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교육 강좌인 ‘2014 등대지기 학교’가 5부 능선을 넘어섰다. 세월호 참사 이후 부모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 강좌는 이제 국가와 정부의 구실을 묻는 장으로 넘어갔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화두를 먼저 던진 이는 참여정부 시절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았던 전성은 선생이다. 10월7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남은 강좌를 직접 듣고 싶은 이는 이 단체 홈페이지(noworry.kr)에서 수강 신청을 하면 된다.


먼저 질문 하나 하겠다. 국가라는 게 뭘까? 대답해주실 분 안 계신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없는 모양이다. 우리 교육이 잘못돼 있다는 증거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 초반만 해도 〈국가와 교육〉(이기호) 같은 책으로 공부를 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로)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됐다. 그러니 여러분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시사IN 이명익전성은 전 거창고 교장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등 ‘교육 3부작’을 통해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보여준 바 있다.
하나 더 묻겠다. 제도란 무엇일까? (청중 가운데 누군가 “법이 뒷받침하는 거요”라고 답변) 그렇다. 우리가 결혼 제도라고 하는 것도 법으로 뒷받침되지 않나. 결혼할 때나 이혼할 때나 법적 신고를 해야 한다. 좀 더 엄밀히 얘기하자면 제도는 힘의 관계, 곧 지배-복종 관계를 묶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우리가 제도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지 못하게 했다. 제도에 대해 뭐라 했다가는 일제 총독부에 잡혀갈 것을 각오해야 했다. 자유당, 공화당, 군사 독재정권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제도를 지적하다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고, 모처로 끌려가 얻어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국가와 제도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서대문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이승만 생일인 2월16일이 되면 남산 우남정에 서울 시내 초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존경하는 이승만 할아버지께’를 주제로 글짓기 대회를 열었다. 잘 믿기지 않으시나? 북한만 이런 짓을 했던 게 아니다(웃음). 당시는 이승만을 ‘국부(國父)’라 칭했다. 도대체 국가가 뭐기에?

ⓒ연합뉴스국가는 교육을 통제하려 한다. 위는 9월25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교사 선언 기자회견.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용어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라 하지 ‘우리 국가’라 하진 않는다. 국가는 나라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과거 특정 왕조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짐이 곧 국가’라 했다. 그러면서 국가에 충성하라 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 아닌가? 단종에게 충성하는 게 충신인가, (단종을 내몰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한테 충성하는 게 충신인가. 그냥 권력 잡은 놈한테 충성하는 게 충신이다. 영화 〈명량〉의 감독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도 이것이었다고 본다. 백성을 버리고 떠난 왕한테 충성할 가치가 있냐고 아들이 묻자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답한다.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르는 것이고, 그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해야 한다”라고.

따지고 보면 유교의 중심 도덕이 충(忠)·효(孝)라는 일반의 인식부터 잘못되었다. 유교의 중심 도덕은 인(仁)과 의(義)다. 공자는 인, 맹자는 의를 강조했다. 공자가 효를 강조한 것은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논어〉에 따르면,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왕은 부모를 대하듯 백성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일반인 또한 부모를 대하듯 이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개념을 보탠 것이 맹자다. 그런데 한나라 유방이 유교를 국교로 삼은 뒤 이런 알맹이는 쏙 빼고 충·효만 강조했다. 이를 받아들인 한국의 지배층은 삼강오륜까지 보태 힘 있는 자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해왔다.

제도란 이 같은 지배-복종 관계를 드러낸다. 가부장제에 기반한 결혼제도에서는 힘 있는 자가 아버지다. 어머니는 약자다. 이런 제도는 매우 나쁘다. 그래서 나는 자녀 교육 강의를 나갈 때마다 남성들에게 내일 아침부터 커피를 직접 타서 아내에게 대령하라고 말한다. 나도 정년퇴직 이후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 집안에서 가장 힘이 센 아버지가 약자인 어머니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힘을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섬기는 게 바로 정의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섬기고, 건강한 사람이 장애인을 섬기는 게 정의다. 그런데 우리는 임진왜란을 겪고 6·25를 겪었으면서도 정의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일이 없다. 그러면서 충·효만 강조해왔다.

경제에서의 정의도 다르지 않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만큼 누구나 나눠가질 수 있어야 그것이 정의다. 도적질하고 게으르고 거짓말하는 자일지라도 최소한 먹고살 수 있게는 해줘야 한다. 아무리 나쁜 놈일지라도 자식은 공부시킬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나는 무노동 무임금이야말로 자본주의 논리 중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에게 품삯을 똑같이 나눠준 얘기가 나온다. 곧 새벽 일찍 일하러 왔건, 점심때나 오후에 일하러 왔건 보수를 똑같이 지급한 것이다. 불공정한 것 아니냐고? 예수님이 많은 돈을 준 것은 아니다. 가족이 하루 먹고살 일당을 나눠줬다. 요즘 말로 하면 최저임금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경제학이다. 지금처럼 상위 1%가 한 나라 전체 부(富)의 20%를 차지하는 건 정의가 아니다.

