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이들을 움직였을까. 교육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시사IN〉이 세칭 ‘앵그리 맘’이라 불리는 이들의 속내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이 모인 날은 공교롭게도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한 6월25일. 윤지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가 권혁소 시인(고성중 교사)의 〈껍데기의 나라를 떠나는 너희들에게〉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날 좌담을 지상 중계한다.
오지숙:세월호 사고 직후 울기만 하다 유경근씨(현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와 ‘페친’(페이스북 친구)을 맺게 됐다. 그분이 딸 예은이를 기다리며 팽목항에서 매일 올리는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예은이가 내 딸처럼, 세월호 참사가 내 일처럼 여겨졌다. 4월25일 마침내 예은이가 떠오른 뒤 유경근씨가 “우리 딸 여전히 예쁘네요”라고 쓴 글을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곧바로 안산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바로 옆방에 단원고 남학생 빈소가 있었다. 영정 앞에 엄마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다시 조문을 하러 들어갔다. 그분이 고맙다면서 그러셨다. “안타깝지만 어쩌겠어요. 늘 그랬듯 잊히겠죠.”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힘없는 엄마의 심정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아이를 잃어도 저랬겠지’ 싶었다. 그날 나도 모르게 그분께 약속했다. “제가 뭐라도 하겠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 안 되면 광화문에 나가 피켓이라도 들고 서 있겠다”라고.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사흘 뒤인 월요일(4월28일)부터 광화문 광장에 나섰다.
사회:왜 하필 네 시간씩 시위를 한 건가?
오지숙
임진영:페이스북에서 오지숙씨 시위 소식을 접하고 정말 놀랐다. 분당-광화문을 매일 오가면서 점심도 거른 채 하루 네 시간씩 시위를 하다니…. 게다가 정장에 하이힐 차림으로.
오지숙:가장 정중한 방식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김주희:난 개인적인 사연이 좀 있었다. 처음에 세월호 침몰 뉴스가 나오고 “전원 구조됐다”라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가 다시 배 안에 300여 명이 갇혀 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했다. 그런데 집에 갔더니 고3 아들이 “엄마, ○○가 배 안에 있대요” 하는 거다. 알고 보니 중학교 후배로 가깝게 지냈던 ○○가 단원고생이었다. 그 뒤로 정신 나간 시간을 보냈다. 뉴스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더니 아이들이 내 스마트폰과 신문을 몰래 치워버리기도 했다. ○○가 나온 것은 5월14일이었다. 노제에 참석하러 단원고에 갔는데 거기서 잠깐 정신을 잃고 말았다. 2학년 교실 책상 위에 국화꽃이 일제히 놓여 있고, 그 책상 서랍에 아이들 소지품이 그대로 들어 있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임은주:나는 본래 겁이 많은 사람이다. 팽목항이나 안산 합동분향소에는 도저히 못 가겠더라. 지금도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 올라올 때가 많은데, 그게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사람들도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일단 피하고 보자는 반응인 듯하다. 남편이 토요 추모집회에 참석한 뒤 “이제는 짐을 좀 내려놓은 것 같다”라고 하는 걸 보며 씁쓸했다. 그게 보통 사람들의 정서인 것 같아서.
김주희:장례식에서 동생이 눈물을 한 번도 흘리지 않는 게 마음 아팠다. 엄마가 너무 큰 슬픔에 잠겨 있다 보니 아이가 저라도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 우리 아이들도 내 앞에서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 그때 만나자고 한 날 못 나가서 미안해” 같은 글을 SNS에 올리는 걸 보면 우리 아이들도 힘들어하는 게 분명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내색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게 또 다른 고통이다.
사회:세월호 진상 규명에 대한 요구와 별개로 한쪽에서는 세월호가 점점 잊혀가는 분위기다.
임진영: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진범은 따로 있는데, 자꾸 구원파와 유병언만 들먹이는 것도 문제다. 우리의 분노는 진범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명운동도 벌이는 거고. 쉽지는 않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서명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더니 목사님이 “사람마다 신앙의 색깔이 다른 법”이라 하시더라. 그 말에 충격받았다.
강영희:나도 개신교인인데, 다른 교회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일을 겪으며 한국 개신교 안에 구원파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 대신 돈과 권력을 섬기는.
임은주:나는 서명에 무관심한 사람들보다 고2 아들한테 충격받았다. 반 친구들한테 서명을 받아오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엄마 그건 아냐. 우리 애들 다 관심 없어” 그러더라.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건 아닌가 싶었다.
강영희:아이들이 너무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세월호 아이들도 ‘공부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되지 않았나. 내 경우, 막내가 이번에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시작했는데, 그제서야 이런 얘길 하더라. “내가 배 안에 있었다면 친구들을 구하러 다시 들어갔을까?”라고. 학교 다니며 ‘야자(야간 자율학습)’에 치일 때는 “대형 사고가 이번에만 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하던 아이다.
