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3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KBS 예능국 분위기는 스산했다. 〈1박2일〉 유호진 PD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예능국 편집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울음이 가득 찬 사회에서 웃음이 설 자리는 없었다. 〈1박2일〉 〈개그콘서트〉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결방되었다. 유 PD는 걱정이 가득했다. 날이 더워지면 배를 타거나 벌칙으로 물에 빠지는 장면이 필요한데 ‘세월호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어서 최대한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방송을 재개하면서 유 PD는 산으로 멤버들을 데리고 가서 백패킹(캠핑 물품을 모두 짊어지고 떠나는 여행)을 하는 것으로 수행 과제를 설정했다.

한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사회를 비꼴 충분한 권리는 갖지 못하면서 사회 분위기는 그때그때 맞춰가며 웃겨야 한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웃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출연자를 정할 때도 정치 성향을 따져야 하고 프로그램의 경쟁 룰이 공정했는지가 국민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유 PD 인터뷰도 세월호 참사와 KBS 길환영 사장 해임 사태로 지면에 싣는 시기가 지연되었다).

ⓒ시사IN 신선영유호진 PD(왼쪽)는 세월호 참사 이후 바다 대신 산으로 멤버들을 데리고 갔다. 오른쪽은 황용호 PD.
유호진 PD가 KBS 〈해피선데이-1박2일〉 연출자로 내정된 것은 지난해 10월. 만 7년차 PD에게는 파격이었다. 일요일 오후 6시 시간대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선배들은 그를 일주일 넘게 설득했다. “너에게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의 정통성을 이어가자는 거다. 몰래카메라 사건으로 유명한 막내 PD가 메인 연출자가 되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스토리다.” 이 말에 유 PD는 마음을 돌렸다. 선배들이 내심 주목한 것은 그의 다양한 경력이었다. 소설을 썼던 적이 있고 3년간 잡지사 기자를 했다. 갈수록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의 경력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읽혔다.

〈1박2일〉의 경쟁력은 캐릭터의 매력에 있는데, 힘을 뺀 게 오히려 성공한 것 같다. 김주혁씨 캐릭터는 정말 의외였다. 소개한 분이 ‘주혁이 형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고 학구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분이 예능에 어울릴까 걱정스러웠다. 1시간 정도 인터뷰하면서 ‘왜 예능을 하고 싶으세요?’ 하고 물어봤는데 ‘뭐 제가 너무 조용한 이미지가 있으니 약간 소탈한 이미지도 필요할 것 같고 예능도 하나 해서 좀 친밀해지고 싶고…’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제가 취미도 없고 매일 집에 있어요. 여행도 안 좋아하고 친구도 좀 사귀고 싶고…’ 이러는 거다. 상당히 솔직하다. 방송을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순수함과 솔직함? 친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연예인? 이렇게 아무도 예상 못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웃길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는 많지만 어떻게 보면 약간 철없는 기미도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자기 철학이 확실한 40대 남성의 모습도 있고 그런 다면성…. 예능에서 다면성은 매우 중요하다.

