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야스오 전 일본 총리가 7월27일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났다. 후쿠다는 이미 올 상반기에 일본 정국의 막후 인물로 떠올라 있었다. 자민당 내 반(反)아베 세력의 정점이기도 하면서, ‘외교 총붕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인 아베 정권을 측면 지원해 일본 외교를 구해야 할 모순된 사명을 짊어진 인물이다. 상반기에 잠깐 존재감을 드러냈던 그가 잠행을 거듭하다 드디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국가 주석 취임 후 일본 측 인사를 일절 만나지 않던 시진핑 주석을 지난해 4월 하이난 섬에서 열린 아시아 다보스 포럼에 이어 또다시 만났으니 일본으로서는 ‘사건’이다.

후쿠다의 부상으로 기세등등하던 아베의 권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도 의문이다. 고이즈미 총리 시절 후쿠다 관방장관 밑에서 아베가 부장관을 맡았다. 둘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견해도 달랐다. 납북자 문제를 둘러싸고 후쿠다가 관방장관에서 물러나기까지 했다. 서로 악연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중국과 관계를 개선해야 하지만, 아베로서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인물이다. 측근들에게 특명을 내려보기도 했다. 야치 쇼타로 초대 국가안전보장회의(일본판 NSC) 사무국장이 첫 주인공이었다. 아베 1차 내각 때 아베의 방중을 성사시켜 대중국 외교의 마지막 보루라 여겨졌던 인물로, 기대가 컸지만 불발에 그쳤다. 극비 방중을 통해 다이빙궈와 왕이를 접촉했으나 견해차만 확인했다. 중국 측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영유권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 ‘중국과 일본의 공선(公船)이 각각 센카쿠로부터 12㎞ 이내에 접근하지 말 것’을 중·일 정상회담 조건으로 내세웠다. ‘중국이 센카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게 일본 측이 제시한 안이었으나,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야치 다음에는 사이키 아키타카 현 외무성 사무차관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후쿠다에게 밀렸다.

자민당 내 ‘반 아베 세력’ 형성

아베가 견원지간이라 할 후쿠다 전 총리에게 기대 중·일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면, 그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민당 내에 기존 주류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反)아베 포위망이 광범위하게 구축돼 있다. 게다가 지난 7월1일 집단자위권 해석 강행으로 아베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체감 경기는 여전히 좋지 않아서 ‘아베노믹스’에 대한 환상도 많이 사라졌다. 소비세 인상 효과가 여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면 소비 위축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구의를 보듯 전 세계를 대상으로 외교를 펼친다며 ‘지구의 부감 외교’ 운운했지만, 정작 가까운 한국·중국과의 갈등으로 ‘외교 총붕괴’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 스스로 해결할 능력조차 없어, 반대 진영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다. 일본의 한 언론은 아베가 지난 4월 당내 온건파 성향 원로에게 중·일 정상회담의 환경 조성에 나서줄 것을 당부하는 모습을 두고 ‘추태를 보였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여곡절만 아니었다면, 정권의 위기가 더욱 빨랐을지도 모른다. 임기 첫해 아베와 측근들의 독주에 침묵해오던 자민당 내 주류 온건파가 꿈틀대기 시작한 계기는 지난 2월1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였다.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에 대해 “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내각 법제국장이 아니라 바로 나다”라는 둥 아베의 오만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동안 아베의 인기에 눌리고 당 지도부에 찍히면 차기 선거를 보장받을 수 없는 소선거구제의 맹점으로 인해 침묵해왔던 당내 리버럴 세력의 불만이 드디어 폭발했다. 3월17일에는 그동안 총리 관저의 의향대로 운영되던 자민당 총무회가 9년 만에 처음으로 열려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려면 해석 변경이 아니라 헌법을 개정하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고가 마코토 등 각 파벌의 원로들이 막후에 등장했다. ‘경제 중시, 경무장’을 앞세우고 외교를 중시하는 게 한·일 의원연맹(의련)이나 중·일 의련 등에 소속된 이들 주류 온건파의 노선이다. 아베가 밀어붙이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해석 변경이 근린 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흉으로 떠오르자, 각 파벌 단위로 연구회를 조직해 4월부터는 본격 대응에 나설 참이었다. 자민당 최고위 간부가 후쿠다 총리를 찾아가 “한국·중국과 관계가 이대로 계속되면 일본 경제에 심각한 영향이 온다”라며 측면 지원을 당부한 게 3월 하순. 후쿠다의 움직임 역시 파벌 원로들이 진행한 일련의 막후 활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오바마 발언 이용해 자위권 해석 변경 밀어붙여

