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등대지기 학교’ 마지막 시간.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그 어느 강의 때보다 긴장된다”라며 강단에 섰다. 등대지기 학교는 이 단체가 2010년부터 매년 개최해온 부모교육 강좌다. 이 강의를 듣고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젊은 날의 열정을 되찾았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부모들은 무엇에 감응한 것일까? 10월28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kr)에서 진행된 마지막 강좌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개인적인 사연부터 얘기하겠다. 1992년 서울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이마가 넓고 눈썹이 갸름한 한 여자를 만났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내와의 첫 만남이다. 당시 상담을 공부하던 아내는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꿈꿀 수 없는 세상이 싫어요〉라는 시집이다. 알고 보니 그 시집은 ‘장하다’라는 학생이 고3 막바지에 전주 모악산에서 음독자살을 하기 직전 남긴 것이었다. 입시 경쟁의 고통 속에서 더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없어 힘든 생을 내려놓기로 했다면서 그는 자기가 쓴 시를 친구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에 따라 아버지가 펴낸 유고시집이 이 책이다. 이 중 ‘어른들에게’라는 시 일부를 읽겠다. “아, 어느새 가을이군요/ (중략) 어른들은 늘 바쁘다고 하니까 이 계절을 느낄 여유가 없을 테죠// 그래요/ 좋아요/ 어른이 된 당신들에게 시간이 없다면/ 장차 우리들도 똑같아지겠군요// 그럼 어른이 되기 전에 지금 바로 우리들에게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주세요/ 헤세와 셰익스피어를 만나고 싶어요/ 국어 영어 수학 그런 단세포적인 책 표지는 이런 계절에 어울리지 않아요.”

ⓒ시사IN 윤무영송인수 공동대표(사진)가 설립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창립 때부터 입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민간 교육부’를 자임했다.
그가 시를 읽게 하고 싶었다던 친구들은 지금쯤 마흔넷, 마흔다섯 살이 되어 있을 것이다. 24년이 지난 지금, 이 친구들이 장하다 학생을 추모하며 “참 안됐다. 그 시절만 해도 입시 경쟁이 정말 참혹했지. 네가 조금만 견뎠더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입시 경쟁은 갈수록 더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 교육 문제의 정점에 입시 경쟁 구조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나도 너무 고통스러워 이 문제만은 피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이 1989년인데 그때만 해도 학교 현장에 촌지나 불법 찬조금 관행이 남아 있었다. 이를 거부했다가 학년부장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교무실 아닌 지하 보일러실에서 근무했던 적도 있다. 이렇게 홀로 잘못된 관행과 맞서 싸우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겠다 싶어 1995년 ‘좋은교사운동’이라는 교원단체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2002년부터는 상근자로도 일했다. 이 단체가 교원단체 중 최초로 교원평가제도를 수용하는 등 나름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나 여기서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교사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췄지 입시 경쟁 구조는 외면했다. 한마디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고민이 깊어진 것은 상근자 임기(5년)가 끝나가던 2007년 무렵이다. ‘임기 마치면 뭘 하지? 출판사를 해볼까?’ 궁리하던 어느 날 박상진 장신대 교수가 내게 말했다. 이젠 입시 경쟁 구조를 해결하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면서 ‘대학입시제도 개혁 민간운동 제안서’라는 걸 시험 삼아 만들어봤다. 그리고 교육운동을 하면서 평소 뜻이 잘 통하던 윤지희 선생(전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회장)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윤 선생이 뛸 듯이 기뻐하며 답장을 보내왔다. 내 제안을 뼈대로 ‘사교육’을 키워드로 내세우면 대중과 소통하는 교육운동을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이런 반응을 접하고 내가 기뻤을까?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입시 경쟁 구조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가? 교육 내부적 요인(△대학 및 고교 입시제도 △학교 시험방식 △학교 교육의 부실 등)뿐 아니라 외부적 요인(△학벌에 따른 사회적 차별과 ‘좋은’ 일자리 부족 △입학생 성적 중심의 대학 서열화 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게다가 입시 문제는 거의 전 국민이 이해 당사자다. 최근 서울교육청이 몇몇 자사고의 지정을 취소하자 이들 학교 학부모들이 해병전우회처럼 교육청 정문을 돌파하려 드는 모습을 여러분도 보셨을 거다. 학원업자는 물론 학부모까지 가세한 이런 이해당사자들의 극한 대결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아무리 따져봐도 답이 안 나오는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소중한 인생을 답이 안 나오는 일에 낭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연합뉴스입시 문제는 거의 전 국민이 이해 당사자다. 7월25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전국자사고학부모연합회 소속 학부모들이 ‘자사고 폐지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그즈음,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중·고등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게 됐다. “얘들아, 힘들지? 너희들이 힘든 건 입시 때문이란다. 그런데 왜 입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지 알아?” 순간 속으로 반감이 들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교육운동 십수 년 해온 나도 답이 없어 고민 중인데…’ 싶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이랬다. “그건 이 문제를 필생의 과제로 끌어안고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상 한 명도 없어서 그래.” 아, 그 말씀이 왜 아이들 아닌 나한테 꽂혔던 건지(웃음). 정말 그 말이 맞구나 싶었다. 이제껏 입시 경쟁 구조를 개혁하는 운동에 모든 것을 건 개인이나 단체는 없었다. 그저 여러 문제들 중 하나로 거론할 뿐이었다. 결국 마음을 굳히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단체를 출범시킨 것이 2008년 6월12일이다.

