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지막 날. 단원고의 벚꽃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4월이 되어야 피기 시작한다는 벚꽃나무 아래서 지난해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앞두고 제각기 들뜬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모습이 기록된 사진은 고스란히 영정에 놓였다.

오랜만에 단원고를 찾은 ‘2학년 8반 현진이 엄마’ 이미숙씨(44)는 벚꽃이 피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다고 했다. “현진이가 저기서 사진을 찍은 지 벌써 1년이 지나 다시 꽃은 피는데 아이들만 떼로 사라졌어요. 바뀐 건 하나도 없이 시간만 흘렀네요. 꽃이 화사하게 피면 필수록 더 슬플 거 같아요. 꽃필 땐 학교에 안 오려고요.”

현진이 엄마는 가끔 단원고에 와서 2학년 8반 교실을 청소한다. 원래대로였다면 올해 고3이 된 아들의 입시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아들의 인생은 열여덟에서 멈췄다. 2학년 8반 책상 29곳에는 각각 꽃과 노란 리본, 허니버터칩 과자 등이 놓여 있었다. 32명 중 살아서 돌아온 친구는 3명뿐이다. 사고 희생자들이 졸업 예정이었던 2016년 2월까지는 교실이 보존될 예정이다.

같은 날 오전 ‘2학년 8반 현진이 아빠’ 임희민씨(45)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을 찾았다. 지난해 여름 난생처음 청와대 근처에 간 이후 8개월 만이었다(〈시사IN〉 제357호 ‘불 끄지 못한 부모의 100일’ 기사 참조). 전날 4·16참사 가족협의회와 세월호참사 국민대책위원회가 416시간 농성을 선언했다. 정부가 시행령으로 특별법을 무력화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인양도 촉구했다. 기자회견 후 거리 행진을 하던 유족 두 명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처음 있는 경찰의 강경 대응이었다. 그날부터 유족들은 거리에서 한뎃잠을 청했다. 지난해 4월16일 이후 진도 팽목항·서울 광화문 등에서 반복해온 풍찬노숙을 또다시 시작했다. 봄비가 흩뿌렸다.
 

ⓒ시사IN 신선영3월31일 ㅁ단원고 2학년 8반 고 임현진 학생의 부모님이 아들의 교실을 찾았다.

3월30일 기자회견에 가지 못했던 임씨는 다음 날 한달음에 서울로 향했다. 늘 양복만 입던 그였지만 길거리 생활을 염두에 둬 등산복 차림으로 나섰다. 경기도 안산에서 다른 유족들과 같이 전세 버스를 탔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경찰이 막아섰다. 중국 관광객들은 마음껏 활보하는 서울 광화문·경복궁 인근을 대한민국 시민인 임씨 일행은 통과하지 못했다.

오랜 승강이 끝에 겨우 청운동까지 갔지만 청운동주민센터 맞은편이 한계선이었다. 지난해 기자회견 당시 허락되었던 청운동주민센터 앞은 경찰 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 자체가 원천 봉쇄되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던 임씨는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밝히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1년 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진상 규명이 먼저라고 수없이 외쳤건만…

임씨는 지난해 사고 당일 아침 아들과 카카오톡을 주고받았다. 오전 8시46분 ‘아침 먹었어?’라고 카톡을 보내자 현진이는 곧바로 친구와 배 갑판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상황을 전혀 몰랐던 터라 사진을 보며 잔소리도 했다. ‘사진 찍을 때 온몸이 다 나오게끔 찍어야지. 신발까지’라고 카톡을 하자, 현진이는 다른 사진을 전송했다.
 

ⓒ시사IN 조남진지난해 4월16일 밤 11시쯤, 침몰된 세월호 선수 부분이 아직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사이 급격하게 배가 기울어 선내로 다시 들어간 현진이는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차분히 따랐다. 친구들과 함께 구명조끼를 입고 기다리는 사진을 마지막 카카오톡으로 보내준 아들은 지난해 5월6일 세월호 266번째 희생자로 발견되었다. 사고가 일어난 이후 정부 당국은 무엇을 했는지 책임은 없는지 엄정히 따져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이뤄진 수사와 재판에서 사고 당일 구조의 부실함에 책임을 진 공무원은 딱 한 명이었다. 4월16일 오전 세월호 구조에 나선 해경 123정의 김경일 정장만 기소되었고,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임희민씨는 밝혀져야 할 진실이 아직 더 있다고 생각한다.

임씨는 세월호 참사 이전 새누리당 후보로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지인을 도왔다. 그동안 특별한 정치색이 없던 그는 지금은 “새누리당의 ㅅ자만 들어도 싫다”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야당이 더 좋은 것도 아니지만, 정부 여당에는 학을 뗀다. 여당 의원들이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고, 세월호 인양에 부정적이던 모습은 그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국회의원이란 양반들이 어쩜 그럴 수 있죠? 진상 규명을 아예 바라지 않는 것 같아요.” 정부 비판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필부의 인생에 ‘서명운동’ ‘시위’ ‘거리행진’ 등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수학여행 가던 배가 뒤집혔고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다. 그날 벌어진 일을 샅샅이 다 밝혀달라는 요구에 어느새 ‘반정부’ 심지어 ‘종북’ 낙인까지 찍혔다.

