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믿기 힘들어하지만 나는 기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이번 기사는 개인적인 경험은 행간에만 녹인 채 마치 남의 일처럼 쓰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공교롭게도 어느 날 예배 시간이 당대 최고 인기 만화 〈은하철도 999〉 방영 시간과 겹쳤다. 생애 처음으로 어려운 선택의 순간을 맞았다. 친구들은 모두 교회를 포기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한 시간을 걸어서 교회에 갔다. 목사님의 설교는 언제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었다. 그때 나는 자꾸 묻는 소년이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천국에 가나요?” “그렇단다.” “예수님의 말을 실천하면서 살다 죽은 스님은 천국에 못 가나요?” “당연히 못 가지.” “조선시대·고려시대에는 예수님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조상들은 천국에 못 갔나요?” “그렇단다.” 예수님이 쩨쩨하다는 생각을 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은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이다. 교황은 브라질, 팔레스타인에 이어 세 번째 순방국으로 한국을 택했다.
ⓒAP Photo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은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이다. 교황은 브라질, 팔레스타인에 이어 세 번째 순방국으로 한국을 택했다.


조용기·곽선희·김홍도 등 이름난 목사의 설교를 많이 들었다. 역시 핵심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었다. 그리고 모든 설교는 헌금으로 통했다. “십일조 안 하면 암에 걸린다” “누가 헌금을 많이 했는지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 해보자” 등등…. 성직자의 성추문보다 참기 힘든 것이 돈에 대한 집착이었다. 목사의 비리를 취재할 때마다 사탄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것은 애교로 넘길 정도였다. 교회가 커지고 돈에 가까워질수록 교회는 신과 멀어졌다.

가톨릭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예수 장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마피아’라는 세간의 비난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 십자가를 앞세워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약자를 수탈했던가.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인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분으로 제국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비센테 데 발베르데 신부가 태양의 아들인 잉카제국 아타왈파 황제를 향해 걸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십자가를 들었다. 그는 여기 하느님이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쓰레기라고 외친다. 황제가 물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성경 말씀입니다.” “이리 가져오너라. 내게도 그렇게 말하는지 보자.” 황제는 성경을 뒤적인다. 그리고 귀에 대고 흔들어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나.” 황제는 성경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숨어 있던 피사로가 황제를 사로잡았다. 황제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죄명은 신성모독이었다. 쇠줄이 목을 조이기 직전, 황제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프란체스코.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람의 이름이다. 황제는 ‘유럽인의 천국’ 문을 두드렸지만, 그곳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유럽인은 성경을 던져놓고 금을 싣고 떠났다. 수탈된 대지에 남은 원주민의 손에는 성경이 쥐여져 있었다.(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책 〈불의 기억〉 중에서)

한국 가톨릭 수뇌부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섰는가

한국 가톨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고 김수환 추기경의 헌신과 희생이 큰 몫을 했다. 덕분에 타 종교에 비해 가톨릭의 신뢰는 높다. 하지만 가톨릭 수뇌부는 민중과 가난한 자보다는 권력자와 부자 편에 서곤 했다. 조선교구장인 뮈텔 주교는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 고해성사를 원한 안중근 의사의 요청을 거부하고 파문했다. 한국 가톨릭은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의 사상적·인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사학법 개정 문제로 궁지에 몰렸을 때 그녀를 구한 것도 대구대교구를 필두로 한 가톨릭이었다. 특히 한국의 추기경들은 보수적 색채가 강해, 조선·중앙·동아 등 보수 신문에만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을 믿었다. 하느(나)님을 믿었다. 기도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종교에서 멀어졌다. 종교는 나약한 인간이 자신을 위로하고 의지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말했다. “한국의 젊은이가 교회에 나가지 않을수록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다. 지금 한국의 교회는 민중을 기만하고 억압하며 예수의 십자가를 배반하고 있다.”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종교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종교를 걱정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종교를 과학적으로 비판한 옥스퍼드 대학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는 통쾌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환각에 불과하다며 과학적인 증거들을 나열했다. “가장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맨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어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등에서 제시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이야기’ 수준에 불과하다.” ‘지구상에서 신이 사라진다면 인간 스스로 도덕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리처드 도킨스 교수의 주장에도 공감했다. 종교로 인한 전쟁과 살육은 끊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2013년 12월17일 교황은 자신의 77세 생일에 노숙자 4명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AP Photo 2013년 12월17일 교황은 자신의 77세 생일에 노숙자 4명을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어느덧 냉담자가 되어버린 기자의 눈에도 매력적인 종교인이 나타났다. 바로 교황 프란치스코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교회가 장사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보낸 편지에서 교황은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살면 된다고 밝혔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습니다. 무신론자에게는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죄가 됩니다.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지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늘 판단하게 합니다.” 〈라 레푸블리카〉와의 대담은 더욱 놀랍다. “남을 개종시키려 드는 것은 실로 허황된 짓이지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서로를 알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히는 것, 우리에게는 바로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등장부터 남달랐다.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 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베드로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의 첫 인사는 겸손함 그 자체였다.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잠시 침묵하며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교황 선출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큰 죄인입니다. 하느님이 고통 속에 보여주신 자비와 인내를 믿습니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제공 사진은 교황이 2008년 추기경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 난민 수용소 미사에서 가난한 이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입맞춤하는 모습.