2022년이면 입시교육이 사라질 수도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놀라운 건 우리가 상상하고 꿈꿔온 일들이 거의 이뤄지더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처음 창립할 때부터 입시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민간 교육부’를 자임했다. 윤지희 선생과 나, 간사 1명, 이렇게 3명으로 시작하면서도 꿈은 원대했다. 교육부 인원이 518명이라니 우리도 그 10% 수준까지는 인력을 충원해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현재 스태프가 27명이니 그 절반까지는 온 셈이다. 매달 우리 단체를 후원하는 회원도 3000명을 넘어섰다. 평균 후원액은 월 2만5000원. 국내 시민단체 중 이만큼 충성도 높은 후원회원을 거느린 곳도 드물다고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제도와 의식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는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을 넘어 결과(outcome)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니 목표도 구체적으로 세웠다. ‘학교 성적으로 인해 비관 자살하는 학생을 현재의 연간 200명 수준에서 0명으로 떨어뜨리기’ ‘연간 20조원 수준인 사교육비 규모를 0원으로 떨어뜨리기’가 우리의 최종 목표다. 이를 위해 7가지 영역별로 10개년 계획도 수립했다. 이대로 실현되면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이 고등학생이 되는 2022년 입시교육은 사라질 것이다.

꿈같은 얘기라고? 이미 몇 가지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 단체 등이 중심이 돼 끈질기게 문제 제기를 한 결과 외고 입시가 대폭 개선됐다. 덕분에 초등학교 3~4학년부터 영어능력검정시험(TEPS)을 준비해야 했던 잘못된 관행이 사라졌다. 특목고 전문학원 중 문을 닫은 곳도 생겨났다. 대학별 논술고사도 그 전보다 쉬워졌다. 고교 과정을 뛰어넘는 문제를 낼 수 없게끔 압박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으로 인해 최소한 학교 교육과 대학 입시에서만은 선행학습이 발붙이지 못할 근거가 마련됐다. 다만 사교육 시장이 선행학습 규제 대상에서 빠진 것은 매우 아쉽다. 이 부분은 계속해서 보완을 촉구할 계획이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분명한 목표로 삼았고, 이에 따라 나쁜 법과 제도를 고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이것만으로도 사교육 유발 요인의 상당 부분을 금지하고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 제도 개선만으로 우리가 목표한 바를 이룰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똑똑한 사람들이 대안을 내놓겠지’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문가·대리인 운동으로는 결코 운동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끌어낼 수 없다. 보행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모 표시 개수로 알려주는 교통 신호등이 있다. 이 신호등을 만든 사람은 누굴까. 푸른 신호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길을 건너다 즉사한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내 아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집념이 이런 신호등을 가능케 한 것이다. 입시 경쟁의 대안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피해 당사자인 우리 부모들이 나서야만 진짜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의식의 변화가 결국 생활의 변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개인으로 보자면 부모는 한없이 이기적이다. 아이가 100점 맞아왔다고 자랑하면 칭찬에 앞서 “너 말고 100점 맞은 애가 몇 명인데?”라고 묻는 게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어미의 본능이다. 이런 나쁜 의식을 바꾸지 않고는 법과 제도를 고쳐봐야 헛일이다. 곧 나쁜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 해야 할 최초의 행위는 내 안의 잘못된 의식과 대면하고 이를 바꿔나가는 일인 것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초창기부터 등대지기 학교라는 교육 강좌를 운영해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의식이 바뀐 부모들은 정말 놀라운 일을 해낸다. 사교육이나 경쟁교육을 조장하는 우리 주변의 나쁜 관행들을 신고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일이 있다. 당시 어느 회원이 한 초등학교 정문에 걸린 플래카드를 사진으로 찍어 신고했다. “6학년, 목숨 걸고 공부하는가”라고 쓰인 플래카드였다. 훗날 이 플래카드를 내건 교장 선생님이 징계를 당해 평교사로 강등됐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우리가 낸 보도자료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성적순으로 급식을 배식한 초등학교 얘기가 세간에 화제가 되었는데, 이 또한 회원이 제보한 내용을 우리가 언론에 알린 것이다. 고등학교 교장들이 입시학원 원장을 초청해 입시 설명회를 한다는 제보를 받고 문제 제기를 한 것 또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아마 제보자들도 과거에는 이런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도 무심코 지나치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식이 바뀌면서 더는 이를 간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주력하고자 하는 것은 학교 현장의 줄 세우기 관행을 타파하는 일이다. 줄 세우기를 조장하는 언론·방송 모니터링 운동도 전개하려 한다. 심지어 〈중앙일보〉는 학업성취도 평가 순위를 공개한다면서 초등학교까지 성적 중심으로 줄을 세우던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시민 모니터링을 실시해 그 결과를 공개하려 한다. 특목고-자사고-일반고 순서로 위계화한 고교 체제를 개편하고, 잘못된 영어 조기교육을 근절하는 일도 당면한 관심사다.

의식의 변화는 결국 생활과 관점 그리고 가치의 변화로 이어진다. 경쟁과 생존, 남과의 비교 따위 낡은 가치를 내려놓고 협력과 대화,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새로운 가치로 무장한 부모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원했던 세상이 완전히 오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행복감을 맛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데 나는 주목한다. 이런 가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세상도 바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이미 왔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