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사건’ 기록을 다시 찾아보는 이유
  • 김은지 기자
  • 호수 405
  • 승인 2015.06.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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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박종철 사건은 2015년 박상옥 대법관 임명으로 다시 조명받았다. 박종철기념사업회를 통해 입수한 당시 기록을 통해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 사건을 살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극은 되풀이된다.
1987년 1월14일, 선배의 소재를 대라고 강요받던 대학교 3학년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다음 날 그의 죽음은 이렇게 알려졌다.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 고문치사는 국가권력에 의해 축소되고 은폐되었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이 2015년 다시 조명받는 까닭은 박상옥 대법관 때문이다.

당시 수사검사로 1차 사건을 맡았던 박 대법관 등은 범인이 2명뿐이라고 결론지었지만, 종교단체, 부검의 등의 폭로로 범인이 계속 늘었다. 하나의 사건이 3차 수사까지 이어진 이례적인 상황은 불법과 거짓말을 일삼는 국가권력의 민낯을 드러냈다. 검찰도 정권 차원의 은폐·축소에 가담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박 대법관의 ‘대법관 자격’에 끝없이 문제가 제기된 이유다.

지난 4월 청문회 당시 야당은 검증을 위해 ‘박상옥 검사’의 수사 기록을 포함한 6000여 쪽 기록을 요구했지만 법무부는 개인정보 보호를 앞세워 제출 불가 방침을 밝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이미 가지고 있던 고문 경찰 수사 기록 1066쪽과 뒤늦게 공개된 수뇌부 공판 기록 등 500여 쪽은 ‘박상옥 검사 수사 은폐 의혹’ 외에도 많은 것을 보여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박상옥 대법관이 검사 시절에 맡았던 사건이다. 4월7일 대법관 후보 인사 청문회(사진)에서 당시 역할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문제가 생기면 개인 일탈이라 치부하는 꼬리 자르기 패턴, 대공 수사 특수성을 운운하며 사건 의미 축소하기, 수뇌부에 대한 무죄 선고 등은 2015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기시감을 주는 장면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극은 되풀이된다는 말을 기억하고자,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즈음해 <시사IN>은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이하 박종철기념사업회)’를 통해 입수한 당시 기록을 살폈다(박종철 사건 피의자들과 재판 진행 상황은 오른쪽 표 참조).

꼬리 자르기

22년차 경찰관은 순진했다. 대공분실 취조실 안 욕조의 물이 채워져 있고, 조사받던 사람의 머리가 젖어 있었지만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1987년 8월10일, 민주화 물결이 거셀 때였다. 지휘 라인 박원택·유정방·박처원(이하 지휘 라인)에 대한 1심 1회 공판 조서의 일부다.

“검사:현장 상황으로 보아 피고인은 현장에 도착한 즉시 박군이 물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보는데 어떤가요?

피고인(박원택):현장에 갔을 때 가혹행위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보고 당시 졸도 환자 발생이라는 내용이었으므로 감독 계장으로서 젊은 학생을 살려야겠다는 데 급급했고, 현장에서는 수갑이나 포승줄도 보지 못했고 살리려는 데에 급급해서 다른 사항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1986년 11월부터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제5과 2계장으로 베테랑 대공수사관을 지휘·감독했지만, 부하들에 대한 ‘섣부른 의심’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검사:바닥에 물이 고여 있고 박군이 인공호흡 당하는 상태인데도 가혹행위를 몰랐나요?
 

   

 
피고인:예. 수사단 부임 시 조사실을 구경할 적에 방마다 욕조의 물이 채워져 있어 이유를 묻자, 담당 경찰관이 겨울에 스팀 때문에 건조함을 막아 감기가 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조사 당시도 날씨가 추워 스팀이 들어왔고 평상시대로 물을 받아놓은 것으로 알았고 가혹행위 사실은 몰랐습니다.”

대공분실 안 가로 123㎝, 세로 74㎝, 높이 57㎝의 욕조에서 대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경찰관 두 명이 양쪽에서 벌거벗은 박종철의 두 팔을 잡고, 다른 한 명이 묶인 다리를 들었다. 박종철의 머리가 자연스레 물에 담기는 구조였다. 취조를 하는 경찰관은 옷이 젖는 게 싫어 바지를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가 물이 너무 차가워 욕조 턱에 올라서서 물었다. 선배가 어디 숨어 있냐고. 이 욕조를 ‘대형 가습기’로 인식했다는 그에게 검사는 다시 따져 물었다.

“검사:그 자리에 있던 (고문 당사자)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의 진술에 의하면 누구나 가혹행위 사실을 알 거라고 했는데 피고인은 현장을 보고도 가혹행위를 몰랐다는 건가요?

피고인:박군 사건을 계기로 가혹행위가 경찰에 만연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20여 년 동안 의경 정보과에 주로 근무를 해 피의자를 다루는 임무는 별로 하지 않아 가혹행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또한 현장 도착 시 살리는 데만 급급해서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에 지휘·감독의 책임이 없다는 말이었다. “최근 학원가에 만연한 좌경화 경향을 어떻게 뿌리 뽑을 수 있을까 하는 평소의 직무 의욕이 실수를 저지른 것(1987년 5월22일 2회 황정웅 피의자 신문조서)”이라는 고문 경찰관의 진술처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개인 일탈이라 규정지었다. 책임 대신 무능을 택했다. 2014년 ‘유우성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서 국정원 요원의 증거조작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검사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이었다.

수사 결과는 달랐다. 철저한 윗선의 기획이 있었다.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수뇌부가 개입해 시나리오를 짰고, 보고서를 외우고 연습시켰다는 진술이 나왔다. 고문 경찰관 3명의 죄까지 뒤집어쓴 피의자 2명에게 금전적 대가도 약속했다.

