서에 관한 교리는 해결책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홍대새교회를 열면서 “죄짓고 또 새로 태어났다 하는 교회 사람들은 뻔뻔하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해요. 그래요. 예수 믿는 것은 뻔뻔한 거예요”라고 말하는 전병욱이나, 그를 감독해야 할 교단이 범죄자와 공범이 된 것은 이처럼 엉성한 회개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회개론이 이토록 엉성하고 뻔뻔한 것일까?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숨바꼭질〉 〈교회 안의 남성 폭력〉은 한입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성서〉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라고 분명히 명령한다. 상대방 없이 ‘나 홀로’ ‘마음속으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죄인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유예된 것이지, 죄인 스스로 용서받았노라고 사칭할 게 아니다.

목사들이 ‘영적 위계’를 내세워 교회 안의 여신도를 성적으로 약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성 목회자에게 양성평등 교육이나 성교육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최만자의 〈여성의 삶, 그리고 신학:1980~1990년대 한국여성신학의 주제들〉(대한기독교서회, 2005)은 가부장적 성격을 가진 〈성서〉를 여성해방적 신학으로 새로 읽는 것과 함께, 여성에게 목사직이 완전히 개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뛰어난 책을 깊이 소개하지 못한 것이 이번 글을 헛되게 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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