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6일, 바다는 평온했다. 침몰한 세월호 주변을 빙빙 도는 배가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알았다. 구조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더 애가 탔다. 속이 타들어만 갔다. 해경에, 해군에, 해수부에, 청와대에 분노가 치밀었다. 사고 다음 날인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일부 가족은 격앙됐다.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한 실종자 가족이 대통령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4월18일 오후 1시, 세월호가 바다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사고가 나고 사흘 만이었다. 그때까지 정부는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해경과 해수부가 구조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군의 구조장비와 특수요원들이 투입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이권 때문에 민간 잠수부들은 아예 수색에 나설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세월호에 공기를 주입하거나 부표를 띄우는 등 어떤 작업은 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의 분노가 차고 넘쳤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세월호 200일(11월1일)을 앞둔 10월29일. 안산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시사IN 이명익 세월호 200일(11월1일)을 앞둔 10월29일. 안산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4월18일 밤, 진도 팽목항 상황실 앞에서 실종자 엄마들은 단체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외쳤다.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4월29일, 아직까지 정부는 단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했다. 사고는 사건이 되고 참사가 되었다. 유가족들은 알았다. 정부가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높으신 분들은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미칠 파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날 안산 합동분향소에 대통령이 방문했다. 연출된 연기를 하는 할머니와 함께. 하지만 유가족 아빠는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유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진도체육관에서,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노숙을 했다. 청와대 앞에서, 광화문광장에서도. 차디찬 거리에서 비닐을 덮고 자면서도 외롭지만은 않았다. 밀려오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에 기운을 차렸다. 같이 슬퍼해주고 분노해주는 국민들의 응원에 힘이 난다고 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에 나서자, 단식을 중단하라는 단식이 시작되기도 했다. 전국에서 수만명이 동조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에 나섰다. 350만명이 넘는 국민이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서명을 했다.

대통령도 유족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4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했다. 5월16일에는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진상 규명에 있어 유족들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특검도 해야 한다. 각계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지만, 유가족 여러분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흘 뒤인 5월19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다. “세월호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한테 있다. 국가를 개조하겠다.” 박 대통령은 눈물을 보였다.

바로 6·4 지방선거가 있었다. 7·30 재보선도 있었다. 두 번의 선거에서 여당은 야당의 세월호 심판론을 뚫고 승리한다. 그러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항로를 갑자기 바꾼다.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안 좋다고. 이제는 경제 살리기에 나설 때라고. 이때부터 대통령은 세월호와 관련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세월호 특별법은 여야가 협의할 일이다.” 그러고는 세월호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4월17일 진도체육관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한 실종자 가족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연합뉴스 4월17일 진도체육관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한 실종자 가족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언론은 경제가 어렵다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보수 언론은 ‘세월호 국민대책위원회’를 ‘직업 시위꾼’으로 낙인찍고, 세월호 유가족과 연대하는 시민단체와 국민들을 ‘외부 세력으로’ 폄하했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때문에 많은 사람의 생계가 걸려 있는 민생 법안들이 전부 볼모로 잡혀 있다”라고 썼다. 언론이 전가의 보도인 경제위기 프레임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보수 단체도 세월호를 덮으려는 움직임에 적극 나섰다.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을 하는 광화문광장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회원들이 왔다. 옆에서 폭식 투쟁을 했다. 세월호 유가족 오 아무개씨는 아들 또래인 일베 청년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일베는 계속 약을 올렸다.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일 뿐인데 여기서 왜 이러느냐.” 오씨는 일베 청년을 밀쳤다. 일베는 오씨를 고소했고, 결국 유족은 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리고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10월24일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한국 세월호 참사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들추어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의 우익 단체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애도하는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국회 연설에서 ‘세월호’를 언급하지 않은 대통령

10월29일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있었다. 유가족 30여 명은 28일 저녁부터 국회 본관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 대통령을 기다렸다. 29일 오전 대통령이 국회 본청에 들어서는 순간 세월호 유족들은 절규했다. “살려주세요! 대통령님 살려주세요!” “아무 죄도 없는 내 새끼들….” 그러나 대통령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들어갔다.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소를 지었을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를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날도 유족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단원고 희생자 ‘창현이’ 아빠 이남석씨는 국회를 나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무릎을 꿇었다. 창현이 아빠는 “특별법 제정을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오마이뉴스〈/font〉〈/div〉10월29일 한 세월호 유가족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했다.
ⓒ오마이뉴스 10월29일 한 세월호 유가족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했다.

 


11월1일은 세월호 사건이 난 지 200일째 되는 날이다.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왜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했는지, 국정원은 세월호와 어떤 관계인지, 유병언은 어떻게 죽었는지, 골든타임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무얼 했는지, 7시간 동안 7차례 지시를 해놓고서는 박 대통령이 왜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왜 그렇게 발견하기 힘드냐”라고 물었는지…. 진실을 밝히려는 걸 막는 세력에 대한 특검도 필요한 상황이다.

변한 것도 없다. 국가를 개조하겠다,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했지만 모양만 살짝 바꾸는 수준이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구조를 못한 무능력한 책임자들은 아직도 높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4월27일 정홍원 국무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사의를 표명했다. 청와대는 바로 사표를 수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자 박 대통령은 정 총리를 슬그머니 유임시킨다. 사의를 표명했던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도 그 자리에 있다. 해경에도 책임을 물은 적이 없다. 구조함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해군에게도 마찬가지다. 유병언 회장이 사라지자 오직 이준석 선장에게 책임을 묻고 있을 뿐이다.

진도 팽목항에는 유가족이 되는 것이 소원인 세월호 실종자 가족이 있다. 300여 가족이 쪽잠을 자던 진도체육관에는 이제 여덟 가족(실종자 아홉 명)만 남아 있다. 진도체육관을 떠난 유가족들은 아직도 거리에서 잔다. 광화문과 청와대 앞 그리고 국회 본관 앞에서.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김영오씨는 말했다. “날이 찬데 여기가 편해요. 몸이 편해지면 아이가 더 생각나요. 나는 괜찮은데 별이 된 아이가 추울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바다에서 춥게 있었잖아요.” 단원고 김동혁군 어머니 김성실씨는 10월29일 새벽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동혁이 동생이 종일 울었나 봅니다. 반 친구들이 사소한 오해로 말하다 세월호 유가족이 거지라고 했답니다. 거리에서 잔다고. 퉁퉁 부은 눈으로 잠든 딸아이가 안쓰럽네요.”

광화문광장 세월호 천막 건너편에는 “세월호 특별법 웬말이냐. 종북 세력들 북한으로 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보수 단체 회원들이 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고성능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린다.

10월31일 세월호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했다. 참사 200일 만에야 진상 조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은 거리 농성장을 떠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이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서 특별법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지키고 있어야 한다. 특별법이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도 없다.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진실을 밝히는 것일 뿐이다. 유족들은 의사자 지정을 요구하지도, 대학 특례입학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대학 갈 아이가 죽었다고요. 지금. 근데 왜 우리가 특례입학을 요구했다고 얘길 하고 그게 먹히는지가 너무나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영혼을 위한 대학교가 있나요?”

세월호 200일.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월호는 여전히 침몰 중이고, 국가는 유족들의 무릎을 꿇리고만 있다.

 

 

 

 

ⓒ시사IN 신선영10월31일 단원고 2학년 7반 학생 유가족이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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