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은 곳이 어디 출판계뿐일까만, 2014년 출판계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여러 이슈에 대해 말이 많고, 그 이슈를 책으로 만들려는 열심이 지나쳐 탈이 많았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롭게 시행된 도서정가제에 파묻힌 출판계는, 그야말로 설왕설래만 하다가 허송세월했다. 그래서일까. 2014년 한국 출판계는 ‘이거다’ 싶은 트렌드를 많이 내놓지 못했다. 책과 출판에 대한 진중한 이야기보다 그것을 둘러싼 주변부 이야기만 가득했던 2014년 출판계. 그래도 곳곳에서 양서는 태어났고, 눈 밝은 독자들도 건재했다. 그렇게 올해도 새로운 출판 트렌드 몇몇이 빛을 보았다.

2014년 출판계의 핵심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명량>과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일등공신이다. 1800만명에 가까운 관중을 극장가로 불러 모은 영화 <명량>의 열기는 책으로도 이어졌는데, 이순신 관련 책은 다 열거하기조차 벅찰 정도다. <난중일기>가 새롭게 주목받았고, 소설이 서너 편, 리더십 관련 서적도 줄을 이었다. 어린이책과 만화도 제법 여러 권 출간되었고, 이순신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유성룡의 <징비록>도 나름 주목을 받았다.

2014년 출판계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역사’다. 영화 <명량>(왼쪽)과 드라마 <정도전>의 열기는 책으로도 이어졌다.
그중 이순신 열풍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작품은 김훈의 <칼의 노래>가 아닐까 싶다.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이 도전장을 냈지만, 문학동네로 출판사를 갈아탄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주무기 삼아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드라마 <정도전>의 선전에 힘입어 정도전에 관한 책도 여럿 출간되었으나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역사에 관한 관심은 의외의 작가들의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 작가들은 다름 아닌 한강과 성석제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특유의 내밀한 문체로 그려냈다. 중학

ⓒ연합뉴스 한강(위)은 <소년이 온다>에서 ‘5월 광주’를 다룬다.
교 3학년생 동호의 눈에 비친 광주민주화운동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작가는 연민의 시선으로 동호를 바라보면서도, 광주민주화운동이 배태한 오늘의 역사 현실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석제는 <투명인간>에서 주인공 김만수와 그 가족들의 삶이 해체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가족 해체의 원인은 거센 산업화의 물결이었다. 성석제는 내남없이 가난하던 시절, 온몸으로 삶에 맞서야 했던 무지렁이들의 인생을 통해 역사의 한 자락을 들춰낸다. 그간 한강은 인간 심리의 미묘한 지점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성석제는 살아 숨 쉬는 듯한 이야기의 완결에 천착했던 작가다. 그런 두 사람이 현대사를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과거에도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 없지는 않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필두로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이병주의 <지리산>, 박경리의 <토지>, 홍명희의 <임꺽정> 등 1980년대를 풍미한 대하소설들은 역사 교과서에서는 미처 배우지 못했던 이 땅의 질곡 많은 역사를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교과서였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독자들이 10권 내외의 대하소설을 빼놓지 않고 읽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독재 권력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인 저항의식의 발로.” 그러나 대하소설은 민주화의 열기가 잦아들면서 시들해졌다.

‘자본주의를 견디는 법’을 보여준 두 권의 책

비록 대하소설은 아니지만, 역사 문제를 정면에 내세운 소설들이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의 퇴행에서 그 답을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정치에는 기대가 없는 요즘이다. 경제라고 속 시원한 구석이 없다. 양극화라는 말은 이제 현실적이지 못하다. ‘대격차’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제는 1대99도 모자라 0.01대99.99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사회 전반의 퇴행은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독자들은 역사를 배우며 오늘을 살아갈 방법을, 그것을 기반 삼아 내일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2014년 최고 화제의 저자는 당연히 토마 피케티다. <21세기 자본>은 하반기 출판시장의 거의 유일한 활력소였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 열풍을 주도하며 모처럼 베스트셀러의 위용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본래 베스트셀러는 시장 전체를 견인하며 다양한 논쟁과 그 결과물의 출간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21세기 자본>은 그 일을 충실하게 해냈다. 사실 <21세기 자본>은 출간되기 전부터, 즉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화제였다.

ⓒtvN 드라마 <미생>의 선전에 힘입어 원작은 200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렸다.
선후 인과관계는 따져봐야겠지만, 어쨌든 소문 이후 마르크스의 <자본>을 새롭게 해석한 책들이 줄을 이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자본론 공부> <오늘 ‘자본’을 읽다> <욕망 자본론> <자본론을 읽다> <자본의 17가지 모순>을 빼고도 <자본>에 관한 책은 올해 차고 넘쳤다.

