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1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417호 대법정. 서울고법 형사9부 이민걸 부장판사는 선고를 내리기에 앞서 이례적으로 양해를 구했다. “헌법이 규정한 바와 같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에 따라 심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낮은 자세로 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겸허한 자세로 임하려고 노력했으니 부족하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이 부장판사는 2시간 가까이 선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내란 음모와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선고 결과가 나올 때마다 검찰과 변호인단, 피고인뿐 아니라 방청객까지 희비가 엇갈렸다.

재판부는 내란 음모에 대해서는 무죄, 내란 선동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해 징역 9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지난 2월 1심을 맡았던 수원지법 형사 12부(부장판사 김정운)는 내란 음모와 선동 등을 모두 유죄로 보아, 이 의원에 대해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한 바 있다.

ⓒ연합뉴스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이 8월1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렸다.

2심 판결 직후 검찰과 변호인단은 ‘균형적 불만족’ 반응을 나타냈다. 검찰은 내란 음모가 무죄가 나자 반발했지만 내란 선동 혐의를 인정받아 징역 9년을 내린 점에 대해서는 만족을 표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내란 음모가 무죄면 내란 선동 역시 무죄가 나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사건의 핵심이었던 RO(지하혁명조직)에 대해 재판부가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점은 평가했다. 통합진보당의 한 관계자는 “당 안에서도 1심과 똑같이 내란 음모, 내란 선동 모두 유죄가 날 줄 알았다. 내란 음모 무죄판결은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내란 음모 혐의와 RO의 실체에 대해 1, 2심 재판부의 판단이 엇갈린 것은 제보자 이 아무개씨의 진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였다. 1심 재판부는 “내란 음모 사건 제보자의 진술 신빙성이 인정되며, RO라는 지휘체계를 갖춘 조직이 존재한 사실도 인정된다”라고 판단했다. RO라는 조직이 있고, 130여 명이 참여한 5월12일 합정동 모임도 내란 실행을 합의한 자리로 본 것이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제보자 이씨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지만, 제보자가 직접 경험한 소모임 활동 외 (RO) 조직체계, 구성원 등에 관한 것은 추측 진술에 불과하다.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RO) 존재가 엄격하게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단했다. 제보자 이씨가 참여한 소모임은 인정하더라도, 이것이 곧 RO의 점조직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변호인단의 전술 변화도 주효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1심에서 변호인단은 제보자 이씨를 국정원 공작에 넘어간 ‘프락치’로 몰아붙였다. 변호인단은 그의 진술 전체를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씨는 민주노동당 창당 멤버이자, 선거 때 후보로도 출마한 적이 있어서 진술이 구체적이었다. 이에 따라 2심 때는 그의 경험 진술과 추측 진술을 분리해, 경험에 근거한 진술은 인정해주고 추측에 근거한 진술은 조목조목 반박했다. RO에 대한 진술은 재판부가 보기에도 추측 진술에 해당했다.

2심 재판부가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RO는 이석기 의원 사건에서 국정원과 검찰이 내세운 중심축이었다. 검찰은 이 의원을 기소하며 ‘RO는 대한민국 체제를 폭동으로 전복하고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하려는 조직’으로 보았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 모든 것이 실체가 불분명하다고 보았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RO가 무너진 것은 이석기 사건에서 거대한 ‘싱크홀’이 생긴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RO 실체가 사라지면서 내란 음모 혐의에서도 벗어났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형법상 내란음모죄의 성립 요건인 ‘내란 범죄의 실행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기 부족하다. 검사가 제출한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내란 음모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 판결로 법무부 전략에 빨간불

다만 2심 재판부는 내란 선동 혐의에 대해서는 “선동 상대방이 가까운 장래에 내란 범죄를 결의, 실행할 개연성이 있다면 충분히 내란선동죄를 인정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민걸 부장판사는 “헌법과 국회법에 따라야 할 국회의원의 주도 아래 국가 지원을 받는 공적인 정당 모임에서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해할 수 있는 내란선동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라며 징역 9년을 선고한 배경을 설명했다.

ⓒ시사IN 이명익2심 선고 결과가 나온 8월11일 이석기 의원의 누나 이경주씨(휠체어에 앉은 이)가 흐느끼고 있다.

이번 2심 재판부 판결은 헌법재판소가 다루는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건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8월12일까지 12차 변론을 가졌다. 지난해 11월 정당해산 심판 청구를 낸 법무부는 ‘통합진보당은 RO의 외부 조직으로, RO 핵심 구성원이 당의 의사 결정에 직접 관여한다’고 주장했다. RO와 통합진보당을 동일시한 셈이다.

이 같은 주장은 1심 재판 결과로 더 힘을 받았다. 법무부는 지난 6월 9차 변론 때 회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RO 제보자인 이 아무개씨를 정당 해산 심판 건에도 증인으로 신청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씨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그가 증인으로 나서기도 전에 2심 재판부가 RO에 대한 이씨의 진술을 ‘추측’이라 판단하면서, 법무부의 전략에 빨간불이 켜졌다. 법무부가 정당 해산의 근거로 내세운 RO의 실체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2심 재판 다음 날 법무부는 민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RO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겠다며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도 증인으로 신청했다.

법무부는 2심 재판부도 ‘진보적 민주주의’ 내용이 담긴 책자를 이적 표현물로 보았다는 점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통합진보당 강령인 ‘진보적 민주주의’는 김일성 사상으로, 목적 위헌성을 보여주는 강령이라고 법무부는 주장해왔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해준 판결이라고 법무부는 2심 판결을 해석했다. 법무부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에 매달리는 이유가 있다. 법무부의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청구는 주로 1956년 독일 공산당(KPD) 해산 판례를 따왔다. 첫 변론기일에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독일 공산당 해산 사례를 들어 통합진보당 해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당시 “독일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지도이념이 정당 활동과 무관하게 독일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반한다”라며 해산의 주요 논거로 삼았다.

통합진보당에서는 2심 판결로 위헌정당 해산 재판은 한고비 넘긴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28쪽 관련 기사 참조). 8월12일 헌재 12차 변론 때 통합진보당 변호인단은 “RO의 실체가 인정이 안 된다고 어제 판결이 났다. 그런데도 법무부가 자꾸 RO 사건이라 부르는 것은 사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헌재는 이석기 의원 사건의 판결문, 공판조서 등에 대한 증거 조사를 8월26일 13차 변론에서 한다.

이석기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사실심’은 1·2심으로 마무리되었다. 검찰과 변호인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법률심’으로 하급심이 법리 적용을 제대로 했는지 살펴본다. 내란 혐의에 대해 1, 2심이 엇갈리면서 위헌정당 해산 심판 관련 헌재 결정도 대법원 판결 뒤에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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