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가신과 측근의 충성 경쟁식 권력다툼 끝에 몰락한 아버지의 전례를 되돌아봐야 한다.” 친박 핵심으로 분류되는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이른바 ‘정윤회 국정 개입’ 파문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민정 라인(공직기강비서관실)이 만든 ‘정윤회 동향 관련’ 문건을 〈세계일보〉가 보도하면서 촉발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12월5일에는 급기야 대통령이 누군가의 얘기를 듣고 문체부 국·과장 인사를 지시한 게 맞다는 당시 주무장관의 폭로까지 나왔다. 그동안 ‘정윤회·문고리 3인방’ 대 ‘박지만·조응천 라인’ 간 권력 갈등으로 묘사되던 이번 파문에 대통령까지 연결되는 첫 사례가 수면 위로 불거진 것이다.

〈세계일보〉가 보도한 문건 내용의 핵심은 이랬다.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정윤회씨가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 10여 명과 정기적으로 회동을 갖고 청와대 내부 사정과 인사 문제 등을 논의해왔다는 것이다. 이 문건은 이들을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권력을 쥐고 조정을 농락했던 10명의 환관에 빗대어 ‘십상시’라고 표현했다.
 

ⓒ연합뉴스


파문이 일자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직접 진화에 나섰다.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한 뒤 검찰에 즉각적인 수사를 하명했다. 박 대통령은 또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작성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까지 보고된 이 공식 문건에 대해 ‘근거 없는 얘기’ ‘말도 안 되는 얘기’ ‘악의적 중상’ 등의 단어를 써가며 강도 높게 비판함으로써 사실상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비판을 불렀다.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청와대는 발 빠르게 대처했다. 이 문건을 작성하고 외부에 유출한 사람으로 지난 2월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경찰로 원대 복귀한 박관천 경정(48·전 행정관)을 지목해 검찰에 고발했고, 동시에 문고리 권력 3인방과 함께 문건에 십상시로 거론된 신동철 정무비서관,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 음종환 홍보수석실 행정관, 김춘식 국정기획수석실 행정관, 이창근 제2부속실 행정관 등은 이 내용을 보도한 〈세계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조응천 전 비서관 “문건, 60% 이상 믿을 만하다”

하지만 박관천 전 행정관에게 해당 문건의 작성을 지시하고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까지 했던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검사 출신인 조 전 비서관은 1994년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EG 회장)의 필로폰 투약 혐의를 수사하면서 그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눈에 들어 청와대에 입성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 전 비서관은 자신이 박 경정에게 해당 문건 작성을 지시했다면서 “나는 청와대의 워치독(감시견) 역할을 하려 했고 문건 내용은 60% 이상 믿을 만하다”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청와대가 ‘찌라시’ 수준의 시중 루머를 문건으로 작성해 외부로 유출한 혐의로 지목한 박 경정에 대해 “내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박 경정이 청와대를 떠난 뒤 그 이빨이 사라졌다”라며 문건의 신빙성과 박 경정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자 문건에서 십상시의 배후 실세로 지목된 정윤회씨는 “문고리 권력 3인방과 2004년 이후 10년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조응천 전 비서관이 곧바로 “문건이 상부에 보고된 뒤 정윤회씨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 뒤 이재만 비서관이 ‘(정윤회씨의) 전화를 좀 받으시죠’라고 연락해왔다”라는 비화를 공개하면서 정씨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현재 양측의 진실 공방은 검찰 손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문건을 유출한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해 엄벌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가 내용의 진위는 밝히지 못한 채 ‘산으로 갈’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야권에서 국정조사와 특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시사IN 자료‘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맨 왼쪽부터). 맨 오른쪽은 정윤회씨의 과거 사진.

 


그렇다면 이번 ‘십상시 파문’의 본질은 무엇일까.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회장 세력과 유신 시절부터 박 대통령과 특수한 관계였던 최태민 목사의 사위 정윤회씨의 비선 그룹이 충돌한 권력 암투일까. 양측 모두 그런 시각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정씨와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는 측에서는 일단 ‘비선은 없다’고 못 박는다. 박지만 회장과 가까운 한 지인 역시 “박 회장은 자신과 정윤회의 권력 암투라는 언론의 표현에 억울해하고 있다. 이미 집권 초반부터 수족이 다 잘려 나간 상황에서 애당초 정윤회 쪽과 게임의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국정을 농단한 측이 그렇게 들고나오는 논리가 언론에 무차별로 유포돼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박지만 회장의 아내이자 박 대통령의 올케인 서향희 변호사의 여동생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권력 친인척의 결혼식이라고 하기에는 참석자도 변변찮았고 분위기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박지만 회장이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면 그런 모습이었겠나.”

하지만 양측이 최근 쏟아내는 말들을 보면 서로 간의 견제가 심상치 않았다는 게 드러난다. 정윤회씨와 문고리 권력 3인방 등을 ‘십상시’로 규정하고 이들의 부조리에 대해 내사를 벌이다 청와대에서 밀려난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은 “박 대통령을 비선 라인의 국정 개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철저히 조사를 벌이고 문건을 작성해서 보고했다”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십상시로 지목된 청와대 비서관들 역시 “역대 정권의 친인척 가신 비리와 국정 개입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한 견제 활동을 했을 뿐이다”라는 명분을 앞세운다. 이들이 말하는 친인척이란 박 대통령의 동생 지만씨다. 이들은 실제로 박지만 회장과 가까운 인사들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당장 ‘정윤회와 십상시’ 문건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된 직후인 지난 2월 초순,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 경정에게는 원대 복귀 조처가 내려졌다. 경찰청은 처음에는 박 경정을 서울경찰청 한남동 정보분실장으로 내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힘’의 강한 요구로 그는 결국 도봉경찰서 정보과장으로 좌천됐다. 이에 대해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박 경정에 대한 좌천성 인사는 경찰 차원의 인사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박 경정은 자신을 짓밟은 인사의 배경에 정윤회와 문고리 권력 3인방이 있다고 본다.

