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경남 산청 성심원은 소록도와 마찬가지로 한센인 요양시설이다. 전국에 이런 곳이 5군데 더 있다. 성심원은 지리산 자락에 있지만 뒤는 산으로 막히고 앞은 강으로 막혀서 섬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지금은 ‘오작교’라 부르는 다리가 있어서 쉽게 건널 수 있지만 예전에는 나룻배밖에 없었다. 이곳에 지금도 한센인 120여 명이 거주 중이다.

예전에 ‘나병’이라 불렸던 한센병은 의학의 발달로 이제 치료가 가능하다. 발병률 자체도 높지 않고 전염성도 약하다. 요양시설에는 과거 한센병의 후유증으로 장애를 입은 환자들이 거주한다. 이들이 자연사할 경우 한센인 요양시설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성심원 제공4월24일 성심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김성리 교수(앞줄 맨 왼쪽)가 구술 작업과 시 모임을 진행했다.

성심원 원장인 오상선 신부는 한센인 마지막 세대인 이들의 삶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는 “한 분 한 분의 삶이 소설이고 역사다. 그들의 삶을 기록해서 이 공간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서전 작업은 쉽지 않았다. 직원들이 구술을 받아 기록했지만 전문가가 아니라 애를 먹었다.

그때 구원투수로 나선 사람이 바로 인제대 김성리 교수(인문의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다. 간호사 출신으로 ‘치유 시학’을 연구 중인 김 교수가 성심원에 묵으면서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시 모임’을 개설했다. 어렵게 진행한 한센인 9명(1명은 봉사자)의 구술 작업과 시를 엮어 〈장단 없어도 우린 광대처럼 춤을 추었다〉를 펴냈다.

한센인들은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생각을 정리한 것이 바로 시라고 여겼다. “시는 생각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내가 살아온 역사가 시라고 생각합니다.”(양추자) “내 맘대로 내 생각이 가는 대로 그냥 써봤습니다. 단어들이 안 어울려도 할 수 없고 어울리면 좋고 하는 심정으로 고민 고민하면서 썼습니다.”(안준식) “잘 쓰든 못 쓰든 가슴에 맺힌 것을 글로 표현하면 치유가 됩니다. 내가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박두리)

때로 성심원은 이들의 ‘무도장’이 되었다

김성덕씨는 숨겨두었던 시를 꺼냈다. 소록도에서 만나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는 매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운 아내와 결혼하면서 썼던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생애에 굵직한 매듭이 지던 날/ 스물여덟 개 촛대에 불을 붙이며/ 빛바랜 청춘에 미소를 지어본다”(1974)라고 썼다.

생의 대부분을 보낸 성심원과 그 앞을 흐르는 경호강 그리고 뒷산 웅석봉이 시의 소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안병채씨는 성심원에 들어오던 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듣기도 지긋지긋한 이 요양원,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못 쓸 병신들이 모인 이곳에서 나도 그 가운데 함께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분하고 서러운 마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하소연할 곳 없고, 아무도 모르게 꾸리는 짐과 마음정리 서러워라. 서러워라.”

노충진씨는 성심원을 무도장으로 묘사했다. “반백년 한세월/ 성심원은 우리들의 무도장/ 쪼그라진 귓불/ 문드러진 코납작이/ 비뚤다 흘러내린 입술!/ 북장단 없이도 건들건들!/ 우린 함부로 막춤을 추었다.” 하인식씨는 경호강에 대해 “이젠 나뭇가지들이 서로 떨어지려고 몸부림친다/ 빗소리가 요란하다/ 내일 경호강은 얼마나 높아졌을까”라고 썼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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