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바다 속에 아이를 묻고 아버지는 곡기를 끊었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죠. 그냥 보내기엔 너무 미안해서요.”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동조 단식에 나선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부님, 스님, 영화인들…. 단식을 말리러 갔다가 단식을 하게 된 분도 있습니다.

ⓒ시사IN 양한모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에게 배고픔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시체 장사, 보상금 사냥꾼, 종북, 빨갱이…. “어서 죽어라!” 막말을 버젓이 합니다.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돈과 바꿉니까? 자식을 가슴에 묻고, 밥을 굶는 아버지는 통장을,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외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광화문에 갔습니다. 괜찮으시냐, 말 붙이기도 미안했습니다. 우두커니 보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유민이 아버지의 단식이 40일이 되어가자 저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아버님, 이러다 죽어요. 밤에 누가 납치하더라도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 죽습니다.”

그러던 중 문자가 왔습니다. “밥 먹었냐 물어보지 마. 목욜까지 동조 단식.” 가수 이승환 형의 문자였습니다. 형의 페이스북입니다. “대마도로 끌려간 최익현이 단식에 돌입했을 때 그 잔인한 일본군도 단식을 말리려 노력했습니다. 목숨 걸고 단식하며 만나달라는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갈치 시장이나 방문한 대통령을 두둔하는 자들, 심성이 이러니 일제 통치도 좋게 보이는 거죠.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이 형은 거인입니다. 생각이 넓고 높고 깊습니다. 새벽에는 사춘기 소년처럼 음탕하지만.

미안한 마음에 형을 따라 단식에 나섰습니다. “내가 같이 굶어줄게.” 잘하는 게 없는데 그나마 굶는 것은 자신 있었습니다. 취재하다 한두 끼 건너뛰는 건 다반사니까요. 그런데 웬걸요. 단식을 하자마자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김치찌개, 명란젓, 콜라, 맛동산, 새우깡…. 별게 다 먹고 싶었습니다. 못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단식 둘째 날은 취재원을 만나서는 마트에서 걷자고 했습니다. “도청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아니오. 사정이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는 배고픔이 달래지지 않았습니다. 승환 형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형,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 “물 마셔.” “이미 많이 마셨어.” “응. 3리터 마셔봐. 좀 괜찮을 거야.”

사흘째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침대를 긁고 있는데 유민이 아버지의 단식이 끝났습니다. 저의 단식도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휴…. 짧은 단식 후에 저는 심하게 앓았습니다. 링거를 맞아야 했습니다. 46일을 단식한 유민이 아버지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몇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유민이 아버지를 위해,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단식한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승환이 형을 위해서도….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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