임진영:어쩌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좋은 삶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다? 과연 좋은 직장이 뭘까? 내 남편이 모두가 선망한다는 S전자에 다닌다. 그런데 주말에 근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30시간 근무하고 퇴근했다가 눈만 붙이고 다시 출근하는 일도 있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지숙:나만 해도 대학생 때는 나름 사회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 다섯을 낳아 키우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한동안은 산후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 힘들다는 사법시험도 준비했던 내가 왜 이 정도 일을 못하지?’ 싶었다. 그런데 의사가 그러더라. “육아란 나 아니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에 24시간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 뒤로는 주변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고 육아와 가사에만 집중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사고를 겪으면서 나쁜 정치가 우리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시위하는 동안 집안이 엉망이 돼 있고, 아이 준비물도 제대로 못 챙겨주는 일이 반복되면서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해졌다. 내 아이한테 맛있는 것 먹이고 여행 보내고 공부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가 궁극적으로 행복하려면 내 아이 친구들, 나아가 사회 전반이 더불어 행복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려면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내 아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해 일정 부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수진:‘가장 이타적인 것이 가장 이기적인 것’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좋은 사회,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내 아이를 위하는 가장 빠른 길인 것 같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우리 가족’이라는 테두리에만 갇혀 있는 이도 많다.
임은주:사실 나는 앵그리 맘이라는 말도 잘 와 닿지 않는다. 선거 결과를 보고 내가 사는 경기도야말로 ‘멍청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임진영:나도 같은 생각이다. 교육감 선거 결과를 놓고 말이 많은데 나는 엄마들이 단순한 욕망에서 진보 교육감을 지지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혁신학교 하면 예산도 많이 주고 좋다더라, 뭐 이런 생각에서.
오지숙:1인 시위를 하다 보면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런 말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동남아 관광객들의 경우 시위 중인 나를 배경으로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곤 한다. 그런데 서구 쪽 관광객들은 굉장히 조심스러워한다. 말은 안 통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한, 안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건 결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학습돼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우리의 시민의식이 아직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앞으로 계획은?
김주희:할 수 있는 데까지 시위를 계속할 생각이다.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못하면 우리 아이들이라도 광화문에 설 것이다.
임은주:이번 일을 겪으며 20대 때 생각이 많이 났다. 그 시절 학내에 붙은 5·18 관련 게시물을 보며 ‘이게 사실일까?’ 반신반의했다. 기성세대를 비웃기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어른들은, 언론은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지금 아이들이 보기에 우리가 꼭 그런 모습의 어른일 것 같다. 20년 뒤 또 반성하고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임진영:대구지하철 참사가 벌어졌던 2003년, 대구에 살고 있었다. 당시 사고로 죽은 후배도 있다. 그러나 그 뒤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같은 세상이 만들어진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교육은 여전히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단원고 학생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따른 것은 절대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잘못은, 그렇게 지시를 따르고 질서를 지키면 손해 보는 세상을 만든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난 좋은 엄마가 아니다. 아이 키우는 일이 참 어렵다. 그래도 좋은 엄마는 못 될지언정 부끄러운 엄마는 되지 않겠다고 이번 기회에 결심했다.
오지숙:문창극 총리 후보자 이후로는 ‘하늘의 뜻’을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된다(웃음).
임은주:너무 어렵게 생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나는 ‘매일 아침신문 보기’ ‘저녁 9시 JTBC 뉴스 보기’를 수칙으로 정했다. 1인 시위나 서명운동 상황도 SNS에 열심히 올린다. 이런 작은 일을 하다 보면 옆 사람들과 함께 나눌 얘기가 생긴다. 처음엔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찾아볼수록 점점 많아진다(광화문 시위에 동참하고 싶은 이는 페이스북 그룹 ‘리멤버 0416’에 가입하면 된다).
사회:어렵게 모여주신 여섯 분께 감사드린다. 먼저 어떻게 광화문 1인 시위를 시작하게 됐는지 오지숙씨가 말문을 열어주시면 좋겠다.
강영희:나도 SNS에서 소식을 접하고 이분 점심 먹게 교대라도 해주자는 생각으로 광화문에 나가봤다. 처음 만난 날, 시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오지숙씨가 흰 순두부를 시켰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함께 간 이수진씨는 바로 알아채더라. 아마 입 안이 온통 헐어서 매운 걸 못 먹는 걸 거라고.
윤지희:아이 잃은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분들 앞에 슬픔을 드러내기도 그렇고…. 나 같은 경우 슬픔을 억누른 채 일상을 이어간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교육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는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을 정도다.
임진영:나는 지금 휴직 중인 교사다. 그런데 여섯 살 난 아들이 사고 뒤 내게 묻는다. “엄마가 배 안에 있었으면 학생 구할 거야? 그냥 나올 거야?” 그러고는 하는 말이 “엄마는 날 위해 살아 나왔으면 좋겠어”란다.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불안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싶어 짠하면서도 차마 아이가 원하는 답을 주지 못했다.
임은주:지난 주말 서울 신도림역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데, 행인 대부분이 관심 없다는 듯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며 상처를 받았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주 무심해서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날 서명 취지를 설명하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더니 길 가다 돌아와서 서명을 하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오지숙:유가족만 발을 동동 구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너무 속상하다. 얼마 전 은행에 갔는데, 업무를 보는 10여 분 내내 텔레비전에서 월드컵 이탈리아전 얘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며 화가 났다. 세월호 뉴스는 이미 공중파 방송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세월호를 덮고자 하는 뭔가 거대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광화문에서 40일 시위를 마치던 날 팽목항에 내려가 마무리 1인 시위를 벌였는데 운동복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아줌마, 어느 단체에서 나왔어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하더라. 사복 경찰인가 했는데 유가족이었다. 정부가 ‘순수한 유가족’ 어쩌고 하면서 자꾸 문제 삼으니까 그분들이 특정 단체와 연루돼 무슨 오해를 받을까 싶어서 그렇게 위축된 반응을 보였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