박 경정이 좌천성 원대 복귀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도 청와대에서 쫓겨났다. 당시 청와대 주변에서는 “총선에 출마하기 위한 일신상의 사유”라고 그의 사직 이유를 밝혔지만, 조 전 비서관은 청와대를 떠나서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계속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그의 한 지인은 “조 전 비서관이 대구에서 재보선 출마를 준비하려는데 만나는 이마다 문고리 권력들이 ‘조 전 비서관은 절대 공천 안 된다’고 선수를 쳐두었더라며 분개했다”라고 전했다.

 

 

 

 

ⓒ시사IN 자료조응천 전 비서관(가운데)과 박관천 경정(오른쪽)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함께 근무했다. 언론은 조 전 비서관을 박지만씨(왼쪽)와 가까운 이로 분류한다.

 


청와대 실세 그룹이 박지만 회장 세력을 과도하리만큼 견제한다는 주장은 국정원 국내정보파트 1급 간부와 남재준 전 국정원장,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에 대한 이례적 인사 및 교체를 둘러싸고도 불거졌다. 지난 9월 중순 국정원 국내정보파트 1급 간부인 ㄱ씨는 발령 일주일 만에 청와대 지시로 인해 퇴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과 친분이 두터운 그는 1차로 국내 정보와 무관한 한직으로 발령 났다가 그마저도 외압에 의해 퇴진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회정보위 야당 간사인 신경민 의원은 “조응천 비서관과 친분이 두터운 국내정보파트 베테랑 ㄱ씨가 두 번씩이나 인사 조처를 당하는 이례적인 일에 대해 국정원은 국회 보고에서 ‘원장이 한 인사는 아니었다’는 말로 외부 힘을 암시했다”라고 전했다. ㄱ씨는 남재준 원장의 측근이기도 했는데 남 원장 역시 지난 10월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상태에서 전격 경질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남재준 원장에게 박지만 회장이 청와대 문서 유출 건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주장이 나와서 역시 박지만 라인 제거 작업의 일환이 아니었느냐는 분석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남 전 원장은 “박지만 회장을 만난 일도, 그런 부탁을 받은 일도 없다”라고 부인했다.

지난 10월 전격 경질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도 박지만 세력 도려내기의 사례로 거론된다. 육사 37기인 박지만 회장과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은 고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박 회장이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돼 있을 당시 현역 장교이던 이재수 전 사령관이 교도소 면회를 가서 말벗이 되어줄 만큼 막역했는데, 이 사실을 안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부터 이재수 전 사령관을 각별히 챙기고 이후 발탁해 기무사령관까지 올랐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청와대 내에서 박지만 라인으로 분류된 인사들이 된서리를 맞게 된 시점과 때맞춰 이재수 기무사령관도 전격 경질됐다.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국회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정윤회씨와 ‘십상시’ 멤버로 거론된 인사들은 이런 일련의 인사 배후설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십상시 라인’으로 지목된 인사들과 상관이 없는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박 회장 측 사람들이 청와대에 지나치게 많이 들어오고 있어 문제라는 위기의식이 (청와대 내부에) 있었고, 3인방이 이를 견제하면서 그쪽의 불만을 산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박 대통령도 만에 하나 문제가 불거질 경우 동생만은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애정으로 3인방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시사IN 자료남재준 전 국정원장(위 왼쪽)과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위 오른쪽)에 대한 경질을 ‘박지만 인맥 무력화’로 보는 해석도 있다.

여권 인사들도 비판했던 ‘대통령의 비선 라인’

하지만 박 대통령이 동생을 아끼는 마음으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할지라도 관련 정보와 인사 등을 공식 라인이 아니라 비선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불거지는 것은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특히 정윤회씨와 정씨의 전 부인 최순실씨, 그리고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둘러싼 잡음은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나쁜 사람’이라고 누가 전했을까 기사 참조).

박 대통령이 국정을 비선 라인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은 여권 내부에서도 줄곧 제기됐던 사안이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지난 6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사심을 갖고 인사를 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믿는 사람, 아는 사람만 찾는 경향이 있다. 내부적으로 박 대통령이 가까이 의논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공식 채널이 아닌 소규모 비선 라인을 통해 상당히 얘기를 많이 듣는 것으로 안다”라며 비선 라인의 존재를 공식 언급했다. 박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맡았던 유승민 의원은 대통령의 해외 순방 중 중국 관련 말씀자료 취소 논란이 일자 “청와대 얼라(어린애)들이…”라고 따지기도 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지난 당대표 선거운동 과정에서 “견제받지 않는 (청와대 내) 소수 권력의 독선이 문제”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여권 핵심 인사들조차 박 대통령의 비선 조직을 통한 국정 운영 스타일에 일찌감치 우려를 제기해온 터라 이번 문건 파문은 터질 일이 기어이 터진 격이다.

 

 

기자명 정희상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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