“1월15일 오전 박원택 계장이 확정된 사고 경위 보고서를 카피해 와서 중요 부분을 메모하고 전부 암기해 어디서 누가 묻더라도 그 내용을 그대로 진술하라고 했습니다. 관련자 5명 등이 그 내용을 외웠습니다. 특히 연행 시간 등 각 단계별 시간을 열심히 외우라고 하였습니다(1987년 5월28일 7회 황정웅 피의자 신문조서).”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font></div>대공분실 안 가로 123㎝, 세로 74㎝, 높이 57㎝의 욕조에서 대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위는 당시 현장검증 장면.
1987년 8월10일 지휘 라인 1심 1회 공판에서 검사는 박원택에게 이렇게 물었다. “피고인이 5명에게 실제 수사받는 상황을 가상해 문답 형식으로 확인하는 연습을 할 때 강진규에게 ‘상부에서 다 정책적으로 알아서 하는 일이니 신경 쓸 것 없고 조사받을 때 실수하지 말고 연습대로만 하면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는데 어떤가요?”

그러나 수뇌부는 끝까지 책임을 부인했다. “대공 업무는 특수성이 있어서 그 당시(1월17일 부검 결과 질식사를 알게 된 다음 고문 경찰관 2명에게 면회를 가서도) 서로 위로하고 울었지 진상 규명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1987년 8월24일 지휘 라인 1심 2회 공판조서 중 유정방의 진술)”라고 잡아뗐다. 무리한 혹은 불법 대공 수사에 대한 비판에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대공 수사의 특수성’이라는 논리는 이때도 등장했지만, 1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에서 박처원 치안본부5차장 등은 범인 도피 혐의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등을 받았다. 황적준 부검의의 일기 공개로 뒤늦게 기소된 강민창 치안본부장 또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유죄였다. 국가가 나서서 범죄를 덮고 거짓말했다는 점이 공인된 것이었다.

2심 무죄

직접 고문에 관여한 경찰관은 1·2·3심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이들 중 이정호만 만기 출소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석방됐다). 수뇌부의 경우는 달랐다. 2심에서 뒤집혔다. 1990년 8월18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유근완)는 무죄를 선고했다. “부하 경관을 잘못 단속하고 직무를 소홀히 한 점은 인정되나 5명 모두 고문 경관이었음을 알았다고 볼 증거가 없다”라는 등의 이유였다.

무죄판결이 나오게 된 데에는 고문 경찰의 진술도 한몫했다. 검찰에서 했던 진술이 법정에 와서 바뀌었다. 2012년 대선에서 정치 댓글을 단 국정원 요원들이 검찰에서는 혐의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가 법원에 와서 말을 바꿨던 것과 모양새가 다르지 않았다. 1987년 9월7일 지휘 라인 1심 재판 4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반금곤은 “검찰에서 당시 (내부 보고서를 쓰기 위한 첫) 조사는 담당계장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부와 협의해 작성한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지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모르면서 답변했다”라고 진술했다.

사건 당사자이기도 한 고문 경찰관의 말 바꾸기를 1심 법원은 신뢰하지 않았으나, 2심 법원은 정반대였다. 결국 직접 고문에 가담한 이들은 중죄 처벌을 받았지만, 지시한 사람은 무죄가 나오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엄격한 지시 보고 관계인 대공수사팀의 특수성을 간과한 판결이었다.

대선 개입 댓글을 달았던 군 사이버사령부의 지휘 라인이었던 연제욱·옥도경 사령관은 1심(보통군사법원)에서 각각 집행유예·선고유예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은 대신, 사이버사령부 530단장은 1심(서울 동부지방법원)에서 법정 구속돼 징역 2년을 사는 모습과 겹친다(<시사IN> 제401호 “숨어서 일하던 ‘애국자’ 징역 2년 받던 날” 기사 참조). ‘유우성 사건’에서 직접 증거조작에 가담한 대공 수사 요원은 징역 4년, 책임자 등은 벌금형과 선고유예를 받은 대목도 떠올리게 한다(<시사IN> 제402호 ‘엄하게 책임 묻는다며 판결은 선고유예’ 기사 참조). 수뇌부 사건은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이 되었다가 다시 2·3심을 거치며 유죄가 확정되었지만, 1996년에서야 마무리되었다. 박종철 사건이 터진 지 10여 년 만에야 수뇌부의 유죄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너무 늦은 정의’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박종철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그때 그 사람들

2015년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는 28년 전 ‘그때 그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감옥에서 고문 경관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린 이부영 전 국회의원, 1·2차 수사팀 검사였던 안상수 창원시장, 당시 공안부장으로 부검 지휘를 하다 수사팀에서 쫓겨난 최환 변호사 등이었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박종철의 ‘그 선배’로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는 <미디어펜> 박종운 논설위원(그는 현재 ‘정윤회 게이트, 쥐 잡자고 달려드는 구제불능 새민련’ ‘쌍용차 굴뚝 농성, 파업이 아니라 ‘점거 파괴’ 범죄였다’와 같은 제목의 글을 쓰고 있다)과 고문 경찰을 추가 폭로한 고 김승훈 신부도 당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박종철의 친구였던 김학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박상옥 청문회에 앞서 3월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박종철 사건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부분 은폐되어 있다. 그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실체적 진실을 들추어내 온전히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게 아닐까?”

두 달 뒤, 박상옥 후보자는 대법관이 되었다. 밀어붙이는 여당과 무기력한 야당 사이,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했고 새누리당 단독 표결로 박상옥 대법관이 탄생했다. 김 사무국장의 지적대로라면, 어쩌면 또다시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 셈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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