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대안교육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민주교육회의(IDEC·International Democratic Education Conference)’가 지난 7월27일~8월3일 경기도 광명에서 열렸다. 올해로 22회째를 맞은 IDEC 개막 연설의 주인공은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미국의 대표적 대안학교인 알바니 프리스쿨에서 40여 년간 교사·교장으로 재직하며 실천적 교육운동을 벌여온 그는 “민주교육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청년을 기른다”라는 의미심장한 주제로 한국의 학부모·학생·교사 앞에 섰다. 〈길들여지는 아이들〉(민들레 펴냄)이라는 신간을 최근 발표하기도 한 그의 연설을 지상 중계한다(내용 일부는 7월25일 하자센터 강연에서 보충했다).

슬픔 속에 이 자리에 섰다. 어젯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시청 앞 광장을 찾았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맞아 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거기 모인 분들의 슬픔, 비애, 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소중한 어린 생명들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나.

그 배 승무원이 교사와 학생들에게 “자리로 돌아가 가만있으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전체의 4분의 3가량 되는,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그 말을 따랐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나는 오늘 여러분과 이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 여러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을 것이기에 너무도 조심스럽지만, 양해를 해주신다면 이 얘길 해보고 싶다.

나는 일부 외신에서 지적하듯 한국인의 독특한 순종적 기질 내지 문화 때문에 이번 비극이 발생했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도 2001년 9·11 테러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 중 한 건물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을 때 나머지 건물은 무사했다. 충돌 직후 이 건물 내부에서는 이런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안전하니 계속 근무하셔도 됩니다.” 이를 믿고 건물에 남아 있던 600여 명은 20분 뒤 두 번째 비행기가 해당 건물에 충돌했을 때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시사IN 신선영IDEC의 개막 연설을 맡은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사진)는 “민주교육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청년을 기른다”를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그는 ‘길들여지는 아동기’가 병든 사회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함께 일하던 1400명가량은 방송을 무시하고 곧바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맞은편 빌딩에서 뭉게뭉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광경을 보며 그들의 본능은 아마도 “어서 이 건물을 빠져나가!”라고 외쳤을 것이다. 본능을 따른 이들만이 살아남은 셈이다. 나는 때로 ‘비행기가 향한 곳이 무역센터가 아니라 공립학교였다면 어땠을까’라는 무서운 상상을 해보곤 한다. 아마도 사망률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끔찍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홀로코스트를 떠올려보자. 당시 나치가 유대인 대량학살을 시작했다는 증거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인 대다수는 이들 증거를 외면하고 정부의 프로파간다(선전)를 그냥 믿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인간이라는 존재는 권위에 도전하기보다 기꺼이 순종하는 쪽을 택하는 걸까? 그것이 인류를 파멸에 몰아넣을 만큼 악한 권위였는데도, 왜?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전쟁이 끝난 뒤로도 구미의 많은 학자들을 사로잡은 연구 주제였다.

그중 한 사람, 홀로코스트가 시작되기 직전 미국 망명에 성공한 운 좋은 유대계 독일인이 있었다. 〈자유로부터의 탈출(Escape from Freedom)〉을 쓴 에리히 프롬이다. 책 이름이 참 독특하지 않나? 자유를 향한 탈출이 아니라 자유로부터의 탈출이라니…. 그의 주장인즉, 모든 권위주의적 사고의 뿌리에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믿음, 곧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내 인생이 좌우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행복하려면 외부의 강력한 힘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게 최선이다. 말 그대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나는 것이다. 권력 처지에서 보자면 이렇게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기는 너무 쉬운 일일 것이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젊은이들의 우울증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내면의 야생성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모든 것을 통제하는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이런 야생성이 시들게 된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며,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막히면 내면의 자유(inner freedom)를 잃게 되는 것이다. 칠판 앞에 앉아서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고 어른들의 지시를 받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유를 원치 않는다. 그보다는 외부의 힘에 기대 외부 권위자가 시키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 안주하려 든다. 당연히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도 없다. 부모나 교사 등 남의 기대나 칭찬에 의지해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사람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수동적으로 남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거나, 아니면 내가 직접 권력을 끌어모아 지시하고 명령 내리는 사람이 되거나. 이렇게 파시스트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 듀이가 말한 대로 우리가 그간 지켜온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건 외부의 적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요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는 우울증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우울증이란 게 뭔가? 100% 수동적인 상태, 다시 말해 숨만 쉴 뿐 아무런 의욕도 의지도 없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했다. 우리 학교(알바니 프리스쿨)에 오는 학생들도 대부분 비슷하다. 집에서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상처받고 학교에서는 형편없는 성적 때문에 힘들어하다 거의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상태로 입학했던 코디라는 학생이 생각난다. 그 아이는 학교에 온 첫날 긴장이 사라지더라고 말했다. ‘아, 이곳에선 내가 흥미로워하는 것들을 내 속도대로 배울 수 있구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회의하면서 학교를 직접 내 손으로 운영할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이 보이면서 인생이 180° 변했다는 것이다. 훗날 졸업을 앞두고 코디는 이 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평생 뭘 하고 살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해결 방법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의 야생성을 회복하는 이런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가 ‘생리적 욕구’ ‘안정에 대한 욕구’ ‘정서적 욕구’ ‘사회적 인정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5단계로 나뉜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래 단계의 욕구가 충족돼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단계를 건너뛰는 일은 불가능하다. 곧 10시간 공부하고 집에 와서 4시간 숙제하며, 부모와 사회의 기대에 맞춰 사느라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되지 않은 아이들이 세상에 나아가 뭔가를 바꿀 수는 없다는 얘기다.

내가 오늘 (권위주의 교육과 반대되는) 민주교육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어떤 사회에서든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아이를 기르면 사회 전체가 파시즘으로 흘러갈 위험성이 커진다. 고도로 통제된 상황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아이들 스스로 자신감과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와 경험을 차단했다가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추모제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잊지 말자”였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게끔 가르친다. 한국인들 또한 세월호의 비극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기 바란다. 학생들의 죽음을 헛되이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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