 


13조원대의 자산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거느린 교황은 가난한 삶을 지향한다. 12월17일 교황은 자신의 77세 생일에 4명의 노숙자를 초대해 함께 식사를 했다. 한 노숙자의 반려견도 자리를 함께했다. 교황은 종종 신부 복장으로 거리에서 노숙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했다. 스스로를 ‘로마 주교’라 낮춰 부르는가 하면, 교황 저택이 아니라 게스트하우스에서 산다. 다른 사제들과 함께. 운전기사를 두지 않고 직접 작은 자동차를 운전하기도 한다. 교황은 추기경 시절에도 관저가 아니라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전용 차량을 마다한 채 버스를 이용했다. 요리를 하고 옷도 직접 수선한다. 모피와 명품을 애용해 구설에 오르던 전임 교황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한국의 추기경이나 대형 교회 목사의 몸가짐과도 거리가 멀다.

첫 외부 일정으로 ‘난민의 섬’ 찾아

전 세계 12억 신도의 수장인 교황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삶을 지향한다. 교황의 첫 공식 외부 일정은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 방문이었다. 지중해의 작은 돌섬으로, 아프리카계 난민 수만명이 몰려드는 곳이다. 교황은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바다에서 생명을 잃은 수많은 난민을 위해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형제로서의 책임감도 상실했습니다. 현 사회가 만들어낸 참혹함입니다. 우리는 이제 회개해야 합니다.” 얼마 후 교황은 이탈리아 로마의 한 난민수용소를 방문해 수도원을 난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고 했다. “우리의 것이 아닌 이 공간을 전쟁과 고난으로 고통받는 난민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수도원은 호텔이나 식당으로 개조한 경우가 많다. 로마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영토에 집착해오지 않았던가? 성모병원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병원을 폐쇄하고 아파트로 개발하겠다던 서울교구 고위 성직자가 떠올랐다. 주변 땅을 차명으로 사들여 주민과 마찰이 끊이지 않는 충북 음성의 꽃동네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교황은 교회의 어두운 사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에게 성추행당한 피해자 6명을 만난 뒤, 고개를 숙였다. “사제의 성추행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통곡하면서 참회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로마 가톨릭은 동성애와 낙태 문제에 극도로 보수적인 시각이었다. 피임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가톨릭은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 교황은 동성애와 낙태에 대한 자비를 촉구하고 나섰다. “우리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도덕체계가 ‘카드로 만든 탑’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어찌 내가 하느님을 찾는 게이들과 이혼한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공개 비난한 사건 이래 이만큼 개혁적인 연설은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사제단. ‘박근혜 퇴진 시국 미사’ 이후 ‘종북’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시사IN 신선영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사제단. ‘박근혜 퇴진 시국 미사’ 이후 ‘종북’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교황의 첫 해외 순방지는 브라질이었고, 두 번째는 팔레스타인이었다. 8월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 번째 순방국으로 한국을 택했다. 그동안 교황의 메시지는 한국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주로 지도자와 기득권에 대한 일침이었다. “가난한 자는 힘든 일을 하면서 박해를 받는데, 부자는 정의를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갈채를 받습니다.” “과거엔 유리잔이 차면 흘러넘쳐 가난한 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유리잔이 찬 뒤 마술처럼 잔이 더 커져버립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대신해서 새로운 경제개발 모델을 찾을 때가 됐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낙수효과를 신주 단지처럼 모시면서 대기업을 위한 감세와 규제 완화를 밀고 나가고만 있다.

박창신 원로신부가 시국 미사에서 2012년 대선은 국정원이 개입한 부정선거였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퇴진하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부와 언론은 박 신부를 종북으로 낙인찍기 바빴다. 가톨릭도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사제의 직접 정치 개입은 잘못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교황은 밝히고 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겐 의무입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한 다양한 길 중의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김인국 신부는 책 〈새로운 독재와 싸울 때다〉에서 “지금으로 봐선 교황의 가르침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분들이 유감스럽게도 그분들(정진석 추기경과 염수정 추기경)이다”라고 적었다.

2014년 한국 교회 주류의 기준에서는 ‘빨갱이’가 분명한 교황이 우리에게 온다. 하지만 교회에 넌더리를 내며 등을 돌린 많은 잠재적 신자에게 언제나 복음을 돌려주는, 바로 그분이 오신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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