지난 1년은 언론의 속성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렵게 말문을 열었지만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실리더라도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은 잘렸다.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에 아들 유골이 있는 안산 하늘공원에 갔다가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며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를 인양해달라” “수사권·기소권을 보장해달라” 하는 말도 내뱉었지만 “친구 같은 아들이었는데…” 따위 내용만 보도되었다. ‘언론은 슬픈 것만 좋아한다’는 교훈을 얻은 이후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시사IN 신선영세월호 참사 15일째인 지난해 4월30일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4월1일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관련 제1차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를 열어 배·보상 지급 기준을 의결했다. 선체 인양에는 묵묵부답인 채 돈 문제를 전면에 부각했다. 사망자 1인당 평균 배상금이 단원고 학생은 4억2000여만 원, 교사는 7억6000여만 원이라는 내용이 모든 언론의 톱뉴스로 전해졌다. 현진이 엄마 아빠는 정부의 태도가 불편했다. 진상 규명이 먼저라고 그동안 수없이 외쳤는데, 정부는 그에 대한 응답 대신 배·보상만 결정했다. 돈 받고 그만 떠들라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여론도 보상금에 집중되었다. 현진이를 떠나보낸 후 두 사람은 매일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한다. 불면증이 생겼다. 그 시간 임씨는 스마트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검색어 ‘세월호’로 관련 뉴스를 모두 본다. 댓글도 다 읽는다. 안 좋은 내용이 많다 보니 머리로는 ‘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손은 댓글 보기를 누른다.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에 비유한 상식 이하의 악플뿐만 아니라 ‘이제 그만 좀 해라’는 댓글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시간만 흘렀지 정작 뭐 하나 된 게 없는데도, 지겹다는 내용이 많다. 세월호 침몰 참사는 현진이만의 일이 아니라 여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노란 현수막에 ‘아이들이 국가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문구를 새겨 안산 시내에 걸었다. 안전한 사회 건설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 믿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차가울 때마다 참담하다. 동시에 주변의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된다. 세월호 유족끼리 나눠 가진 노란 리본 스티커를 어느 순간 자동차 밖이 아닌 안으로 옮겨 붙였다.
 

ⓒ시사IN 조남진유족들은 지난 1년 동안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진상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다.
ⓒ시사IN 이명익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둔 3월31일 유족들이 서울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요

결국 4월2일 4·16참사 가족협의회와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이틀 만에 서울 광화문에서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배·보상 절차를 당장 중단하라는 요구였다.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할 시행령을 중단하고 세월호 인양을 하라는 농성을 시작한 때 정부는 뜬금없이 배·보상 기준을 발표했다. 4억이니, 7억이니 하는 금액을 지껄여대는 비열한 짓을 저질렀다. 참 무례하다. 유가족을 돈 몇 푼 더 받아내려고 농성하는 것처럼 호도하는 정부의 행태에 분노한다.” 단원고 희생자 엄마를 포함한 52명은 삭발도 했다. 잔인한 4월이 시작됐다.

그래도 집보다 길바닥에 있는 게 마음은 편하다. 혼자 있으면 쉽게 비참해진다. 4월16일에 멈춰버린 집은 아들의 흔적이 그대로다. 아직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아들 명의의 휴대전화도 여전히 개설되어 있다. 집에 있으면 현진이의 영혼과 함께 있다고 여기다가도, 그런 아들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럴 때면 술을 마신다. 현진이 엄마는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술이 많이 늘었다. 현진이 아빠는 오히려 술을 줄였다. “술을 자꾸 먹으면 자살 충동이 생겨요. 저라도 정신을 붙들고 있어야 무슨 일이 안 나죠.”

세월호 유족과 자주 만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겪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공유하고 또 위로할 수 있는 이들이다. 4월1일 저녁도 다른 유족과 어울렸다. 등산·운동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대화의 주제는 곧잘 아이들로 돌아갔다. 자식의 시신을 발견한 날이 화제에 올랐다. 지금까지도 발견하지 못한 실종자 9명에게는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기다리던 시간이 정말 지옥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아빠는 숨진 아들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리며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꺼내들었다. “우리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가 5월 초에 수습되어 보러 갔는데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 나왔는데, 영 찜찜했다. 이후 DNA 검사를 했는데 아들이 맞았다. 내 자식을 못 알아봤다는 죄책감은 평생 못 씻을 거 같다.”

 

 

 

ⓒ시사IN 신선영서울 광화문광장 농성장에 걸린 단원고 희생 학생들의 사진 옆으로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이야기를 듣던 현진이 엄마는 현진이 아빠도 그랬다고 위로했다. “우리 아들도 5월 초에 올라왔어요. 그래도 엄마는 느낌이란 게 있어서 아무리 얼굴이 상해도 알아보거든요. 너무 충격받는다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안 봐요. 놀란 건 놀란 거고, 내 아들 마지막 모습 지켰죠.”

현진이 아빠도 입을 열었다. “내 친동생이 스무 살 때 사고로 죽었어, 1994년. 어머니가 15년쯤 지나니깐 마음이 조금이나마 괜찮아지는 거 같다고 하데요. 나도 그 정도 걸리겠지 싶다가도, 진상 규명이 계속 안 되면 평생 마음이 낫지 않을 거 같아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조금이나마 괜찮아질까.”

행진도 하고 시위도 하고 서명도 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느냐, 넋두리 끝에 술잔만 거푸 채워졌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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