한때 나라 망치는 사상으로 금서라 탄압받았던 <자본>이 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되살아난 것일까. 문화연구자 이원석은 <기획회의> 제381호(2014년 12월5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가 2년이 지나도록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팍팍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단지 그것 때문에? 이어지는 말이 있다. “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 돌풍은 수많은 아류작들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이제야 우리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준비가 된 것이다.”

생각해보자. 삼성가 사람들은 무슨 회사 하나 상장하고 5조원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있는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서민들은 전세 걱정 월세 걱정에 내남없이 하루살이를 근심한다. 누구라도 자본주의의 위기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인기는 앞으로도 몇 년, 아니 인간의 탐욕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끝없이 회자될 것이다. 임계점에 도달한 우리 사회가 <자본>을 어떻게 읽고, 어떤 모습으로 활용할지 궁금하다.

<자본>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학구적(?)으로 돌파하는 방편이라면 2014년 하반기 출판시장을 출렁이게 했던 컬러링북 열풍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낸 각박한 사회를 ‘몰입’을 통해 이겨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8월 말 출간된 <비밀의 정원>의 돌풍은 연말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아류작들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컬러링북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몰입’이라는 키워드로 귀결된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어 힐링이 된다”라는 것이다. 색을 칠하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가 복잡한 세월을 이겨내는 힘인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대사회의 병폐와 잇닿아 있다. 출판평론가 김성신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사회에서의 효율은 대중이 활용할 수 있는 효율이 아니다. 한마디로 지배의 효율일 뿐이다. 이를 배경으로 노동환경은 나날이 더 가혹해져간다. 또한 현대의 노동환경은 근본적으로 개별적 존재에게 성취감을 허용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순간 잊을 수 있는 몰입과 성취감, 그것에 쉽게 중독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컬러링북은 현실 망각, 현실 도피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기획회의> 제371호, 2014년 12월5일자).

과학책의 진화…과학이 연애·결혼·이혼을 설명한다?

드라마 <미생>의 선전에 힘입어 윤태호의 웹툰 단행본 <미생>이 200만 부 판매고를 올렸다. 고졸, 그것도 검정고시 출신인 장그래의 성장기를 담은 <미생>은 만화의 가치를 다시금 인식하는 기회였다. 그간 만화는 수준 낮은 장르 혹은 학습만화 정도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웹툰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만화를 보는 세간의 시선이 조금씩 변했다. 재미와 함께 감동, 교훈 등을 선사하는 매체가 된 것이다. 감동과 교훈이라곤 하지만 “공자 왈 맹자 왈”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미생>에서 보듯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한, 그야말로 삶이 전쟁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제는 삶에 기반한 이야기가 웹툰 등을 통해 널리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는 현실을 타개할 어떤 결정권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를 대표하는 책이 <결정장애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무한대로 확장된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오히려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고 무력감에 시달리는 ‘메이비족(Generation Maybe)’이 늘어나고 있다. 2012년 독일 일간지 <디 벨트>에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가 기고한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이 <결정장애 세대>다.

올리버 예게스는 지역을 막론하고 신세대들이 결정장애를 경험한다고 하지만, 실상 현대인들 모두 결정장애를 갖고 있다. 무한하게 확장된 가능성 앞에서 환호하지만, 실제로 그 가능성으로 뛰어들 용기도 없고, 사회적 안전망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젊은이들이 ‘3포 세대’인 까닭은 무엇일까. 단지 용기가 없어서? 아니다. 사회가 이들을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정장애는 신세대뿐 아니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기성세대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인 특유의 질환인 결정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2015년 출판의 가장 큰 과제이자 트렌드가 될 것이다.

과학책의 진화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두드러진 트렌드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최고의 과학책 중 한 권이었던 <어메이징 그래비티> 이후 과학책 출간 경향과 흐름이 점차 변했다. 그간의 과학책들은 주변부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개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알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유레카’를 연발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 정작 부력의 원리에 대한 설명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근 출간되고 있는 과학책들은 과학적 지식을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하고, 그 이후에 재미를 찾는다. 뿌리와이파리의 ‘오파비니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과학적 지식은 명쾌해지고, 그것을 담아내는 틀거리도 좋아졌다. 최근 출간된 <만물의 공식>도 눈여겨볼 만한 책이다. 컴퓨터에서 단계별로 진행되는 일련의 명령을 뜻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현대사회의 현상학을 풀어낸 재미가 쏠쏠하다. 과학적 지식인 알고리즘을 오락·연애·결혼·이혼·법률·영화·음악과 접목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배우는 일이 따분한 것만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지금 미증유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우리 역사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야 한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대변혁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는지도 모른다. 대변혁의 시기가 맞다면, 오늘의 책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단지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장삼이사들의 삶을 변혁시키는, 하여 우리 사회의 지형을 바꾸는 일에 복무해야 하지 않을까. 2014년의 모든 책들이 바로 그 일을 위해 달려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장 2015년 한국 출판계가 벼려야 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나서야 한다.

기자명 장동석 (출판평론가·〈기획회의〉 편집주간)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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