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H.O.T가 데뷔했다. 문학을 좋아했던 소녀(라 쓰지만 그냥 초딩이었다)는 H.O.T가 데뷔하고 나서 항상 불안했다. 오빠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웃을 때마다 심장에 ‘어택’이 왔다. 마음이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서 가끔 집으로 가는 길에 팬시점에 들러 오빠들 사진을 샀고, 방 안에는 브로마이드를 잔뜩 붙여놓고 좋아했더랬다. 그러다 옷을 갈아입을 때면 강타 오빠가 마치 나를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눈동자에 메모지를 붙여놓기도 했다. 그렇게 ‘망상종자’가 되어가던 나는, 중학교에 올라간 어느 날 친구로부터 아주 커다란 파일을 하나 받았다. 그 파일에는 A4 용지가 잔뜩 들어 있었는데, 그걸 읽은 나는 순간 후두부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자전과 공전. 보이지 않는 축을 따라 그의 시선이 움직일 때 파아란 지구가 숨을 쉰다. 굴절, 영원의 궤도 속을 철저히 외면하는 영혼의 굴절. 그의 지구는 순간 회전한다.’-H.O.T. 대표 팬픽 〈360도〉 중에서(by 훼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흰 종이에 까만 글자인데, 오빠들이 그 아래에서 서로 뒤섞여 연애질을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체했던 무언가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사이다, 이런 사이다가 있을 수 있나! 그때부터였을까. 플로피 디스크에 오빠들의 소설을 가득 담아 밤마다 부들부들 떨며 보기 시작한 것이. 강타 오빠가 주인공이었던 〈하얀 우유 초코 우유〉의 “하얀 우유와 초코 우유가 섞이면 초코 우유가 되어버렷”이라는 대사에 꽂혀버린 게 발단이었다. 나는 그때 이것이 팬픽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몰랐다. 연애도 한번 해본 적 없는 내가 중2병 초기에 접했던 오빠들의 소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게 동성애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들은 서로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이우일 그림

그날 이후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오빠들이 오빠들끼리 연애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 당시 나는 오빠들이 ‘저희 똥 안 눠요’라고 말하면 믿을 수 있을 만큼 오빠들을 사랑하고 있던 때라, 오빠들이 텔레비전에 잠시 나와 조금이라도 그들끼리 손을 맞잡거나 조금이라도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기만 하면, 그게 비즈니스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사귄다(최소 썸탄다)고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다.

급식순이(10대 빠순이)를 벗어나면 언젠간 나의 망상질도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만성적인 질병으로 불리게 되리라곤 생각해본 적 없던 나는, 십수 년간 부녀자(腐女子:뇌가 썩은 탓에 붙어 있는 남자 둘만 보면 자동적으로 망상질을 하는 여자. ‘후조시ふじょし’라고도 일컫는다)로 살고 있다.

스타 캐릭터를 다양하게 시험하고 가지고 노는 팬픽

남성 동성애 팬픽의 경우 공수의 역할이 나누어지는데 기본적으로 공(功)은 이른바 ‘남성적’인 성격, 수(受)는 ‘여성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팬들은 팬픽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팬덤 내에서 스타가 가진 캐릭터를 다양하게 시험하고 가지고 놀면서 모방본과 원본의 차이를 무너뜨리게 된다. 여기서 모방본과 원본의 본질적인 차이는 점차 사라져 나중에는 결과적으로 팬과 스타 사이의 위계도 희미해지며, 그들이 만들어내거나 수용한 스타의 캐릭터가 본질적인 캐릭터를 대체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옛 동방신기, 현 JYJ의 김재중이 팬덤 내에서 “8반 이쁜이”로 통칭되었던 것이 그러하다. ‘8반 이쁜이’는 동방신기의 대표 팬픽이라 불리는 〈가시연〉에서 김재중의 별명이다. 〈가시연〉의 대중성으로 인해 ‘8반 이쁜이’라는 별명은 〈SNL 코리아〉라는 텔레비전 쇼의 팬픽 에피소드에 등장했고 동방신기 팬덤을 넘어서 일반적 ‘수(受)’ 캐릭터를 호명할 정도의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난 여전히 부녀자(婦女子)가 아니라 부녀자(腐女子)다. 이러한 환상 행위에서 느껴지는 정신적 오르가슴이 질병이라면, 이 질병이 치료되지 않아도 아주 괜찮다. 이 질병에 영원히 감염되어 오빠들의 팬픽을 읽고 쓰면서 독거노인으로 무덤까지 가도 괜찮을 것 같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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