미·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미국이 더 이상 아베 정권의 뒷배를 봐주지 않는다는 점 역시 중요한 신호였다. 지난해 12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결행한 직후, 주일 미국 대사관이 내놓은 첫 반응은 ‘실망했다’였다. 그런데 국무부의 원래 표현은 이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뒤로도 아베 측근들의 부적절한 발언들로 올해 초 이미 미·일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친미 보수 노선을 견지해온 자민당 온건 세력에게 반아베 포위망 구축의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 셈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바로 4월23~25일 진행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이다. 4월25일의 미·일 공동성명에서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센카쿠 열도가 미·일 안보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이라고 밝힌 것은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였다. 이로써 유사시 미군이 센카쿠 사태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졌고, 아베와 일본 우파들로서는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을 밀어붙일 절호의 기회로 떠올랐다. 즉 “미군이 도와주려 해도 일본 자위대가 동맹국을 위해 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다”라는 식으로 자위권 해석 변경의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7월1일 각의 결정까지 밀어붙이게 된 것이다.

사실 공동성명 내용이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 약속이라기보다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는 점은 전문가들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미·일 안보조약 제5조에는 나토 조약 제5조에 없는 ‘각국이 헌법상의 규정과 절차에 따른다’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즉 센카쿠가 안보조약 대상이지만 이에 대한 개입은 미국의 경우 의회 동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부시 정권의 두 차례 전쟁으로 피폐해진 미국 사회가 무인도를 둘러싸고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일을 허용할 리 만무하다. 따라서 오바마의 발언은 실제로는 중국에 대해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을 시도하지 말라는 구두 경고의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2014년 필리핀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환영 만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10년간 기지 사용 및 미군의 순환배치와 관련된 협정을 필리핀과 맺었다.
왜 이런 경고가 필요했는지는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은 원래 아시아 회귀전략(Pivot to Asia)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치중됐던 미군 병력을 아시아로 재배치하겠다는 것이 바로 회귀(Pivot)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드러난 대상은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이다. 미국 아·태 전략의 새로운 거점인 인도양 한복판의 영국령 디에고가르시아 섬에 있는 해·공군 기지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인도, 오른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을 연결한다. 이를 통해 중국이 진주목걸이 형상으로 인도를 포위하면서 동중국 쪽의 제1열도선과 연결하려는 전략을 분쇄하겠다는 것이 바로 아시아 회귀전략의 핵심이다(위 그림 참조).

2011년 1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연설에서 1차로 오키나와 주둔 미국 해병대 2500명을 오스트레일리아 다윈 기지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다음 목표가 1992년 미군이 철수한 필리핀에 재주둔해 남중국해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오바마가 2012년 10월 필리핀을 방문하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다가 지난 4월28일 비로소 방문해 향후 10년간의 기지 사용 및 미군의 순환배치 관련 협정을 맺었다.

그런데 그사이 국제 정세의 중요한 변화들이 발생했다. 먼저 미·중 관계의 악화다. 지난해 6월 캘리포니아 미·중 정상회담 때만 해도 중국의 경제 협조와 미국의 신형대국 관계 수용이라는 빅딜이 성립되는 듯했다. 당시 중국은 경제 협력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가로 중국 함선이 제1열도선을 벗어나 서태평양에 진출하는 것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곧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전략을 견제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양적완화 축소의 여파 때문에 중국의 협조가 절실했던 오바마 정부가 고심 끝에 지난해 11월20일 수전 라이스 보좌관의 연설을 통해 중국 측 요구에 긍정적 신호를 보냈는데, 그 3일 뒤에 중국은 한술 더 떠서 방공식별구역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에는 미국이 비교적 시원스레 대응했지만 국방부를 중심으로 부글부글 끓었을 것은 당연하다. 연말께부터 미국 경제가 호전되어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고, 올 2월 크림반도 사태까지 겹쳐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천명할 필요가 생겼다.

