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기억하는 진술은 법정에서도 엇갈렸다. 선장과 선원, 선원과 해경의 기억이 달랐다. 영화 〈라쇼몽〉처럼 ‘어른’들은 책임을 떠넘겼다. 학생들과 일반인 생존자의 진술만 일관되었다. 시스템과 매뉴얼, 리더십이 무너진 참사 현장에서 누구보다 침착한 건 학생들이었다. 서로 손을 잡아주고 끌어내며 줄을 맞춰 이동했고, 먼저 탈출하려 서두른 이들도 없었다. 법정에서 나온 생존 학생, 선원, 해경의 진술을 재구성했다(문답으로 진행된 진술을 흐름이 어긋나지 않게 재구성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지난해 7월28일 단원고 학생들이 증언을 위해 경찰의 통제 아래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7월28일 단원고 학생들이 증언을 위해 경찰의 통제 아래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들어서고 있다.


신○○ 학생:4층 원래 배정된 남학생 방이 아니라 친한 친구들이 있는 방에서 잤습니다. 아침 8시52분, 방에서 지갑을 꺼낸 뒤 레크리에이션 룸 앞으로 와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배가 기울었습니다. 조금 흔들리다가 한순간에 넘어갔습니다. 창밖을 보니 컨테이너와 라면 박스 같은 게 바다에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배가 기울면서 물건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나뒹굴면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회색 봉 같은 게 다리로 떨어져 맞았습니다. ‘기다려라’ ‘대기하라’는 방송만 나왔습니다. 친구들은 배를 타면 보통 있을 수 있는 일로 알고 대기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창문으로 컨테이너가 떨어진 것을 보았기에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사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아 먼저 신발과 양말을 벗었습니다.

벽에 튀어 나와 있는 부분을 밟고 올라 복도(위)까지 다다랐습니다. 올라와서 보니 여학생들이 복도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습니다. 각 방에 구명조끼가 있었지만 배가 기울어 여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학생 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구명조끼를 꺼내 여학생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어서 방문을 당기지 않고 밖에서 미는 방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선실(방) 구조는 양쪽에 침대가 있고 창문이 있고 그 밑에 구명조끼가 있는데 문을 열고 떨어지듯이 내려가야 했습니다. 구명조끼가 보관된 사물함 앞에 있는, 쏟아진 캐리어 등 짐을 치우고 구명조끼를 꺼냈습니다. 방마다 성인용 8개, 아동용 1개가 있는데 구명조끼를 들고 올라올 수 없어서 구명조끼를 위로 던져주었습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임희민 제공〈/font〉〈/div〉세월호 희생자 임현진군이 배 안에서 촬영해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사진.
ⓒ임희민 제공 세월호 희생자 임현진군이 배 안에서 촬영해 아버지에게 보낸 마지막 사진.

 

침대를 잡고 올라와 다음 방으로 이동했고 방마다 같은 방식으로 구명조끼를 꺼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기 전에 움직였습니다. 20분간 구명조끼를 꺼내 친구들에게 건넸고, 9시27분에 복도에서 기다리면서 휴대전화 문자를 했습니다. 기다리던 여학생들은 창문이 보이지 않아서 상황이 심각한 줄 몰랐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동영상도 찍었습니다. 왼쪽 갑판을 보니까 물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심각성을 아니까 먼저 움직였습니다. 일반인 승객이 커튼을 뜯어서 로프를 만들어 던져주었는데 남학생은 로프 없이도 올라갈 수 있어 보였지만, 여학생은 쉽게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헬기 소리가 들려 제가 복도 앞에서 여학생들에게 “헬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선원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헬기를 탈 수 있는 사람은 먼저 태워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손 든 여학생들 허리에 커튼을 묶어서 한 명씩 올려 보냈습니다. 한 명 올려 보낼 때마다 좌현 갑판을 보았는데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거의 출입구 쪽에 찼을 때 위에서도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줄을 잡고 올리는 방법을 포기했습니다. 내가 원래 있었던 레크리에이션 룸 쪽 출입구가 있어서 그곳으로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아 있는 여학생들에게 “레크리에이션 룸 옆에 있는 출입구로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복도에 남아 있는 남학생들도 혹시 있을까 봐 “레크리에이션 룸 쪽으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저는 마지막 로프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배가 거의 70° 정도 넘어가서 제가 올려 보낸 학생들이 우현 갑판으로 나가는 계단 옆에 서 있었고, 그때서야 해경 1명이 보였습니다. 겨우 헬기를 타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몇 번 말하지만 탈출하라는 방송만 했어도 전부 나왔을 것입니다.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 학생:화장실에서 나올 때 배가 기울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실수로 배가 기운 줄 알았는데, 몇 초 지나서 확 기울어지면서 넘어졌습니다. 친구 한 명은 화장실 문에 손이 끼어 빼주려고 했는데도 문이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 손이 찢어져 피가 났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리는데 물이 좌현 갑판 쪽에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은 차례대로 질서를 지키며 빠져나갔습니다. 레크리에이션 룸 쪽으로 이동하다가 물이 많이 차서 둥둥 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왼쪽 출입문 쪽에서 물이 확 들어와서 저도 위로 떠올라 복도로 빨려 들어갈 뻔했습니다. 구명조끼가 모서리에 걸렸습니다. 그 순간 손으로 다른 걸 쥐고 있어서 가까스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한손으로 벽을 밀어 위로 쭉 올라가는데 또 계단 옆에서 머리까지 물에 푹 잠겼습니다. 안경, 모자 다 없어졌습니다. 휩쓸려서 올라오다가 위를 보니 조그만 구멍(난간)이 하나 있어서 겨우 손으로 잡고 그냥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해양경찰이라고 쓰여 있는 배가 보여 살려달라고 했더니 건져주었습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이준석 선장은 세월호를 탈출하고 나서 해경에 자신이 선장임을 밝히지 않았다.
ⓒ연합뉴스 이준석 선장은 세월호를 탈출하고 나서 해경에 자신이 선장임을 밝히지 않았다.

