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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 모양인데 가만히 있으랴?

국가와 사회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 세월호 사건과 함께 한국은 아주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갔다. 국가는 ‘결사적’으로 사회를 통제한다. 노조와 사회단체들 역시 존재 가치에 대한 시험에 들었다.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webmaster@sisain.co.kr 2014년 05월 15일 목요일 제3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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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에 의해 생환된 사람, 0명. 세월호 사건과 함께 한국은 아주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갔다. ‘국가 혹은 사회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던져진다는 것 자체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상처이자 전환점으로 기록될 사건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구조적 모순들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고나 재해들이 모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세월호 사건은 생각지 못한 한국 사회의 무기력과 무능력, 그리고 대책 없음을 마지막 하나까지, 그 끝이 어디인지조차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보여주고 있다.

“이게 나라냐” “이건 나라가 아니다” “이건 나라일 수 없다”라고 사람들이 탄식한다. 우리는 진도에서 철저히 무능력한 국가를 보았다. 어떤 무능력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바로 그 국가의 무능력이다.

푸코는 근대 권력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고 불렀다. 중세 때까지의 권력은 목을 자르고 능지처참하는 것과 같이 사람을 죽게 하는 것으로 권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근대 권력은 반대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돌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권력이다. 다른 것은 다 제치더라도 그거 하나는 국가로부터 기대하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사람을 살게 하는 권력’으로서의 무능함, 무기력, 그리고 심지어 무관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권력을 우리는 지금 진도에서 만나고 있다.

그러나 진도 밖으로 눈을 돌리면 전혀 다른 국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국가는 전광석화처럼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사건이 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 교육부는 전국의 학교에 ‘학교·학생 안정화 방안’이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학생들에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허위적인 유언비어의 유포 확산 개입을 금지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배 안에 갇힌 학생들을 구하는 데는 그리도 굼뜨더니 학교에 있는 학생들을 단속하는 데는 매우 신속했다. 자신의 SNS에 세월호에 대한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린 현직 교사가 징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서울 마포구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내건 추모 현수막이 철거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경기도 안산 문화광장에 모인 시민들이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경기도 안산 문화광장에 모인 시민들이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국가는 진도에서는 고장 난 기계 같지만 진도 밖에서는 체계적이고 촘촘하게 작동하고 있다. 진도에서 사람을 구하고 희생자 가족을 돌보는 데는 철저하게 무능하고 무관심하지만, 진도 밖에서 ‘사회’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데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완전한 무능력과 철저한 유능함. 그 어느 것 하나가 아니라 이 둘이 묶음으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국가’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얼굴의 국가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다. 국가를 견제하는 ‘사회’가 출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고 통제하는 것. 가히 ‘사회 통제 권력’이라고 할 만하다.

대신 허용하는 것은 애도와 미담이다. 단, 애도와 미담 역시 정치의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애도는 철저히 국가가 만든 애도의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국민은 정치권력에 대해 ‘책임을 묻는 주체’가 아니라 그저 ‘슬퍼해야 하는 존재’로 한정된다.

정부합동분향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개별적으로 끊어져 있다. 개별적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애도의 사회화’야말로 애도하는 이들을 강력하게 묶는 끈이라는 것을 잘 아는 국가는 크고 작은 다른 분향소를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오로지 이 죽음에 대해서만 애도하게 하고 동시대의 다른 죽음을 떠올리고 애도하는 것을 ‘불온하다’고 비난한다.

다른 한편 허용되는 ‘사회화’는 오직 미담뿐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유대와 연대를 통해 ‘비용’을 절약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국가가 손을 놓은 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안산의 택시기사들은 무료로 안산에서 진도까지 희생자 가족들을 실어 나른다. 전국의 소아정신과 의사들이 단원고에 모여 학생들을 만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안산의 장례식장은 돈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애도와 미담만 허용되는 사회

국가는 이런 사회적인 것을 정치와 상관없는 미담으로만 허용한다. 이 미담들이 국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감시하고 통제한다. 미담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모으고(집회), 묶고(결사), 현수막을 내걸거나 피켓을 들고 행진하며 국가에 질문을 던지는 것(표현)은 철저히 통제한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요구한 몇몇 현수막 문구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불허했다. 교육부는 교사들이 추모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통제하려 했다.

근대국가는 독재국가를 제외하고는 점차 ‘사회’라는 걸 활성화함으로써 통치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결사와 적극적인 공론화를 통한 활성화다. 이 결사와 공론을 통해 국가는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불화를 체제 내로 끌어들여 공론을 거쳐 존속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개개인이 모이고(집회), 묶이며(결사), 그들의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표현과 출판), 공론으로 만들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반영되는 것을 통해 갈등을 제도화한 것이 근대국가였다. 물론 그 대의는 늘 부족했고 기만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목격하는 국가는 사회가 활성화되는 것을, 결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통제하는 권력이다. 만남과 흐름을 단속함으로써 시민들을 개별화하고 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통치하려 한다. 이미 우리는 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강정에서, 밀양에서 보았다. 사람과 사람들이 만나고 연결되는 것을 외부 세력이라 비난하면서 고립시켜 통치를 관철하는 모습을 말이다. 시민들을 고립시킴으로써 국가를 견제할 사회적 힘을 유례없이 해체하고 약하게 만드는 통제 권력, 이 불길한 권력과 우리는 지금 맞닥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하다. 국가에 대항하는 질문과 만남의 장, 즉 ‘사회’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애도는 이어지고 만나, 지금 이 자리에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동시대인으로 묶어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교사들은 교사들끼리 모여 애도하며 이 슬픔과 학생을 책임진 사람들로서 현장에서 자신들이 겪는 공포를 나누고, ‘책임지고 가르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며 행진해야 한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모여 슬픔과 공포를 나누며 ‘보호하지 못하는 보호주의’의 존재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행진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 행진은 이미 시작되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는 애도와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모임과 묶음이 자발적인 시민들의 움직임으로만 시작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결사체인 노조와 사회단체들은 늘 그 뒤에 숨어 있다. 애도를 정치화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이며 권력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바로 그 비난을 극복할 수 있는 ‘너머’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결사체의 몫이다. 사회가 파괴되는 때에 존재 가치가 시험에 든 것은 국가만이 아니다. 사회적 결사체들 역시 자신들의 역량에 대한 시험에 들었다. 시민들 뒤에 숨어서 시민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시민 옆에서 시민을 지킬 것인가? 답은 하나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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