“좋은 아베, 나쁜 아베, 불확실한 아베가 있다”

“오바마의 방일로 아베는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입었다.” 이런 평가가 나온 4월 미·일 정상회담은 아베에게는 행운이었지만, 과연 그 행운이 얼마나 오래 갈지 의문이었다. 워싱턴 정가의 반응이 보여주듯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오바마의 일본 방문의 핵심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돌파구를 여는 것이었으나,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국빈으로 초대해놓고 망신만 준 셈이다. 오바마의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아베 정권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미국 곳곳에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지고, 국무부와 백악관 관리들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만났으며, 앞으로는 외교안보 당국자까지 만남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58~59쪽 기사 참조). 미국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유엔 인권기관들 역시 최근 총출동해 아베 정권을 난타하고 있다. 미국 내 지일파 인사들의 경고 발언을 보면, 우연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일본 우파 잡지 〈보이스(Voice)〉 8월호에 실린 글렌 S. 후쿠시마라는 사람의 글이 대표적이다. 미국 통상대표부(USTR) 일본 담당으로 오랫동안 근무했고, 주일 미국 상공회의소 대표 등을 역임한 그의 글은 제목부터 ‘워싱턴에서 바라본 좋은 아베, 나쁜 아베’이다.

일본 경제 회생을 위해 애를 쓰는 아베는 ‘좋은 아베’이고, 전후 역사를 제멋대로 개정하려는 아베는 ‘나쁜 아베’란다. 일본 이외에는 지지하는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평가가 민주당만이 아니라 워싱턴 전체의 평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불확실한 아베’도 있다. 집단적 자위권, 무기 수출 변경, 특정비밀보호법 등 안보 정책을 바꾸려는 아베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들은 좋게 보지만, ‘더욱 광범위한 정책 전문가들이나 학계, 매스미디어 관계자들’은 나쁘게 본다.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아베 정권의 참된 동기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할 때 도쿄 재판 결과를 수용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전후 레짐(체제)에서 탈각하겠다면, 세계 질서의 기반을 흔드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이 근본적으로 아베 정권을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글은 경고로 끝난다. “일본은 자국이 제3의 경제대국이면서 세계무대 협역의 지위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미국이 아베 정권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면서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 변경에 찬성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일본의 돈과 자위대 인력의 활용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정부의 국방비 삭감으로 줄어든 부분을 일본이 방위비를 늘려 메워주기 바라는 것이다. 또 집단적 자위권을 명분 삼아 께름칙하고 지저분한 임무는 자위대가 대신해주기를 희망한다는 얘기도 있다. 일본 방위정책에 깊숙이 관여해온 야마자키 다쿠 전 자민당 부총재는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이제 늙은 경찰이기 때문에 데리고 다닐 경찰견이 필요하다. 거기에 아베가 놀아나고 있다”라고 혹평했다.

미국은 지금 아태 지역 미군의 중심을 인도양 및 동남아로 이동시키려 하고 있다. 동북아는 미국이 뒤에서 거중 조정하고 일본이 대리인 노릇을 해주기 바라는 모양새다. 그러려면 대리인이 잘해야 한다. 역사 문제로 분란이나 일으키고 군사력을 강화하겠다고 해서 긴장을 조성하면 미국이 안심하고 맡길 수 없다. 그동안은 말로 경고했지만 그래도 듣지 않으면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게 최근의 흐름인 듯하다.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가 분수령이 되라라 보인다. 아베를 반대하는 파벌 간 합종연횡이 일어날 경우 아베의 장기 집권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흘러나온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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