이준석 선장(구속):사고 당시 담배 피우고 옷 갈아입으려고 침대에 앉아 있었습니다. 배가 기울면서 넘어져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조타실로 나와보니 힐링 펌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고 배가 침몰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다쳐서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 말을 듣고 구명조끼 입고 대기하라고 했는지 제가 직접 지시했는지도 가물가물합니다. 둘라에이스호에 구조 요청을 하라고 1항사에게 지시했습니다. 보고도 받았습니다. 배(둘라에이스호)가 부적절해서 탈출을 못 시켰습니다. 10분 정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구조선도 올 테고, 둘라에이스호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조류도 세고 물도 차갑고 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승객들을 퇴선이 가능한 위치로 유도 조치해야 하는데 그때는 얼마나 심각한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실신 상태에 있었습니다. 상황실과 세월호 사이 교신 내용을 듣지 못하고 사람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판단력이 무능해진 상태였습니다. 구명정이 왔으니까 해경도 오고 했으니까 원만히 구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탈출하고 나서 해경에 선장임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123정에 올라 배를 보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때 정신을 잃다시피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이준석 선장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본인은 퇴선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김경일 123정장은 세월호 진입 명령을 받고도 “당황해 깜빡 (진입 명령을) 잊었다”라고 진술했다.
ⓒ연합뉴스 김경일 123정장은 세월호 진입 명령을 받고도 “당황해 깜빡 (진입 명령을) 잊었다”라고 진술했다.

김경일 123정장(구속):출동 당시 경찰관 10명, 의경 3명 총 13명이었습니다. 123정은 100t 규모입니다. 상황실로부터 세월호 승객이 450명 이상, 45° 정도 기울어져 있고, 위치 정도를 듣고 출동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세월호 승객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퇴선 위치에 집합해 있거나 구명벌을 투하해 해상에 다 내려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게 아니어서 너무 당황했습니다.

구명보트(단정)를 내리고 접근했습니다. 가자마자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인명 구조를 시작했습니다. 세월호와 직접 교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구명보트에 탄 직원(해경)들에게 선내 진입해 승객들을 구조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조류가 세서 배가 앞쪽으로 넘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직원들에게 (세월호에) 올라가라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배가 넘어오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전상 선내에 진입하라는 지시를 못했습니다. 선내 진입과 관련해 평소 훈련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세월호 선원들이 선내 대기 명령을 승객들에게 해둔 상황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다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퇴선 방송이 나오게 했을 것입니다. 이 경사가 구명보트가 출발한 뒤 조타실로 올라와 세월호에 올라가 구명벌을 투하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조타실 부근에 접안시키고 그 과정에서 선원들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7명을 구조했는데 배가 이 정도로 기울어 승객들이 조타실까지 진입했구나 생각했지 그들이 선원인 줄은 몰랐습니다. 9시48분쯤 해경 상황실로부터 선체 진입 명령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때가 조타실 인원(선원)을 구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해경 직원이 2명 있었는데 미끄러져서 못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황해서 깜빡 (진입 명령을) 잊었습니다. 진입 명령 통신을 받았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배가 빨리 넘어오는 상황이어서 진입 지시를 못했습니다. 검찰 조사 때 세월호를 향해 (123정에서) 퇴선 유도 방송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때 상황이 급박해서 퇴선 유도 방송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을 못해서 퇴선 유도 방송을 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목포 해경 상황실 명령 중에 선체 진입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고, 세월호 반대편으로 넘어가 퇴선 조치를 하라고 했는데 그때 상황이 맞지 않아서 그 조치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해양경찰청 제공〈/font〉〈/div〉해경 구조 헬기는 출동 이후에도 세월호 탑승 인원 등 기초 정보조차 알지 못했다.
ⓒ해양경찰청 제공 해경 구조 헬기는 출동 이후에도 세월호 탑승 인원 등 기초 정보조차 알지 못했다.

○ 목포항공대 헬기 기장:서해지방청 상황실로부터 9시3분에 이륙 지시를 받아 9시10분에 이륙했습니다. 9시27~28분쯤에 사고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맹골수도 쪽에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는 정보만 받고 출동했습니다. 123정에서 9시43분 ‘현재 승선객이 안에 있는데, 배가 기울어 못 나오고 있다’고 교신했다고 하는데, 전 교신 내용을 듣지 못했습니다. 구조에 들어가면 라디오 교신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라디오를 다 켜게 되면 4군데에서 교신이 들어와 통신기기가 폭주하기 때문에 항공기끼리 교신할 수 있는 필수적인 라디오만 청취합니다. 내려가서 구조하는 항공구조사와는 별도 통신수단도 없습니다. 도착 10마일 정도 전에 ‘그쪽(세월호)에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까’라고 세 번 정도 물었는데 상황실로부터 대답이 없었습니다. 저희 헬기가 제일 처음 도착했는데 세월호 주변 바다에 표류하는 승객도 없고 갑판에도 승객이 나와 있지 않아 이상했습니다. 세월호 주변을 한 바퀴 선회했습니다. 그 뒤 승객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아 탈출 지시가 있었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나오는구나’ 생각하고 인명 구조활동을 했습니다. 침몰하는 선박에서 제일 먼저 수행해야 할 것이 퇴선 명령입니다. 퇴선 명령 자체가 안 되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기자명 고제규·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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