나는 소망한다, 교육부 독립을

그런데 정의롭지 못한 이런 제도가 가장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 것이 국가인 듯하다.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어떤 형태의 국가든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 전 단계로 먼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국가주의다. 교육을 지배하는 것 또한 국가다. 옛날부터 그랬다. 고대 이집트가 학교를 세운 것은 평시에는 세금을 거두고 전시에는 전투를 지휘할 고급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신라가 귀족 자제들을 뽑아 화랑으로 교육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종교와 비슷한 구실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곧 지배 집단의 정당성을 만들어주고 보급시키고 재창출하는 구실을 해왔다. 종교 자체가 본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뒤에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곧 ‘삼라만상이 고통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그 고통을 해결해주겠다’라고 존재의 이유를 밝히셨다. 그런데 뒤쪽을 얘기하면 곤란해지니까 지배층은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강조해왔다. 기독교 또한 사랑과 정의의 종교이건만, 후자는 쏙 빼고 사랑만 강조해왔다.

물론 오늘날에는 신라 화랑 때처럼 귀족들만 교육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교육은 여전히 국가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에 있는 270여 나라 중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교육이 국가 통제를 가장 심하게 받고 있는 나라가 일본과 한국이다. 과장된 얘기 같으신가? 외국에 살다 온 분들에게 물어보시라. 우리처럼 (중앙집권적인) 교육부가 있는 나라가 몇 안 된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교육장관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교육자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선 학교의 맨 꼭대기에 교육부가 있어서 모든 교육과정을 일일이 지시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국정교과서까지 부활시키겠다 하지 않나.

나는 교육부 폐지론자는 아니다. 그보다 나의 궁극적 목표는 교육부 독립이다. 입법부·사법부가 서로 독립된 기관이듯 교육부 또한 그래야 한다는 얘기다. 내 계산으로는 완전히 독립하기까지 짧게 잡아도 16~17년은 걸릴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는 과도기적 모델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일종의 삼각형 모델인데 각각의 꼭짓점마다 단위학교, 행정지원체제, 평가기구(민간 포함)가 있다고 머릿속에 그려보시면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들 셋이 상호 동등한 보완 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단위학교가 최종 결정권을 갖게 된다. 곧 교사가 직접 교육할 내용을 기획하고, 그 기획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르친 결과에 따라 학부모 등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이다.

유럽 중등교육에서 사회 과목의 목표는…

이는 공상이 아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다 이렇게 한다. 대학 또한 이 같은 교사의 교육 기획력을 보고 학생을 평가한다. 내가 몸담았던 거창고 산하에는 샛별초·샛별중이 있는데, 이들 학교 모두 교사에게 자율권을 주고 있다. 그러면 열성적인 교사는 밤 10시까지 남아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이끈다. 이런 교사는 또 학생들이 용케 알아본다. 그러니 다른 교사들도 열심히 따라 할 수밖에 없다. 거창고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뒤 “처음부터 우수한 애들이 모이니까 대입 실적도 좋은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 않다. 내가 거창고 8회 졸업생인데, 50년 전 그 시절에도 내 동기 상당수가 이른바 명문대에 입학했다. 단위학교와 교사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면 모든 학교가 이렇게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육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든다. 참여정부 때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으면서 내가 역점을 두고자 했던 것이 수능 등급을 완화하고 직능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입시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수능 등급을 대폭 줄여서 아예 2등급 정도로 만들자는 것이 내 제안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당시 비서실장), 이정우(정책실장) 세 사람 빼고 나머지는 다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더라. 그래서 5등급까지 양보했는데, 결국 교육부 최종 발표에서는 이것이 다시 9등급안으로 바뀌었다. 안병영 당시 교육부 장관이나 이해찬 국무총리가 9등급안을 고집했다던데, 나는 지금도 그분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직능교육 강화안 또한 예산 부족을 이유로 무산됐다.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인재 양성론에는 2300억원인가를 쓰면서 직능교육 강화에는 단돈 500억원도 쓸 수 없다더라. 참여정부에서조차 현실이 이랬다.

이는 결국 기본 철학의 문제다. 유럽에서는 중등교육의 목표가 명문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회 과목의 경우는 어떤 정책이 내게 유리하고 불리한지 판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목표다. 이를테면 환율을 올리고 내리는 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할 수 있게끔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노골적으로 펴는 후보를 가난한 유권자들이 찍어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중등교육 과정에서 이런 교육 목표만 달성되면 나머지는 자신의 재능과 소질, 그리고 관심에 따라 진로를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원하는 학생에게는 직능교육도 제공해야 한다. 이발사나 열쇠 수리공이 되려는 학생이 굳이 대학을 갈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모든 학생이 국·영·수에 몰입할 것을 요구한다. 어찌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경제·학문·언론 부문을 장악한 엘리트 권력 집단은 학벌 중심의 현 체제를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한다. 왜? 그래야만 지금처럼 사회 각 부문을 장악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으니까. 이들은 국·영·수 중심으로 교육을 계속 몰고 가야만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들이 세상을 계속 지배할 수 있음을 똑똑히 알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3분의 1, 판·검사의 70%가 특정 학교 출신으로 도배돼 있는 나라에서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나는 희망으로 생각한다. 최근 내가 ‘거창교도소 건립을 반대하는 범군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 여기서 활동하는 젊은 엄마들을 보며 많이 감탄했다. 이런 열정을 바탕으로 부모들이 우리 사회에 불공정하게 분배돼 있는 힘을 분산시키는 일에 나섰으면 한다. 일단은 교육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법적 효력을 갖는 교육감 협의기구를 만들어 교육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는 방법도 고려해봄직하다. 이제는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커피를 타주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정리·김은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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