ⓒKBS 제공<1박2일> 시즌3 녹화 현장(등 보이고 앉은 이가 유호진 PD). <1박2일>의 대본에는 대사나 지문이 없다.
다면성이 중요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먼저 전형적인 모습이 있어야 한다. 박명수는 화를 내고, 유재석은 착하고 좋은 사람. 강호동은 힘이 세고 고집스럽지만 인간적인 사람. 이런 전형적인 모습이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거기서 변주되는 포인트들이 재미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유재석이 제일 웃길 때는 유재석마저 짜증을 낼 때다. 박명수가 제일 좋아 보이는 때는, 봅슬레이 같은 거 끝내고 버럭 할 만한데 ‘괜찮아 우린 정말 잘했어…’라고 말할 때다. 그게 버라이어티의 리얼한 맛이다. 김주혁씨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잖은 얼굴에서 나오는 철없음, 괜찮아 보이다가 어떤 땐 막내처럼 음식 떼도 쓰고, 또 심드렁한 거 같았는데 ‘아니야 좋았어’라고 말하는 그런 표현들. 그런 게 좋다. ‘진정성으로 승부하겠다’고 했는데, 출연자들이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나? 연기를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을 텐데…. 〈1박2일〉에서 전형적으로 쓰는 방법이 출연자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알게 되면 연기를 할 수 있다. 현장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알게 해야 한다. 그래야 ‘아 이렇게 연기해야지, 멋있는 사람인 척해야지’ 이런 생각을 할 틈 없이 촬영할 수 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많이 발생할 텐데, 대본은 어느 정도로 나오나? 대본은 ‘언제 어디서 뭘 한다’ 정도다. 당연히 대사나 지문은 없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대본대로 간다는 것은 잘 안 풀린다는 뜻이다. 잘되기 시작하면 대본대로 안 간다. 중간에 이 대본을 타고 그대로 갈 거냐, 아니면 새롭게 갈 거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데, ‘트랙을 벗어나겠어’라고 생각하고 딱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준비해왔던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유호진 제공유호진 PD(가운데)는 KBS 입사 전 3년간 잡지사에서 일했다. 당시 일본 그룹 하버드와 찍은 사진.
현장에서 그런 판단을 해야 하니 힘들 것 같다.
무섭다. 사소한 것들은 일단 가본다. 아니면 돌아오면 되니까. 그러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싶으면 엄청 고민된다. 녹화를 중단하고 PD와 작가들이 현장에 모인다. 그때 멤버들도 같이 회의하나? 우리가 회의하는 것을 멤버들이 못 보게 하는 게 좋다. VJ랑 막내 PD를 붙여서 다른 미션을 준 뒤 우리끼리 회의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거 받을까 말까?’ 의논한다. 예전 팀은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잘 판단했던 것 같다. 우리의 경우 메인 작가는 방송 경력이 오래되었고, 나는 〈1박2일〉 조연출 경험이 있어서 거의 비슷한 결정이 나오곤 한다. 프로그램에서 갈수록 기획이 중요해지는 것 같다. 기획회의를 독하게 한다고 들었다.
요즘은 오후 2시에 기획회의를 시작하면 밤 12시쯤 끝난다. 내가 막내 PD였을 때는 새벽 3시나 4시까지 하기도 했다. 나영석 PD와 이우정 작가가 함께할 때인가? 그렇다. 그 팀의 모토는 ‘너무 쉽게 결론이 도출되면 거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3시간 만에 회의가 끝났으면 ‘이 회의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A, B, C가 기계적으로 도출되면 ‘이거는 보는 사람도 100% 기계적으로 도출한다’ 그래서 다 엎고 새로 시작하곤 했다. 오래 회의를 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나? 나영석 PD는 팀을 매니지먼트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긴 회의 때마다 중간중간 위트를 발휘해 회의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본인이 절대 상석에 앉지 않았다. 회의를 하면 보통 PD가 긴 테이블의 가운데 앉고 작가들과 조연출이 옆에 쫙 앉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상석에 절대 앉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섞여 앉는다. 창가에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지금 아주 캐주얼한 자리야.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있어’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그러고는 만족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회의를 한다. 예능의 흐름이 변한 것 같다. ‘웃음’만으로는 승부가 안 나고, ‘감동’까지 요구하는 상황인데, 시즌 3에서 최고의 프로그램을 뽑는다면? 2월에 설 특집으로 ‘서울, 시간여행’ 편을 만들면서 제일 즐거웠다. 나는 낡은 것,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세대를 이어서 전해지는 것들은 특별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개발정책에 불만이 많다. 유행이니까 막 만들고 유행이 지나면 흉물스럽게 되고. 그러니 철거를 안 할 수는 없고. 저걸 옛날에 제대로 만들었으면 철거 안 하고 참 좋을 텐데 싶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1박2일〉 하면서 많이 봐왔다. 그런 거에 관해 에둘러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프로그램 중반에 멤버들이 명동성당, 창경궁 등 서울의 오래된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찍은 각자 부모님들의 젊은 시절 사진이 나왔다. 대단한 반전이었고 감동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더라. ‘사람들이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있구나. 부모나 가족을 다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고, 또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고 내가 언젠가 다시 와도 거기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욕심 같은 게 모든 사람한테 있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다. 그 사진을 보고 울컥한 시청자가 많았을 것이다. 웃기는데 감동이 있으니 더 뭉클해졌다. 그 프로그램이 막 웃기는 구성은 아니었다. 그런데 의외로 시청률이 잘 나왔다. ‘감동이 있으면 조금만 우스워도 많이 웃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달콤한 음료를 만들기 위해 약간의 소금이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감동 속에 약간의 웃음만 집어넣어도 훨씬 풍성해지는구나. 너무 무리해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웃기는 것보다는 흐뭇하고 따뜻한 이야기 속에서 적당한 정도의 웃음을 주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30초나 1분에 한 번씩 웃음이 터져야 된다’는 이야기는 이제 지나간 건가? 내가 굳게 믿는 것 중 하나가 ‘선호감 후웃음’이라는 것이다. 호감이 있는 사람은 조금 덜 재밌는 농담을 해도 웃어준다. 장동건 같은 사람이 토크쇼에 나와서 ‘제 마누라는 아침에 밥도 안 해주고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빵빵 웃는다. 사실 그리 우스운 이야기는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개그맨이 토크쇼에서 하면 ‘아 이제 뭐 웃기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나 보다’ 정도의 시그널에 불과하다. 똑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했는데도 호감인 사람이 이야기하면 많이 웃어주고 비호감인 사람이 이야기하면 안 웃어준다.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호감 가는 프로그램이라면 조금 덜 웃겨도 웃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웃어준다. 요즘 ‘인터넷 즐겨찾기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특히 즐겨찾기 리스트를 소중히 여기는 PD들이 많던데? 나는 유튜브 검색을 많이 한다. 크리스 록(Chris Rock)이나 루이스 시케이(Louis C.K.)가 진행하는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를 즐겨본다. 그들은 약간 사회 참여적인 코미디를 하는데 공화당 비판도 많이 하고 민주당 바보 같다는 이야기도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도 자주 들어간다. 자연 다큐멘터리나 새로 나온 클립을 보면 특이한 촬영 기법이 있다. 암벽등반 같은 것을 익스트림하게 촬영한다. 해외 광고와 일본 예능 프로그램도 다운받아 보고 최근에 창간한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도 본다.

예능 프로그램의 진화는 눈부시다. ‘감히 예능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예능 PD의 수상 소감도 나온다. 반면에 풍자와 해학은 사라지고 모든 사안을 가볍고 얕게 풀어내는 분위기를 사회에 만연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볼 때, 예능 장르가 범람하거나 사회적 담론이 예능으로 치우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예능 이야기만 하고 사회적인 이슈가 소외되는 것은 문제다. 그렇다고 우리가 계몽 프로그램을 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 의미까지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웃음에 의미를 잘 녹여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 아직은….

기자명 황용호 (KBS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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